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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비문학(역사.사회.문학.

자유를 위한 변명 - 정글 속에서

by 탄천사랑 2024. 4. 7.

·「홍신자 - 자유를 위한 변명」




정글 속에서 / 지금의 삶에 대하여 
나에게 실은 어디에서 산다고 할 만한 정착 지점은 없다.
언제나 뉴욕으로, 서울로, 또 다른 곳으로 끊임없이 가고 또 떠나는 것이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딘가로부터 올 때 '돌아온다'라고 꼭 느끼는 곳은 있는데,
그것이 지금은 바로 이곳, 하와이 섬의 볼캐노 Volcano라는 곳에 있는 정글 속인 것이다.

아름드리 우람한 나무는 별로 없지만 
키들은 웬만큼 큰 귀여운 나무들이 수없이 밀 생애 있어서 사람이 지나다니기 힘들 정도다.
또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많은 양치류의 식물들이 가득히 나무와 나무 사이를 메우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촉촉하게 이슬을 머금고 있어 
그 사이로 지날 때면 언제나 기분 좋게 발이 흠뻑 적셔지고 만다.

내가 이곳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어이없는 일이 하나 벌어졌다.
어느 느지막한 오후, 나는 집 뒤쪽으로 산책을 나섰다.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샐비어 비슷한 빨간 꽃들과 풀 유업도 등의 
울긋불긋하고 앙증맞은 꽃들을 감상하느라 허리 숙여 한참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저 모양도 서민적인 한해살이 풀꽃들에 불과했는데,
그 생동생동한 색깔과 소박한 아름다움에 취해 몇 시간을 그러고 다닌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허리를 펴서 둘러보니 집이 보이지 않고 방향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막 어둑어둑해진 참인데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워낙 길이란 것도 없었고, 또 내가 풀숲을 조심조심 발로 헤쳐 온 터라 지나온 자국이 남지도 않았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자 문득 조바심이 일었다.
그래서 이쪽으로 황급히 몇 걸음 가 보면 내가 온 길이 전연 아니다.
또 방향을 바꾸어서 황망히 저쪽으로 가 본다.
나무들이 낯설기만 하다.
다시 방향을 바꾼다.
느릿느릿 한 걸음으로 왔었으니 
그다지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은 분명한데 도무지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점점 더 어두워져 바로 지척에 있는 것들의 모습만을 겨우 분간할 수 있었다.

한동안 마치 본능적으로 한 군데 가만 있지 못하는 짐승처럼 나는 한동안 부산하게 허둥댔다. 
그리고 누군가 들어 줄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와 달라고 외쳐 보기도 했다. 
물론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도대체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들어 소리를 내어 스스로 물어보았다. 

"무슨 바쁜 일이 있기라도 한가?"  나는 소리 내어 대답했다. 
"전혀."
"그럼 이 숲 속이 무서운가?"
"전혀."
"추운가?"
"추운가........" 생각해 보니 역간 서늘하긴 하다.

하와이라곤 하지만 
여긴 비교적 고지대에 속해 있어서 열대나 아열대가 아니라 온대라고 해야 할 만한 곳이고,
그래서 밤이 되면 꽤 어슬어슬해진다. 그래도 춥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질문을 더 해 보지 않아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윽고 나는 느긋해져서 한 나무 밑동 근처에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 퍼더버리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새들도 휴식을 취하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서 재재거리더니 지금은 사뭇 조용하다.
어딘가에서 조그맣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 우둔하게 생긴 새끼 도마뱀이겠지.

가만히 의식을 호홉에 모았다.
내가 여기서 살기로 한 것은 바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나를 방해할 것도, 나에게 환락에 대한 취미를 부추길 것도 하나 없는 이곳에서 마냥 지루해지기 위해서였다.
나 이외엔 만날 그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나를 만나고, 그래서 나를 뚜렷이 보고, 

도시 생활을 하는 동안 어느새 다시 웃자라 버린 나의 에고 ego를 정직하게 응시하자는 것이었다.
생각들이 일어난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생각들을 끊으려 애쓰지 않고 오히려 불러들인다.
그러고는 지켜본다.
끈질기게 들어와서 나를 지배해 온 것은 언제나 '나는 누구누구'라는 생각들이었다.
그것은, 나는 우월하고 고매한 존재라고 하는 최초의 그릇된 전제에서 출발한 그릇된 관념의 덩어리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나와 남들이 지어낸 위선의 말들이다.
나는 생각들이 구름처럼 피어나고, 
피어나선 뭉치고 또 흩어지는 그 속에서 에고의 무수한 장난질을 정확히 목격한다.

