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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

행복을 향한 의지

by 탄천사랑 2024. 1. 25.

·「토마스 만 - 행복을 향한 의지」

 

 

행복을 향한 의지

어렸을 때부터 심장이 약했던 파울로는 성장을 해서 화가가 되었지만 역시 건강은 좋지 못하다. 청년이 된
그는 남작의 딸 아다와 사랑에 빠졌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그녀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자 멀리 여행을 떠
난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딸이 파울로가 아니면 결혼할 수 없다고 버티자 결국 그녀의 부모는 결혼을
허락하고, 병약한 몸으로 행복을 향한 의지 하나만으로 꿋꿋하게 버티던 파울로는 결혼하던 날 밤에 죽고
만다. 행복을 향한 의지가 채워 지자마자 살아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남아메리카에서 농장을 경영하여 돈을 좀 벌어들인 늙은 호프만은 
그곳에서 가문이 좋은 여인과 결혼한 후 아내를 대리고 자기 고향인 북부 독일로 돌아왔다.
그들은 내가 태어난 거리에 터를 잡았고 그곳에는 그의 다른 가족들도 살고 있었다.

파울로 역시 그 거리에서 태어났다.
나는 그의 부모에 대해 더 이상 자세히 모르지만 어쨌든 파울로는 자기 어머니와 꼭 닮았었다.
내가 파울로를 처음 만난 것은 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는데, 
파울로는 얼굴이 누런 마른 소년으로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당시 그의 검은 머리는 곱슬곱슬했고 
세일러복의 깃 위에 마구 늘어져 가뜩이나 여원 얼굴을 더욱더 에워싸고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파울로 역시 집에서는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 힘들게 적응해야만 했다.
살풍경한 교실이나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들에게 ABC를 가르치고 말겠다는 
빨간 수염 대머리 선생과는 아무래도 사궐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파울로는 벽에 기댄 채 꼼짝하지 않고 작은 입술을 악물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희망에 부푼 다른 소년들이 서로 옆구리를 찌르거나 웃고 떠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이질적인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우리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 끌리는 것을 느꼈으며,
빨간 수염의 선생이 우리를 옆자리에 함께 앉도록 해주었을 때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 후에도 우리는 함께 어울리며 서로 아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매일같이 버터를 바른 빵을 나눠먹곤 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 무렵 이미 병에 들었던 파울로는 이따금 오랫동안 학교를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가 그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에는 약한 살갗에 파묻힌 창백한 혈관이 
관자놀이며 빰에 그 어느 때보다 더욱더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뮌헨에서 재회했을 때나 그 뒤에 로마에서 만났을 때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창백한 혈관이었다.

우리의 우정은 학창 시절 내내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바로 열 다섯의 나이에 남몰래 하니네를 탐독하고 
중학교 3학년 시절에 이미 세계나 인간에 대해 번민하던 공통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그 무렵 우리는 첫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의 마음을 사로 잡은 소녀는 금발머리의 쾌활한 소녀로 그는 그녀를 줄기찬 열정으로 사랑했다.
그것은 그 또래의 소년에게서는 보기 드문 열정으로 그로 인해 나는 가끔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특히 어느 무도회에서 그 소녀는 계속해서 다른 남자들과 두 번이나 춤을 추면서도 
파올로와는 한 번도 춤을 추지 않았다.

나는 파올로가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하여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때 그는 벽에 기댄 채 자신의 구두 끝만 바라보고 있더니 갑자기 실신해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집으로 옮겨졌고 9일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의 심장이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는 그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나는 그가 그린 그림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소녀의 얼굴을 목탄으로 휘갈겨 그린 것으로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그 그림 밑에는 '당신은 꽃처럼 아름답소! 파올로 호프만 그림'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정확한 날짜를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부모가 카를스루에로 이사를 간 것은 우리가 상급생일 무렵이었다.
그때, 파올로는 전학을 가지 않고 어느 늙은 교사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갑자기 부모의 뒤를 따라 카를스루에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가 갑자기 떠나버린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다음과 같은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종교 시간에 강의를 하던 종교 선생이 갑자기 그에게로 걸어가더니 
그의 앞에 놓여 있던 구약성서 밑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거기에는 아직 왼쪽 허벅지만 그려지지 않은 관능적인 여자의 모습이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그려져 있었다.

