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천 - 지게와 작대기」
[210204-165426]
나는 지게입니다.
두 팔이 뒤쪽을 향해 쭉 뻗고, 두 다리가 미끈하게 튼튼한 멋스런 지게입니다.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멋진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기억도 아스라하지만, 내 고향은 푸른 숲속이었습니다.
언제나 산꽃들이 만발하고, 새 소리가 영롱하게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숲속입니다.
나는 언제나 그 숲속을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낯모르는 사람이 숲속에 나타났습니다.
날이 시퍼런 낫과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톱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그전에도 저런 사람을 본 적이 있기에 우리들의 놀라움은 하늘을 꿰뚫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땅속에 뿌리박고 있는 우리들은 놀라움 속에서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어떤 방법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처분을 기다릴 밖에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친구들을 살피던 괴한은 마침내 내 앞에 이르렀습니다.
내 팔과 내 다리와 몸통을 더듬던 그는 혼잣말처럼 지껄입니다.
“흠, 고놈 참 잘도 생겼다. 지게 감으로는 특급이구만!”
사실 나는 숲속의 친구들 중에서 손에 꼽힐 만큼 멋지고 잘 생긴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나는 지게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곁의 친구들과 재깔거리며 놀기에 여념이 없는 한 그루 나무였습니다.
예쁜 산유화와 소꿉놀이를 하고,
새들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을 벗하는 한 그루 나무일뿐이었습니다.
내 밑동에 톱을 들이댄 그에 의해 나는 고통스러운 고함과 함께 쓰러졌습니다.
투명하게 맑은 피를 있는 대로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보통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고함이요, 보이지 않는 피였습니다.
다만 곁의 친구들만이 아우성치며 함께 아파할 따름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내 친구들과 고향을 이별했습니다.
그의 집으로 옮겨져 온 나는 끌로 파지고,
대패로 다듬어지는 과정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이렇게 멋스런 지게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살을 에어내고 뼈를 깎아내는 고통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할 정도로 그 모든 어려움을 잘 견뎠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탄생에는 언제나 이런 고통과 인내가 따른다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답니다.
그런 이후, 나를 괴롭혔던 괴한은 나에게 가장 고마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내가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했을 뿐,
내가 숲속에서 그를 만날 때부터 이미 그분은 나의 주인이셨던 거였지요.
그분이야말로 나를 만들어 낸 창조주이시니까요.
그러나 내가 지게로 탄생은 되었지만, 나는 아직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나는 결코 홀로 설 수가 없었던 까닭이지요.
나에겐 평생을 함께 할 반려가 필요했으니, 그가 바로 작대기입니다.
하지만 그 일도 염려할 일이 못되었습니다.
주인님은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인님의 주선으로 가장 아름답고 단단하고 올곧은 작대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눈에도 나의 짝꿍인 작대기가 그렇게 보이는지, 나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나의 작대기야말로 내 평생을 통틀어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소중한 존재가 또 있군요.
바로 내 작대기를 만나게 해 준 주인님이십니다.
나는 주인님의 소개로 만난 작대기를 무척 반겼습니다.
내가 반기는 것 이상으로 작대기도 나를 반깁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린 서로를 의지합니다.
나에게 아무리 무거운 짐이 실린다 해도,
나는 짝꿍인 작대기만 있으면, 전혀 문제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게로 태어났기에 짐을 싣는 일은 나의 숙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엔 두 팔과 두 다리로 무거운 짐을 지탱하기가 너무도 힘든 나머지,
주인님을 원망하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인 이후, 짐을 지는 일이 나의 즐거움으로 탈바꿈 된지 오래입니다.
내가 짐을 실었을 때는 나의 짝꿍 작대기가 나를 떠받혀 주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우스꽝스러운 말일지 모르지만,
내가 무거운 짐을 싣고 끙끙거릴 때,
나를 떠받히고 나와 함께 낑낑거리는 작대기가, 나는 그렇게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답니다.
