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연 -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물론 유행어나 신조어를 쓰는 것과 유행어나 신조어에 대해 쓰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은 작가들을 위한 책도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런 말들을 즐겨 쓰는 사람들,
즐겨 쓰지 않는 사람들,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과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약간 과장하자면, 한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책을 썼다.
3장 - 불확실한 세상에 대처하는 확실한 방법 - 손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선 살 수 없다는 뜻이다.
뻔하고 식상한 이 말을 영국의 시인 존 던은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이다.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진다.
모래 벌이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다.
그대와 그대 친구들이 땅이 쓸려 내려가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서 울린다.
우선 던의 기도문에서 울리는 종이 '교회의 종'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마을 사람이 죽으면 교회의 종을 간격을 두고 천천히 울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던이 전하고자 한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하나, 우리는 모두 죽는다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서 울린다).
둘, 어떤 죽음도 나와 상관없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따라서 사람을 보내 누가 죽었는지 알아보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나가서 그 사람의 죽음을,
우리 모두의 상실을 애도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어서 누군가를 만난다.
또 누군가를 만나기 때문에 결국엔 헤어지고 만다.
만남도 헤어짐도 모두 피할 수 없다.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과 더는 만날 수 없다거나 이제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별은 '나'라는 대륙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 그리하여 헤어지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살면서 가까워지고 멀어진 사람들의 흔적으로 점철된 존재다.
사람들은 오고, 또 사람들은 간다. 밀물과 썰물처럼.
자아의 모양을 사진으로 찍는다면 우리에게는 모두 리아스식 해안과 같은 복잡한 경계가 있을 테다.
존버와 손절은 얼핏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불확실한 세상에 대처하기 위한 삶의 태도다.
같은 상황에서 존버냐 손절이냐는 순전히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늘 존버를 택하고, 어떤 사람은 늘 손절을 택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성격에 따라 어느 한쪽을 다른 한쪽보다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나는 문득 이렇게 말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존버족과 손절족.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세상에서 '존버족'은 우직하게 믿고 기다리길 택한 사람들이다.
때때로 그들의 믿음은 보상받기도 하지만, 맹목적인 믿음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손해로 돌아오기도 한다.
또 그들은 진중한 듯 보이지만, 어쩌면 그저 우유부단한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손절족'은 재빠르게 판단하고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이다.
대체로 그들의 선택은 커다란 손해를 막는 것 같지만,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한 작은 손해들이 쌓여 큰 손해가 될 위험이 언제나 존재한다.
또 그들은 합리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야박한 것일 뿐인 지도 모른다.
결론은 이렇다.
어떻게 살아도 우리는 손해를 면치 못하니 인생은 곧 손해다. 어쩌면 좋지….
내 생각에 손절이라는 말은 과장된 태도의 산물이다.
세상을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과 이익이 되는 일로 나눠서 생각하는 이분법적인 시각의 반영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주식시장이 아니며, 인생 역시 투자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 이 세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일에 어느 정도는 연루된 셈이다.
그러니 무 자르듯 깨끗하게 잘라 낸 다음 아무 일 없다는 듯 내 갈 길을 갈 수는 없다.
누군가를 잘라 내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잘라 내는 일과 같다.
우리는 인류 속에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지금 모든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잘라내야 하는 관계들이 있다.
하지만 관계를 나에게 손해가 되는 관계와 이익이 되는 관계로 나누고,
손해가 되는 관계를 계속 잘라내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갈 순 없다.
그러다가는 세상도 나도 더는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손절이란 단어가 싫다.
이유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내가 어느덧 꼰대가 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실은 존버족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얼마 전에 20년 동안 가깝게 지낸 후배에게 영문도 모른 채 손절을 당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하지만 무엇보다 슬프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이별은 슬프다.
어떤 이별을 손절이라고 바꿔 부르는 세태는 더 슬프다. (p132)
※ 이 글은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금정연/북트리거/2022. 04. 15.
[t-24.05.30. 20240504-161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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