어쨌든 파울로는 카를스루에로 떠났고 우리는 서로 엽서를 보내며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덧 그것도 끊어지고 말았다.
우리가 그렇게 헤어진 후 다시 뮌헨에서 만났을 때는 거의 5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다.

어느 아름다운 봄날 아침,
나는 아마리엔가의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아카데미 입구의 계단을 내려오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그는 마치 이탈리아 모델 같은 멋진 인상을 주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틀림없는 파울로였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고 기쁨에 겨워 얼싸안았다.
그런데 우리가 카페 미네르바 앞에서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을 떼,
그는 극도로 긴장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밝게 빛났고 행동은 세련되었지만 어쩐지 몸에 이상이 있는 환자 같았던 것이다.
그의 낯빛이 너무도 창백했으므로 나는 직접적으로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아직도 그렇게 보이나?"  그는 반문했다.
"나는 좀 좋아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에는 몹시 안 좋았네, 특히 여기가 말이야....,"  그는 왼손으로 가슴께를 눌렸다.
"옛날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지.
  그렇지만 요즘은 제법 좋아진 것 같아. 완전히 튼튼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긴 스물 셋이라는 창창한 나이니까...., 이 나이에 몸이 쇠약하다면 불쌍한 노릇이 아닌가."

그는 기분이 좋았던지 헤어진 이후의 일들을 기준 좋게 이야기 했다.
학교를 떠난 이후 그는 부모를 설득하여 화가가 되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고 
약 9개월 전에 미술 아카데미를 마치고 잠시 파리에 머물다가 4개월 전에 뮌헨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 오래 머물 것 같네. 어쩌면 영원히 머무르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
"이 거리가 아주 마음에 들어. 게다가 화가의 사회적인 지위가 좋다는 이점도 있네.
  무명의 화가라 할지라도 사회적인 지위가 좋거든, 어딜 가든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걸세...,"
"그래, 혹시 좋은 친구라도 생겼나?"
"조금은... 정말로 좋은 친구들이야. 자네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가족이 있다네.
  사육제 때 알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특히 사육제를 대단하게 치르지.
  그 가족은 슈타인이라는 남작 집안이라네."
"돈으로 귀족 지위를 샀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그 남작은 상당한 재력가로 전엔 빈에서 기막힌 역할을 했었다고 하더군.
  그때 공작들이나 그 밖에 쟁쟁한 인물들과 교재를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실각해 버렸다더군.
  소문에 의하면 백만 마르크 가까운 돈을 수중에 넣고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여기 와서 살고 있다는 거야.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지."
"유대인인가?"
"그렇지 않은 모양이야. 뷰인은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유쾌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일세." 
"그래, 아이는 있나?"
"아이들은 없어. 물론 열아홉 살 먹은 딸이 하나 있긴 하지.
  그들은 정말 상냥하고 좋은 사람들이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자네를 그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네. 어떤가?"
"정말 고맙군, 
  그 열아홉 살짜리 아가씨와 가까워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는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좋아. 자네의 형편이 괜찮다면 내일 한 시나 한 시 반쯤에 자네를 데리러 가겠네.
  그들은 테레 젠가 25번지의 1층에 살고 있어. 자네를 그들에게 소개하다니 정말 기쁘군."

이튿날 정오, 우리는 테레 젠가의 훌륭한 저택 1층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 곁에는 크고 검은 글씨로 '남작 슈타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파울로는 그곳에 가는 도중에 줄곧 기쁨에 들떠 흥분하고 있었는데
막상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에게서 이상한 변화를 감지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는 완전히 냉정을 되찾고 침착해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명함을 들고 안으로 들어간 심부름꾼은 남작 부인이 곧 나오실 것이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우리를 넓고 어두운 장식으로 꾸민 방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갈 때, 
길가 쪽으로 보이는 창 너머로 밝게 화장을 한 젊은 여인이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곁눈질하면서 '열아홉 살 처녀로군' 하고 생각했다.

"남작의 딸 아다야!

