「정채봉.류시화 - 작은이야기 2」
서울역이다.
연(延)이가 도착하기까지는 아직도 15분이 남았다.
영하의 추운 날씨다.
마중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기다리는 시선을 외투깃에 묻은 채 빠른 제자리 걸음으로 서로들 초조(焦燥)해한다.
그러나 나는 마치 첫아기를 낳아 가지고
친정을 다니러오는 딸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사뭇 설레고 흐뭇하기만 하다.
추위마저 느낄 수 없는 것은 나의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진 맏딸 연이가,
기한부 '시골유학'을 갔다가 이제 싱싱한 냉이 달래의 내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기한부 시골유학,
한 마디로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 같지만 재작년 봄이었다.
메마른 인정, 각박한 도회지의 생활에 시들어만 가는 연이의 동심에 무엇인가 신선한 것을,
때묻지 않은 시골의 정취를 불어넣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연이를 2년 간이란 기한부로 시골유학을 보내기로 했다.
장소는 아내의 고향이자 연이의 외갓집이 있는 충남 금산(錦山)의 인삼골,
그곳은 아직 때묻지 않은 동심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시골 마을로,
향나무 울타리 사이로 노란 개나리가 휘어지게 피고,
보리밭 둑길을 따라 나물 캐는 여자들과, 벼를 싣고 방앗간으로 가는 소달구지를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곳이다.
더구나 인삼골은 연이의 엄마를 내게 보내준 해바라기 사연이 묻혀 있는 곳으로,
내겐 평생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연이가 금년으로 열 두 살이니까 꼭 12년 전의 일이다.
그때도 오늘 같이 추운 영하의 날씨로, 겨울 방학 때였다.
나는 서울역 바로 이 자리에서 초조한 눈빛을 외투 깃에 묻고 미지의 시골 처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는 스믈 두 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초면의 인삼골 여교사였다.
수없이 오고 간 편지의 사연으로 이미 깊은 정이 들어 만나면 손이라도 덥석 마주 잡을 사이였지만,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복잡한 대합실에서 서로를 알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그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표시가 있었다.
그것은 온다는 소식에 앞서 내가 보내 준 해바라기 무늬가 있는 녹색 바탕의 스카프였다.
해바라기 무늬의 스카프...,
봄나물의 싱싱한 시골 정취를 풍기는 처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푼 나는
그날도 여기 서울역에서 영하의 혹한을 무릅쓰고 해바라기 무늬의 스카프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교사를 알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여름 방학 때였다.
묵은 신문을 뒤적이다가 나는 무심코 어느 여성 독자의 투고란을 읽게 되었다.
시골 장날에 벌어지는 교실 주변의 정겨운 풍경을 그린 원고지 서너 장 정도의 토막글,
필자는 그곳 학교의 여선생이었다.
나는 그 여교사의 명랑한 문체에 끌려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왔다.
그로부터 답장은 답장의 꼬리를 물고 서로의 사연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만 1 년.
편지 600여 통이 오간 이듬해 가을이었다.
나는 견디다 못해 사진이라도 한 장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보내라는 사진은 보내지 않고, 잘 여믄 해바라기 씨 몇 알을 깨끗한 색종이에 싸 보냈다.
"우리 집 대대로 심어 오는 해바라기입니다."
그 해바라기의 씨앗을 받아 보낸다고만 했다.
짧고 수식 없는 단 한 줄의 글,
그 글 속에 무한히 많은 사연이 깃들여 있음을 내 나름대로 해석했다.
씨앗을 보낸다는 것은 심으라는 뜻,
심으라는 것은 대를 이어 해바라기를 같이 키워 보자는 뜻으로 나는 알았다.
그 씨앗을 이듬해 봄,
나는 하숙집 장독대 옆에다 심게 되었고,
그게 자라서 탐스럽게 씨알이 영글어 갈 무렵, 해바라기 여교사는 마침내 내게로 시집을 왔다.
이제 5분만 더 참고 기다리면 우리 연이가 "아빠!" 하고 소리치며 달려들 것이다.
해바라기처럼 키가 늘씬하게 커 가지고,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기분, 흐뭇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새 기차가 도착했는지,
트렁크를 사이 좋게 맞든 신혼부부 한 쌍이 발걸음도 가볍게 출구로 나오고 있다.
순간, 그게 내 딸 연이가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한다.
그렇다.
앞으로 10년,
꼭 10년만 있으면 연이가 스물 두 살이 되고, 10여 년 전 제 엄마의 나이가 된다.
그때가 되면 늙어 볼품없는 아빠가 아닌 젊고 싱싱한 청년의,
체구도 늠름한 신랑감이 나 대신 여기 서울역에 지키고 서서 연이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고,
그날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미소를 짓는다. (p22)
글-오창익(남산공고 교감)
※ 이 글은 <작은 이야기 2>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정채봉. 류시화 - 작은이야기 2
샘터(샘터사) - 199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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