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신문 - 2022. 09. 05. 문학마당 」
늦여름 장마로 화단에 수북이 자란 풀들을 뽑다 손톱 밑에 분홍 물이 비쳐, 나뭇잎 사이로 끼어든 햇살을 손차양하고 손가락 끝을 살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보일 둥 말 둥, 손톱 밑에 낀 작은 풀꽃이 아직 숨을 쉬며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숨이 멎는 듯 답답하고 안쓰러웠다.
키 큰 나무 밑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잎도 줄기도 꽃도 그저 형체만 있을 뿐. 아무것도 아닌, 그냥 지나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얘기라고 나를 달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 한 송이 꽃을 피우기까지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며 눈물 흘린 세월이 있었을 것이니, 생각 없이 손놀림했던 내가 미웠다.
어디서 날아와 터를 잡았을까. 혹 빗물 타고 왔을까?
밭 가장자리나 골목 담장 밑 등, 습한 땅 어디서나 함부로 내딛는 사람들 발길에 짓밟히면서도 봄부터 가을까지 쉬지 않고 1cm 미만의 흰색에 가까운 연한 분홍색 꽃을 피우는 주름잎 풀.
꽃잎 뒤에 두세 개의 주름이 져 있다고 해 ‘주름잎 풀’이라 불린다는데, 눈도 밝지, 어떻게 그 작은 꽃 뒤쪽 주름을 찾아내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꽃이 정말 작다. 그런데도 꽃말은 당차게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다.
손바닥 위에 꽃을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창문을 열고 편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가지 끝에 흰 것 하나 하늘의 뜻을 보이노라.” 조선조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무심히 나뭇가지 끝의 꽃이 피는 꽃눈 하나를 보고 하늘의 뜻을 읽어낸다고 했다.
기적이다. 하늘의 뜻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꽃이 피는 것도 꽃이지는 것도 모두 기적이다.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것이 없다더니 정말 그렇다. 스쳐 지나는 바람 한 점, 떨어지는 빗줄기 하나, 안쪽에 닿은 햇살 한 줌을 고이 모아 꽃으로 피워냈다. 그래 작은 풀꽃 한 송이에는 우주가 담겨 있음을 알게 한다. 들여다볼수록 모든 것이 신비롭고 경이롭다. 풀, 풀잎. 풀꽃, 입에 올리기만 해도 어느새 몸이 풀물 드는 것 같아 상쾌해진다.
이 작은 꽃을 피워 뭘 하겠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풀꽃 한 송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나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님은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무생물까지 한울님으로 모셨다(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 어찌 잡초인들 소중하지 않겠는가. 오래오래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이 전하는 말을 듣는다.
관심을 두고 기다리다 보면 문득 한순간에 꽃과 나무와 바람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가 있다.
꽃을 보면 꽃이 말을 걸어온다. 물망초는 잊지 말라 하고, 모란은 부귀영화를, 원추리는 기다리는 마음, 수련은 청정과 순결을 얘기한다. 꽃을 말할 때마다 꽃말을 처음 만든 사람을 생각한다. 그리고 꽃말을 의사소통의 매개로 사용하는 우리도 생각한다.
꽃은 사랑을 대신하기도 하고, 행복을 대신하기도 하고, 부귀를 대신 하기도 한다. 꽃은 나비와 벌을 부르고, 새도 부르고, 사람의 눈과 코, 마음을 부른다. 그래 꽃은 아름답다.
꽃 이름은 또 누가 짓는 것일까. 꽃 이름에는 옛 분들의 고단함과 재치와 해학이, 부르기 민망한 이름도 제법 많다. 밥풀꽃, 요강꽃, 개불알꽃, 홀아비바람꽃, 며느리배꼽꽃, 씨엄씨밑씻개, 며느리밑씻개, 애기똥풀 등.
들풀은 참 잘도 자란다. 잡초라고 부르는 들풀들은 사람의 손길로 뽑아내도 악착같이 살아나는 걸 보면 생의 의지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꽃밭에서 재배되는 화초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꽃을 피우지만, 들풀은 오직 종족 번식을 위해 피우기에 굳이 사람의 눈길을 끌 필요가 없다. 아니 사람의 눈길을 피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더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손바닥 위, 콩알만 한 작은 꽃이지만 분홍 주름잎 풀꽃은 보면 볼수록 곱다. 사소함이 주는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글 - 임인택
광주·전남 문인협회 회원
광주문학상, 영호남문학상, 보성문학상 등 수상
전남수필문학회 회장, 문학춘추작가회 회장 등 역임
수필집 : ‘섬은 아득히 구름 저편에 있고’ 외 3권
출처 - 광주매일신문 http://m.kjdaily.com/article.php?aid=1662372521583360202
[t-22.09.06. 20220901-153822]
'내가만난글 > 단편글(수필.단편.공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장웹진-잃어버린 입(나여경) (0) | 2022.12.04 |
---|---|
곶감과 수필 (0) | 2022.10.10 |
우리집 행복 5계명 (0) | 2022.08.28 |
한사람도 없으니 어쩌냐! (0) | 2022.08.22 |
조세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3) (0) | 2022.08.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