그는 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회사 한 차림의 그녀는 나이에 비해 한층 성숙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두 가닥 곱슬머리가 이마에 늘어져 있는 그녀의 머리칼은 
검게 빛을 내며 피곤한 듯한 하얀 얼굴과 매우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둥글고 윤기 나는 입술이나 살집이 좋은 코 그리고 검게 빛나는 눈동자와 그 위에 초승달처럼 그러진 
어둡고 가늘게 보이는 눈썹은 그녀가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잠작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어머..., 손님?" 그녀는 몇 걸음 우리들 쪽으로 다가오며 이렇게 묻다가 목소리의 뒤끝이 흐려졌다.
"손님 중에서도 정말 기쁜 손님이네요."

그제야 파울로의 친구임을 확인한 듯 그녀는 이렇게 덧붙이고 나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파울로는 그녀에게로 걸어가더니 다시 없는 기쁨으로 몸을 맡길 때처럼 
느릿느릿 한 동작으로 그녀가 내민 손 위에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실례입니다만 제 친구를 소개합니다. 제 초등학교 친구입니다."

그녀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보드라운 손을 내게 내밀었다.

"잘 오셨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촉촉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부모님도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예요. 부모님께는 이미 연락을 주신 모양인데....,"

그녀는 터키식 긴 의자에 앉았고 우리는 그녀와 마주 보고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옆방 문이 열리고 그녀의 부모가 들어왔다.
그들은 나를 기분 좋은 태도로 맞아 주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고 난 후, 화제는 전람회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그 전람회에 파울로는 모델을 써서 그린 여인의 그림을 출품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더군요!"  남작이 말했다.
"나는 얼마 전에 반 시간이나 그 그림 앞에 서 있었소이다.
  빨간 융단 위에 살색의 조화는 특히 효과가 있더군요. 정말 감탄 했소이다. 호프만 씨!"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파울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과로하진 마시오. 
  당신에게는 몸을 소중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오. 그래 건강은 어떤가요?"

파울로가 집주인에게 자신의 건강에 대해 필요한 설명을 하고 있는 사이
나는 남작의 딸과 낮은 소리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 집 대문 앞에서부터 느껴지던 이상하게 긴장된 평정이 파울로에게서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뭐라고 딱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는 마치 어떤 물체에 덤벼들려고 몸을 가누고 있는 표범 같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까만 두 눈만 반짝일 뿐 누렇고 바짝 마른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던 그가 
남작의 물음에 자신에 찬 말투로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그 눈빛이 거의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건강은 아주 좋은 편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몸 상태는 매우 좋습니다."

우리가 1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일어서자, 
남작 부인은 파울로에게 목요일에 늘 열리는 다섯 시의 티파티를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 날 꼭 와 달라고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매우 기분 좋은 사람들이더군"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게다가 그 열아홉 살 처녀에겐 완전히 반했어"
"반했다고?"  그는 짤막하게 웃고는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왜 웃는가. 그런데 그곳에서 남모를 동경이 자네의 눈을 흐리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도무지 나로선 알 수가 없군. 자네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화내지는 말게. 내가 보기에는 남작의 따님인 아다도 어쩐지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는 다시금 말없이 앞쪽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낮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나는 행복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의문이 솟았지만 그것을 억누르고 그와 악수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나는 루드비히 거리에서 슈타인 남작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말을 타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는 멈춰 서서 손을 내밀었다.

"여어, 마침 잘 만났소. 어때요. 내일 오후 우리 집으로 오시지 않겠소?"
"괜찮으시다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호프만이 여느 목요일처럼 저를 찾아올지 분명치는 않지만....,"
"호프만? 모르시는 모양인데 호프만은 여행을 떠났어요.
  나는 당신에게 그것을 알렸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요, 전혀 몰랐습니다.
"저런, 어쩌면 그것이 소위 예술가 기질이라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럼 내일 오후에....,"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놀라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남겨두고 말을 몰아 사라졌다.
나는 급히 파울로 집으로 가 보았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비상연락처도 남겨두지 않았다.
남작은 분명 예술가 기질 이상의 뭔가를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사실을 아다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남작 가족과 함께 이 시르 계곡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우리 일행은 즐거운 나들이를 끝내고 오후 늦게야 귀가 길에 올랐다.
그 때 남작의 딸과 나는 뒤쪽에서 천천히 따라왔다.

