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 - 언제나 여행처럼 지금 이곳에서 오늘을 충만하게 사는 법」
“어제 도착해 오늘 머물고 내일 떠날 것처럼 살아라”
방랑과 방황은 무한에 대한 갈망.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바람은 자유롭다.
바람이 되어 자유롭게 우주와 하나가 되는 황홀한 경지를 맛보는 순간,
이제 방랑과 방황은 길 잃은 자의 풀 죽은 행위가 아니라, 생의 비의를 엿본 자의 당당한 노래가 된다.
삶이 아주 권태로울 때가 있었다. 오래전 직장에 다닐 때였다.
물론 일상의 삶은 무척 바빴다.
6시 반에 일어나 후닥닥 씻고 먹은 후 7시 20분쯤 좌석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내리면 8시 15분,
부지런히 걸어서 서소문에 있던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면 8시 25분.
부서를 찾아가 출근부에 사인을 하면 8시 30분 직전이었다.
근무는 8시 30분부터 시작했다.
부지런히 장부를 들치고 계산기를 두드려대고 결재를 받다 보면 어느새 12시.
점심시간이 왔다.
회사 식당으로 올라가 식기를 들고 긴 줄에 서서 밥을 기다렸다.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계단에 서서 잡담을 나누다 보면 금방 1시.
다시 일 시작.
정신없이 일을 했다.
정식 퇴근시간은 5시인가, 6시였지만 누가 그걸 지키나.
저녁 7시 쯤 되어 퇴근하거나 혹은 야근 저녁은 거의 매일 밖에서 사 먹었다.
일찍 들어와 저녁을 먹고 9시 뉴스를 보는 날이 드물었다.
처음에 입사해서는 이런 꽉 짜여진 생활도 할 만했다.
모든 게 새로웠고 배우느라 긴장했으며 사람 사귀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월급이 있었다.
그 당시 대기업 초봉은 남들과 비교할 때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1년쯤 지나자 지겹고 권태로워졌다.
몸과 마음에서 물기가 쪽 빠져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나보다 수십 년 전에 파리에서 살았던 알베르 카뮈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말했었다.
장치가 붕괴할 때가 있다. 기상, 전차,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의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부분의 경우 용이하게 계속된다.
다만 어느 날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며 모든 것은 놀라움에 채색된 권태 속에서 시작된다.
-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의 신화' 에서.
내가 직장을 그만둔 이유도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는 이렇게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나는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답은 많았다.
돈을 벌기 위해서잖아.
돈을 벌면 더 폼 나게 살 수 있잖아.
누구나 다 그렇게 살고 있잖아. 삶이란 원래 그런 거잖아.
그러나 이런 식의 대답은 한창 피 끓던 30대 초반의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건 내 삶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학창 시절부터 꿈꾸어오던 세계 여행을 열망했었다.
배낭을 메고 무궤도 無軌道 속에서 방랑하는 꿈, 그때 나에겐 그게 절실했었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배낭을 멨다. 그리고 마음껏 세상을 방랑했다.
그 방랑의 시절 동안 '이대로 죽어도 좋다'라는 희열 속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선택한 결정이야말로 내가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방랑도 긴 세월 속에서는 또 다른 궤도가 된 것이다.
낯선 곳에서 숙소를 찾고, 구경을 하고,
사람을 사귀고, 이런저런 사건을 겪다가 다시 떠나는 행위가 익숙하게 되풀이되면서
어느 날 또다시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이 들었다.
권태는 놀랍게도 방랑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탕자가 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일상과 방랑의 권태 속에서 생을 다 살아버린 것 같았고 삶의 의미도 상실되었다.
그 허무와 지겨움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내 삶의 에너지를 무절제하게 탕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탕자의 쾌락이 아니라 무한의 세계였다.
장 그르니에가 말한 것처럼
'방탕한 생활에 빠져버린 이의 관심을 끄는 곳은 댄스홀이나 쾌락의 거리가 아니라,
어둠이 내릴 무렵, 여인들의 옷깃과 나직한 유혹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는
‘어둠 속의 한갓진 골목길'' 같은 것이었다.
내가 원했던 것도 쾌락이 아니라 ‘어둠 속의 한갓진 골목길’ 같은 것이었다.
경계가 사라지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고 무한과 하나가 되는 그 해방감.
돌이켜보니 나는 여행길에서도 그런 순간을 탐닉했었다.
