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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

초콜릿 우체국 - 초콜릿 우체국

by 탄천사랑 2024. 5. 13.

· 「황경신 - 초콜릿 우체국」

 

 

 

겨울 05 - 초콜릿 우체국 
어느 날 골목길을 돌았는데 그전에 보지 못했던 작은 가게 하나가 나타났다.
작은 쇼윈도 안에 갖가지 모양의 초콜릿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초콜릿 가게인 듯했다.
쇼윈도 옆에는 오렌지 빛깔의 작은 문이 달려 있었는데,
그 문에는 우체국 마크가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곳은 우체국인지도 모른다.
우체국에서 왜 쇼윈도를 만들고 거기에 초콜릿 같은 것을 전시해 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골목에, 지금까지 없었던, 초콜릿 가게 같기도 하고 
우체국 같기도 한 것이 나타난 것은 그해 들어 가장 추웠던 날이었다.
나는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칭칭 동여맨 채 종종 걸음으로 골목을 걷고 있었다.

저게 뭐지, 초콜릿 가게인가 우체국인가, 하는 생각과, 
어느 쪽인지 몰라도 이렇게 늦은 밤까지 문을 열어두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친구들과 헤어진 시간이 열한 시였으니까, 이미 열두 시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날씨가 그렇게 춥지만 않았다면, 나는 아마 초콜릿 가게 또는 우체국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을 것이다.
원래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니까, 
하지만 그때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발길을 재촉하여, 갖가지 모양의 초콜릿이 진열되어 있는 쇼윈도를 지나쳤다.

현관에는 누군가 문 아래의 작은 틈 사이로 밀어 넣어둔 광고 전단지 두세 장이 떨어져 있었다.
별생각 없이 그것들을 주워 휴지통에 버리려는데, 그중 한 장에 실려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되는대로 만든 광고 전단지에 실릴 만한 사진은 아니었다.
구도도 좋고 빛도 좋고 느낌도 아주 좋았다.
유심히 그걸 들여다보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건 조금 전 내가 스쳐 지나온 초콜릿 가게 같기도 하고 우체국 같기도 한,
그 가게의 전경 사진이었다.
사진 위에는 큼직한 글씨로, '초콜릿 우체국'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날은 전날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그 골목을 지나게 되었다.
전철에서 내렸을 때, 전철역의 시계는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초콜릿 가게 같기도 하고 우체국 같기도 한, 그러니까 말하자면 '초콜릿 우체국'은, 
역시 따뜻한 오렌지빛 불빛을 밝혀 두고 있었다.
날씨도 전날보다 춥지 않아서, 나는 잠시 동안 쇼윈도 앞에 붙어 서서 진열된 초콜릿들을 구경했다.
밸런타인데이에 맞춰서 쏟아져 나오는 초콜릿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초콜릿들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게 있다면, 
상자 안에 초콜릿이 여러 개 들어 있는 경우는 없고, 전부 하나씩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별로, 초콜릿을 살 일은 없지만, 생각하며 나는 오렌지 빛깔의 문을 밀고 '초콜릿 우체국' 안으로 들어갔다.
기게 안은 작은 우체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표를 사는 곳이 있고, 소포를 부치는 곳이 있고, 접수를 받는 곳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누구 안 계세요, 
하려는데 안쪽에서 작은 문 하나 가 열리더니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한쪽에 놓인 소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 초콜릿을 사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내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앞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초콜릿 우체국이란 게, 뭐 하는 곳인가요? 광고 전단지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어서..."
"뭘 하는 곳이었으면, 하고 생각하십니까?" 

남자는 도리어 내게 반문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
"우체국이니까 누군가에게 뭔가를 부칠 수 있는 곳이겠죠.
 그리고 그 뭔가는 아마도 초콜릿이겠죠" 하고 대답했다.