파울로가 모습을 감춘 뒤에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했으며 그녀의 부모는 파울로의 갑작스러운 여행을 안타까워하는 듯했으나 
그녀는 그 때까지 파울로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뮌헨 근교의 아름다운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아다가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파울로에 대한 말을 꺼냈다.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그 분하고 친구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 분의 비밀을 아시나요?"
"저는 그 친구의 깊은 비밀까지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당신을 믿어도 될까요?"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어요."

그녀는 결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고 내게 말했다.

"그분은 저에게 청혼을 하셨어요.
  그런데 부모님께서 거절하셨답니다.
  그 분의 건강이 나쁘다는 것이 이유였지요.
  하지만 저는 그 분을 사랑하고 있는 걸요. 저....,"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 분이 어디 묵고 있는지 몰라요. 
  혹시 그 분을 만나거든 그 분께 제 말을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면 그 분에게 편지라도 보내주세요. 
  저는 절대로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요. 
  멀지 않아 그 분도 그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 마지막 외침에는 확신에 찬 결의와 함께 안타까운 고통이 남겨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말없이 꼭 쥐었다.

나는 호프만의 부모님께 부디 아드님의 주소를 알려 달라는 편지를 보내 남부 티롤의 주소를 알게 되었다.
나는 즉시 그곳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는 "수취인은 여행의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이미 그 고장을 떠났음'이라는 쪽지가 붙어 되돌아 왔다. 
그는 어디선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기 위해 숨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병약한 그 친구는 활화산 같은 관능적인 열정과 
소년 시절에 처음으로 경험했던 흥분에 비길 만한 열정으로 아다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열정을 따라 주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생명력을 서둘러 파먹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렸다.
그 사이에 나는 그가 살아 있다는 연락을 한 번도 받지 못했고 또한 그가 죽었다는 연락도 접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로마 근교에 묵고 있던 나는 
카페에 앉아 홍차를 마시면서 신문을 보다가 갑자기 나와 비슷한 나이의 한 신시가 
천천히 테이블 사이를 지나 바깥쪽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걸음걸이는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신사 역시 나에게로 얼굴을 돌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썹을 추켜세우고 놀라움과 기쁨에 넘치는 환성을 질렸다.

"아아! 자내를 이런 데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 아직도 살아 있었구먼."

5년이 지났건만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이 전보다 조금 더 길어지고 눈이 더욱더 움푹 들어가 보일 뿐이었다.
그는 이따금 한숨을 내쉬었다.

"진작부터 로마에 와 있었나?"
"시내에 머문 시간은 많지 않았네. 2, 3개월 동안 시골에 가 있었지, 자네는?"
"나는 일주일 전까지 바다에 가 있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니까.
  나는 자네와 헤어진 뒤 제법 여러 고장을 돌아다녔다네."

그는 커피를 마시며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밤 아다가 내게 한 말을 되풀이해서 들려주었다.
그는 천천히 이마를 만지면서 귀를 기울이더니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고맙네."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흘러갔으니....,
  그녀와 자네가 보낸 5년의 세월이 여러 가지 감정이나 생각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나는 말을 끊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리를 고쳐앉더니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가슴에 묻어 두겠네!"

그의 목소리에는 내가 방금 전까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열정이 다시금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처음으로 남작의 딸을 소개받았을 때 그에게서 나타났던 모습이 
또 다기 그의 얼굴이나 태도의 구석구석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먹이를 앞에 둔 맹수가 
덤벼들기 직전에 드러내는 것 같은 힘차면서도 경련이 일 듯한 김장감과 평정이었다.

나는 화제를 돌려 그의 여행담이며 습작에 대해 말을 나누었지만,
그런 것은 그리 대수롭지 앉은 모양이었다.
그는 약간 냉담하게 내 말에 대꾸했던 것이다.