그러기에 나는 짐 싣는 일을 언제나 즐깁니다.
그러기에 나는 짐을 실어 주는 주인님이 항상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실은 짐이 참으로 수없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도 가장 소중한 짐은 역시 가정이라는 짐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무겁고도 소중한 짐을 그냥 싣고만 있을 뿐, 그 짐을 나르는 일은 역시 주인님께서 하십니다.
주인님은 짐이 실린 나를 등에 지고,
두 손엔 내 짝꿍인 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짚으시면서, 가정이란 나의 소중한 짐을 운반하십니다.
나도 땀을 뻘뻘 흘리지만, 땀을 흘리는 건 주인님도 그리고 작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둘 모두가 안타깝습니다만, 그 중에도 특히 안타까운 건, 역시 작대기입니다.
주인님이야 원래부터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힘의 소유자이시기에, 크게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가냘프고 길쭉하게 아름답기만 한 작대기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낑낑거리는 모습을 주인님의 등에 메인 채로 바라보노라면,
차라리 내가 작대기의 일까지 하고 싶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이 주인님께서 맡겨 주신 나의 숙명인 줄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나를 등에 지고 작대기를 짚고 걸어가는 길은 끝이 없습니다.
또 방향이나 목적지도 나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나는 주인님을 철석같이 믿기에 오로지 두 팔로 맡겨진 짐을 보듬어 챙길 뿐,
나머지의 모든 것은 오로지 주인님께 맡길 따름입니다.
때로는 강 물결이 남실거리는 강둑길을 걷습니다.
그럴 때면 강바람이 시원합니다.
강가 버들가지 사이에서 우짖는 꾀꼬리 소리가 귀엽습니다.
푸른 하늘에서 노래하는 노고지리의 노래가 상쾌합니다.
그 길은 가장 아름답고 시원한 길, 그러기에 주인님이 고맙습니다.
때로는 험한 고개도 만납니다.
땀 흘리는 주인님과 작대기가 안타깝습니다.
나의 땀 흘림은 물론 제 관심 밖의 일입니다.
때로는 사막 길도 걷습니다.
모래바람이 일고, 황사가 날려 숨쉬기도 어렵습니다.
그럴 땐 그런 길을 걸으시는 주인님이 한없이 밉기도 하지만,
나에겐 가정이란 소중한 짐이 실려 있기에,
그리고 주인님을 향한 믿음이 철석같기에 나는 주인님을 결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동안 세월은 무심히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어느 날, 탈탈거리는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경운기입니다.
다시 얼마 후, 왕왕거리는 더 큰 괴물도 나타났습니다.
트랙터입니다.
그러나 종종 힘이 부치고 숨이 턱에 닿지만, 우리는 우리의 짐을 그들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그저 작대기와 더욱 의지하면서, 오늘도 오로지 우리만의 길을 갑니다.
함께 땀 흘리고 함께 끙끙 낑낑거린 지난 세월 동안, 우리의 모습도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그토록 튼튼하고 멋지던 나의 팔도, 다리도 그리고 발가락도 많이 닳았습니다.
작대기도 이젠 끝이 무딜 대로 무디어져 제 몫을 감당하기에 더욱 힘겨워 합니다.
작대기의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작대기 몰래 둘째손가락으로 눈가를 누르기도 참 여러 번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비록 작대기와 함께 하는 우리의 일이 이때까지보다 더욱 힘들어질지라도,
주인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노라면,
멀지 않은 어느 곳엔가 어린 시절의, 보랏빛 꿈을 닮은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들꽃 향기 가득한 아름다운 초원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굳게 믿는 까닭입니다.
거긴 꿀벌들이 잉잉거리며 꽃을 찾아 날고,
오색 빛깔 나비들이 나풀나풀 춤추며,
새하얀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 뜯는 곳이겠지요.
글 - 이 남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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