낯선 도시에 도착해 어둠이 깔린 골목길을 홀로 헤매며 숙소를 찾아가던 순간은
쓸쓸하기보다는 차라리 감미로웠다. 운명이 나를 이끌어줄 것만 같았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누군가 나타나 도와줄 것만 같았다.
또 한 번 돌아서면 멋진 여인이 나타나 손목을 잡으며 유혹할 것만 같았다.
아무 저항 없이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가리라 다짐하는 내 가슴은 설레었다.
그 설렘은 어디론가 정처 없이 가고 있을 때도 나타났다.
덜컹거리는 기차나 버스에 앉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순간,
생선 냄새를 맡으며 비 내리는 골목길을 걷던 시간에,
빛과 어둠이 뒤섞어 개와 늑대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어느 늦가을 오후에 나는 문득 무한을 느꼈다.
그때 국적도, 가족도, 이름도 포기한 채,
나의 존재를 'delete' 시키고 무아의 경지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겨울 시베리아 횡단 철길 옆으로 이어지던 달빛 젖은 하얀 자작나무들,
뉴질랜드 해안가를 따라 달리던 회색빛 하늘 밑의 철길,
가도 가도 끝나지 않던 아프리카의 끝없는 세렝게티 평원
혹은 커리 냄새 진하게 풍기던 뉴델리의 어느 시장 골목길에서 나는 익명의 세계로 사라지고 싶었다.
내가 사라지는 그 부재의 지점이 무한의 세계가 열리는 입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세계로 가지 못한 채 이 세상으로 돌아온 나는 늘 허전했다.
이 세상이 내 세상이 아닌 것 같아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곤 했다.
여행길에서 나는 경계선을 넘어간 이들을 종종 만났었다.
이집트 북서부 리비아 사막 한가운데 있는 시와 오아시스에서 보았던 독일인은
토담 길을 짓고 그곳에 1년째 살고 있다 했다.
그는 짐승 같았다.
감지 않은 금발은 사자의 갈기 같았고 흙 덮인 맨발은 늑대의 발 같았다.
그는 잠시 들렀다 떠나는 여행자들을 깔보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세상과 선을 긋고 살아가는 '방랑하는 독일인' 이었다.
자신의 조국을 떠난 후 그렇게 세상의 오지에 파묻혀 살고 있었다.
세상과 선을 그은 그의 등 뒤에는 고독감과 피로함이 서려 있었지만 나는 그가 부러웠다.
시와 오아시스에 접해 있는 거대한 리비아 사막의 모래 언덕에 누워 나는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혹은 낮은 언덕 위에 벌집처럼 구멍 뚫린 무덤가에 앉아 마라의 덮었던 헝겊 조각을 손에 들고
대추야자나무 숲을 붉게 물들이며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영생과 부활을 꿈꾸며 미라로 만들어졌던 이들,
모두 먼지가 되었다.
생이란 얼마나 가볍고, 넘어가는 붉은 해는 얼마나 무심한가.
세속의 일이 그리 아쉬울 까닭은 없다.
나도 여기서 저 독일인처럼 살아볼까?
사막을 오가며 평생을 침묵 속에 살다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릴까?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주인공,
증권 중개인 스트릭 랜드는 처자식을 버리고 갑자기 집을 나간 후,
파리의 뒷골목을 헤매다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숨었다.
그곳의 원주민들과 섞여 살며 그림을 그리다
자신의 그림들을 모두 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는 죽었다.
실제로 그 소설의 모델인 화가 고갱은 정말 자유로웠을까?
나는 증권 중개인은 아니었지만 돈을 만지던 직장에 있었다.
항공사에서 늘 비행기 티켓과 장부를 만지며 돈 계산을 했었다.
그곳을 탈출한 후 경계선에서 방황하는 나.
경계선 너머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 머뭇거리는 나의 속에 들끓는 열망과 불안함의 근원은 무엇인가?
정착하지도 않고 경계를 넘어가지도 못한 채,
한때 의식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고민하던 나는 이제야 내가 왜 이렇게 고민하고 방황했던가를 알았다.
방랑과 방황은 존 재 자체의 숙명인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페졸리에 의하면 방랑과 방황 욕구는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으며,
그것은 잃어버린 성배, 혹은 하늘에 있는 별을 찾아 떠도는 욕망의 표현이고
무한의 손길을 느끼고자 하는 열망이다.