우리는 거의 한밤중이 되어서야 일어섰다.
그 뒤, 우리는 한 달 동안이나 그 거리를 함께 돌아다녔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맑게 갠 늦여름의 아침에 뷔아 아피아로 산책을 떠났다.
그곳에서는 부드러운 안개에 싸인 아르바네르 산의 황홀한 경치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파울로는 몸을 반쯤 눕히고 손으로 빰을 괸 체 나른한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기분 좋은 공기! 이 부드러운 공기를 느껴봐."

그는 다시금 조용해지더니 나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 자네는 이상하지 않나!"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먼 곳으로 시선을 보내더니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나 역시 매일 그것이 이상하게 생각된다네.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떤 프랑스인 의사는 나에게 
  '자네가 아직도 여러 곳을 여행하고 있다니 기이한 일이로군.
   자네에게 충고하지만 어서 집으로 돌아가 자리에 누워 있게나'라고 말하더군.
  그 의사는 나를 만날 때마다 번번이 그런 말을 했지. 
  그런데도 나는 아직 살아 있어. 
  어쩌면 나는 거의 매일같이 관 속에 발을 내딛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밤이 되면 나는 어둠 속에서 항상 오른쪽으로 눕는다네.
  간혹 심장의 고동이 목덜미까지 올라오곤 하지.
  현기증이 일고 진땀이 닐 때도 있네.
  그러면 갑자기 죽음이 나를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잠시 내 몸 안의 모든 것이 정지한 것 처럼 심장의 고동이 멈추고 숨이 막히는 거야.
  나는 후닥닥 일어나 불을 켜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들러보고는 
  그곳에 있는 것을 눈으로 끌어당기듯 응시하지. 
  그러고는 물을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모로 눕네.
  언제나 오른쪽으로 말이야.
  그리고 천천히 잠이 든다네.
  나는 매우 깊이 아주 오랫동안 잠자는 거야.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언제나 죽을 만큼 지쳐 있으니까.
  나는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서 간단히 누워 죽을 수도 있다네.
  정말이야.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이미 몇 번이나 죽음과 만났는지 모른다네.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있는 것은 뭔가가 나를 붙잡아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 나는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뭔가를 생각한다네.
  어떤 경우에는  스무 번이나 그 짓을 되풀이하면서 한 가지 일에 끈질기게 집착하지.
  그 사이에 내 눈은 주위에 있는 모든 빛이나 생명을 마구 빨아 당기는 거야.
  자네는 이러한 내 심정을 짐작할 수나 있겠나?"

​그는 꼼짝도 않고 누워 거의 내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때 내가 그에게 어떤 대꾸를 했는지 이미 기억도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이 나에게 준 인상은 언제까지나 잊히지 않을 것이다. 


초가을 어느 날이었다.
무더운 날씨가 축축한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그날 아침,
나는 산책을 함께 하려고 파올로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그의 방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벽장이나 장롱은 모두 열려 있었다. 
다만 그리스나 터키 지방을 스케치한 수채화와 바티칸에 있는 주피터 머리의 석고상만은 아직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파울로는 창가에 우뚝 서서 꼼짝 않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렇게 병든 얼굴을 하고 편지를 하나 건넸다.

“읽어 보게!"

그 태도가 너무도 진지했으므로 나는 서둘러 편지를 읽었다.
 


존경하는 호프만 씨
제 부탁으로 당신의 부모님이 친절하게도 당신의 주소를 알려주셨습니다.
제가 주소를 문의한 것을 부디 기뿐 마음으로 받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난 5년 동안 변함없는 우정으로 당신을 생각해 왔습니다.
당신과 저를 고통스럽게 했던 날에 당신이 갑자기 여행을 떠나신 것이 
저나 저희 가족에 대한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제 슬픔은 당신이 제 딸에게 구혼을 하셨을 때 제가 느낀 깊은 놀라움보다 강한 것입니다.

또한 그 때는 제가 한 남자로서 남자인 당신에게 말씀드린 것이며,
제가 모든 점에서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는 분이기에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어째서 딸에 대한 구혼을 거절했는가 하는 이유를 기탄없이 진지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제가 그 때 가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말씀드렸던 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딸이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향복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떄 서로의 마음에 싹튼 소망을 이루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소망을 무참히 짓밟는 짓은 안 했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호프만 씨
오늘은 그 일에 대해 친구로서 또한 딸아이의 예비로서 말씀드립니다.