나는 세계적인 무용가 홍신자다.
나는 죽어선 안 될 만큼 소중한 존재다.
나는 누구에게도 지탄을 받아선 안 될 만큼 고귀한 존재다.
나의 모든 행위 속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 결국은 터무니없는 망상일 뿐인 
이러한 생각들이 어느새 나의 무의식 속에 다시 진실인 양 살아나 있다.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을 믿는 이중적인 내가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터무니없는 생각들이 하나도 내 의식의 표면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갖가지 교묘한 관념들이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감추기 위해 정교하게 얽어져 있어서
나 자신도 알아차리기 힘든 것이다.

나는 그러나 명상을 통해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그런 생각들을 끄집어낸다. 바로 나의 에고다.
이제  그것을 격파하는 것은 쉽다.
결국은 위선이라고도 이름할 수 있는 나의 이중성을 
단지 '보기만 했을'뿐 인데도 나는 벌써 비참한 기분이 되어 있고,
이 비참함은 바로 나의 에고가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에고의 뿌리를 잡아 흔들어 버린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 느낄 비참함이 지독할 것이라는 공포를 갖고 있다.
물론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공포를 일으킨다.
그러나 그 공포는 단지 그 순간 직전까지의 일일 뿐이다.
그 순간 이후에는 그것은 공포도 그 아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유의 희열을 안겨준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투명한 인식이 찾아오고 그래서 나는 잃을 것도 상할 것도 
부서질 것도 하나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의 희열이 나의 의식과 온몸을 감싸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나의 에고가 또 한 번 죽는 것이다.
언젠가 에고는 또다시 살아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그것을 죽일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얼마의 시간이 흘렸는지 알 수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크나큰 희열 속에서 나는 눈을 서서히 떴다.
나는 습기가 촉촉이 밴 나무 밑돈에 앉아 있었고 사방은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웬일인지 오늘은 달빛도 없다.
내가 길을 잃었었지...

아까까지는 몰랐던 사실인데 지금 보니, 바로 내 눈앞으로 멀지 않은 듯한 곳에 
컴컴한 나무와 나무 사이로 불빛이 하나 빤득히 빛나고 있었다.
나의 집인가?
내가 깜빡 잊고 낮 동안에 불 하나를 켜두었던 모양이다.
길을 잃었다는 불안감이 내 눈을 가리는 바람에 나는 그것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있는 곳과 집 사이의 거리가 궁급하여 그 불빛을 등대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헤아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집은 서른 걸음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 집을 두고서 살려달라고 고함까지 치다니...... 어이가 없어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바로 집 뒤뜰에서 길을 잃다니......, 그러니 정글이랄 수밖에'


내가 지금 비록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리고 어떤 땐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그것은 내가 적어도 이만큼은 자유롭고 지금까지 자유를 절실히 추구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은 환상을 깨트리기 위한 에고와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의 순간들에 있었던 이야기를 달리 들어 줄 사람이 없는 지금,
나는 종이 위에다 대화를 시작하기로 했다.
신변 잡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만 
거기에는 삶의 조건들로부터 자유롭고 자 싸웠던 나의 흉터들이 남을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나는 이곳을 떠나 또 세상으로 나간다.
나는 벌써 나를 불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이들에게 자진해서 전화를 해 두었다.
세상에서의 일들이 이미 시동이 걸렀고 조직되기 시작했다.

정글, 이 정글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살기로 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당장은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지 조차 알지 못한다.
다시 돌아온다면...., 이곳은 나의 마지막 기항지가 될까? 역시 아직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나의 마지막 기항지는 저 빙설로 뒤덮인 알래스카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어머니의 향기가 묻힌 나의 고향 한국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일은 아무 것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저쪽 방에서. 아니 숲 속에선가?



※ 이 글은 <자유를 위한 변명>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홍신자 - 자유를 위한 변명
정신세계사 - 1993. 02. 01.

[t-24.04.07.  20230427-1506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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