‘존재 existence’라는 어원은 ‘ex-sistence’에서 왔다.
즉 존재란 ‘자아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열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존재는 불변하는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로, 혹은 더 큰 타자 즉 우주의 섭리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존재는 늘 자신의 울타리를 넘고 싶은 갈망에 시달리는 것이다.
맞다. 나는 늘 나를 벗어난 더 큰 타자의 세계를 열망했다.
여행은 단지 다른 나라의 문화를 보거나, 먹고 마시고 노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람 만나기의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것이 여행의 갈증을 다 채워주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
현실을 넘어서 하늘에 뜬 무지개를 좇는 아이처럼 자꾸자꾸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손에 잡힐 것 같은 황홀한 세계였다.
그런데 사회는, 특히 근대 사회는 개인의 그런 방랑 욕구를 억압한다.
우리는 이 사회에 살기 위해서 직업을 가져야 하고, 경력을 가져야 하고,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시민의 의무와 가족의 의무 속에서 존재는 고정되기를 강요받고 교육받고 훈련받는다.
또한 사회는 존재를 서열화시키고 규격화시키며 계량화한다.
자유로운 존재는 그 과정을 통해 이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으로서 존재한다.
거기에 익숙해진 존재는 이제 그 제도를 떠나는 순간 두려움에 떨게 된다.
또한 사회는 뛰쳐나가려는 방랑자들의 앞길에 과도한 불안감과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래서 울타리를 뛰어넘으려는 존재는 막막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의 타자에 대한 열망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늘 존재를 조여오는 이 사회에 저항하고 고민한다.
존재 자체의 운명인 방랑과 방황의 본성에 충실하려는 사람은 이 사회의 반역자가 되고 그의 운명은 고되다.
어느 제도, 어느 가치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자신의 별을 찾아 평생 떠도는 운명이 되는 거이다.
그리고 그 떠돎보다 더 힘든 것은 그 떠돎이 일상이 되어 권태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며,
그때 방랑자들은 마약과 섹스에 취해 무한에 녹아들거나,
무한의 세계로 올라가는 수행을 하거나, 세상을 피해 은둔하여 숨는다.
이때의 은둔은 정착이 아니라 방랑으로부터의 또 다른 이탈이 된다
나는 한때 방랑했고 방황했으며, 또 은둔도 해보았다.
그리고 늘 세상과 불화했으며 불안했다.
정착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불안과 불화의 상태에서 벗어난 초월의 경지,
안락한 상태를 열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정착도, 초월도, 안락함도 다 포기했다.
다만 방랑과 방황이 존재의 숙명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거기에서 오는 미래의 불안과 세상과의 불화를 피하지 않은 채 끝없이 길을 가기로 했다.
그 길은 육체의 떠돎을 넘어서 그 어떤 사회의 가치, 제도에 나를 안착시키지 않는 정신적인 길이었다.
그러자 묘하게도 활기찬 삶의 생기가 다시 찾아들었다.
그렇다. 삶의 생기와 힘은 어떤 고정된 하나의 위치,
하나의 상태, 하나의 경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에서 오는 것이었다.
출발에서 회귀로 회귀에서 새로운 출발로, 여행에서 정착으로 정착에서 여행으로
입학에서 졸업으로 졸업에서 입학으로, 만남에서 이별로 이별에서 새로운 만남으로,
진자의 추처럼 흔들리는 과정에서 생기와 힘은 솟구친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
무슨 계획을 갖는가.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떠나고, 돌아오고,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또 그걸 버리고 떠나는 가운데 생성하고, 소통하며, 새롭게 출발하는 '흔들림'이었다.
삶의 목적과 목표와 의미는 아무래도 좋았다.
필요하면 만들고, 불필요하면 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붙잡고 싶었던 것은 목적이나 의미가 아니라 흔들림에서 오는 강력한 '포스 force' 였다.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바람은 자유롭다.
바람이 되어 자유롭게 우주와 하나가 되는 황홀한 경지를 맛보는 순간,
이제 방랑과 방황은 길 잃은 자의 풀 죽은 행위가 아니라, 생의 비의를 엿본 자의 당당한 노래가 된다.
이지상 - 언제나 여행처럼 지금 이곳에서 오늘을 충만하게 사는 법
중앙북스 - 2010. 03. 30.
[t-24.04.22. 20240422-181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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