당신이 여행을 떠난 지 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딸에게 쏟은 애정이 딸의 마음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었는지 
저는 지금까지 충분히 알지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그 일에 대해 눈뜨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제 딸은 당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까닭에, 
제가 아버지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권한 사람과의 혼담을 딱 잘라 물리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비밀로 하겠습니까?

딸의 감정이나 소망에 대해서는 세월조차 힘을 미치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물어 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정이 예전과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부모로서 절대로 딸의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떤 내용의 회답이든 저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드리겠습니다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남작 오스카 폰 슈타인



그는 두 손을 뒤로 돌린 채 창 쪽으로 돌아섰고 나는 이렇게 물었다.

"떠날 작정인가?"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내일 아침까지는 짐을 치워버려야 하네.”

그리하여 그날은 용달차를 불러 짐을 꾸리는 일로 하루해가 가고 말았다. 
나는 그가 짐을 꾸리는 일을 거들었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마지막으로 함께 산책을 하기로 했다.
저녁때라고는 하지만 아직 날씨는 무더웠고 하늘은 쉴 새 없이 번쩍이는 인광 속에서 떨고 있었다.

말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파울로는 몹시 지쳐 보였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거나 아니면 두서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한 시간쯤 돌아다닌 후에 
어느 덧 분수 앞에 멈춰 섰다.
그것은 질주하는 바다의 신을 나타낸 유명한 분수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 기막히도록 힘찬 군상을 쳐다보았는데,
그 주의를 빛나는 파란 빛이 끊임없이 움직였던 까닭에 어쩐지 마법의 나라에 온 듯한 인상을 주었다.
파울로가 말했다. 

“베르니니는 물론이고 그 제자들의 작품까지도 나를 황홀하게 만들어.
  나는 그를 비난하는 놈들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최후의 심판이 그림보다 조각에 가깝다고 한다면 
  베르니니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보아 조각보다는 그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이보다 더 위대한 조각가가 있을까?" 
“이 분수에 어떠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지 자넨 알고 있나?
  로마와 헤어질 때 여기서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있어.
  자, 여기에 내 여행용 컵이 있네.”

나는 물을 한 컵 떠서 그에게 내밀었다. 

“자네는 자네의 로마와 또 다시 만나게 될 걸세!"

그는 컵을 들어 입술에 댔다. 
그 순간, 하늘이 온통 오랫동안 꺼지지 않을 듯한 섬광으로 빛났고 
얇은 컵은 요란한 소리를 내여 분수대 모서리에 부딪치더니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파올로는 손수건을 꺼내 옷에 튀긴 물을 닦았다.

“나는 아무래도 신경질적이고 서틀러.
  자, 저쪽으로 가세. 그 컵은 그다지 비싼 것을 아니지?"

이튿날 하늘은 아주 맑았고 우리가 정류장으로 나갔을 때에는 
파란 하늘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별의 순간은 아주 짧았다. 
파울로는 말없이 나의 손을 쥐었고 나는 그의 끝없는 행복을 빌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고 서 있었는데,
넓은 창가에 우뚝 서 있던 그의 눈에는 깊고 진지한 승리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는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날에 죽고 말았다.
아니, 결혼식 날 밤 사이에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행복을 향한 의지를 품고 오랫동안 죽음과 맞서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행복에 대한 의지가 채워졌을 때 그는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는 투쟁도 반항도 없이 죽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그 이상 살아갈 이유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들을 연결시켜 준 것이 
혹시 그녀를 불행에 빠뜨리게 한 것은 아닐까 하고 나 자신에게 수 없이 물어 보았다. 
하지만 나는 파울로의 장례식에서 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서 내가 전에 파울로에게서 느꼈던 것과 똑 같은 표정을 보았다.
엄숙하도록 강한 승리의 진지함이 그 표정에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p38)



※ 이 글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단편소설-2>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토마스 만 외 -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단편소설. 2
번역 - 최은선 - 
일송미디어 - 2004. 08. 05.

[t-24.01.25.  20240106-1629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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