"그것이 당신 생각입니까."  남자가 말했다.
"아마, 그런 것 같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누구에게 초콜릿을 보내고 싶습니까."  남자가 말했다.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딱히..."  나는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이라는 말은, 이전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남자가 말했다.
"아마도..." 나는 말했다.
"이전이란 것은, 얼마나 오래전입니까" 남자가 말했다.
"3년이나 5년 전, 어쩌면 10년 전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말했다.
"만약 그때의 누군가에게로 초콜릿을 보낼 수 있다면, 보내시겠습니까." 남자가 말했다.
"그때의 누군가에게로.... 라구요?" 나는 말했다.
"3년 전, 5년 전, 또는 10년 전의 누군가, 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3년이나 5년 또는 10년 전의 누군가에게 초콜릿을 보낸다면,
 그 사람은 당황하지 않을까요?"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3년 전, 5년 전 또는 10년 전의 당신이,  
 3년 전, 5년 전 또는 10년 전의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으로 합시다" 남자가 말했다
"그런 일이 어째서 가능 한가요?" 나는 말했다
"여기는 초콜릿 우체국이니까요" 남자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남자가 내민 조그만 종이 위에 내 이름을 썼다.
나이를 쓰는 칸에 지금의 내 나이를 기입하자 남자는 고개를 흔들며 
"그때의 나이를 쓰세요"라고 말했다.

직업을 쓰는 칸에 지금의 직업을 기입하자, 남자는 고개를 흔들며 
"그 당시의 직업을 쓰세요"라고 말했다.
'받는 사람의 이름'을 쓰는 칸에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사람의 이름을 써넣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의 주소'를 쓰는 칸에서 막막해졌다.

- "주소는 몰라요. 초콜릿 같은 건 한 번도 보내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말했다.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찾을 수 있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남자의 안내를 받아, 진열된 초콜릿 중의 하나를 골랐다.


2003년 2월 14일 밤, 
골목길을 돌았는데 '초콜릿 우체국'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2월 14일이 아니라 2월 15일 0시였다.
나는 초콜릿 우체국이 있던 그 골목을 오래 서성였다.
한참을 서성이다 보니 그곳에는 원래 평범한 집들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났다.
나는 바보 같은 꿈을 꾸었던 것이다. 
초콜릿 가게 같기도 하고 우체국 같기도 한 곳에서, 
3년 전, 5년 전 또는 십 년 전의 누군가에게,
3년 전, 5년 전, 10년 전의 내가 초콜릿을 보낸다는 건 처음부터 바보 같은 이야기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초콜릿 우체국'이라고 찍힌 광고 전단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아무렇게나 구겨서 휴지통 속에 집어 넣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3년 전, 5년 전, 또는 10년 전의 그 사람이 몹시 그리워졌다. 
나는 충동에 사로잡혀 한쪽 구석에 처박아둔 오래된 상자를 꺼냈다

최근의 3년, 5년 또는 10년 동안 이렇게 강렬한 그리움을 느낀 일은 없었다. 
나는 충동에 사로잡혀 한쪽 구석에 처박아둔 오래된 상자를 끄집어냈다. 
그 상자 속에는 그 사람이 내게 준 편지, 책, 레코드와 한두 가지 작은 선물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3년, 5년 또는 10년 만에 꺼내 보았던 것이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진 아이처럼 서러워졌다. 
그 상자 속에는 우리가 아직 헤어지지 않았던 시간들, 
우리가 아직 서로 사랑하던 공간들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낡고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하릴없이 상자 깊숙이 숨어 있는, 한 권의 낡은 시집을 꺼냈다. 
시집을 몇 장 들추었을 때, 책갈피 속에 낯선 종이 한 장이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그때의 내가 발겨나지 못했던 아주 얇은 습자지였다.
습자지 위에는 희미하게, 연필로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의 필체였다. 
나는 천천히 소리 내어 그 글씨를 읽었다.

<초콜릿, 고마워. 아주 먼 곳에서 온 듯한 향기가 났어.... >



※ 이 글은 <초콜릿 우체국>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황경신 - 초콜릿 우체국
북하우스 - 2004. 06. 17.

 [t-24.05.13.  20240508-174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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