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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비문학(역사.사회.문학.

베이비 박스

by 탄천사랑 2024. 3. 19.


·「아동 문학 평론 - 2018. 여름, 통권 167호」

 

 

 

서평.

출산, 그 후.

1. 살해되거나 버려지거나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는 꿈과 환상의 나라 디즈니랜드 건너편에 있는 
싸구려 모텔을 배경으로, 거기에 살고 있는 홈리스 사람들을 다른 영화다.
잘 사는 미국의 초라한 민낯을 을 보여주는데 주인공은 미혼모 핼리다.
스물두 살인 핼리에겐 여섯 살 난 딸이 있다.
스트립 댄서로 일하다 해고된 그녀는 관광객들에게 향수를 팔거나,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치며 근근이 연명한다.
아이는 비슷한 애들과 어울리며 하루 종일 거리를 떠돈다.
식사는 피자나 소다수 등 패스트푸드가 전부다.
그런데도 핼리는 딸을 다른 데로 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해서는 안 될 행동까지 하게 되고, 당국에 의해 딸을 입양 보내야 할 지경에 이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차라리 좋은 부모에게 보내는 것이 아이에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고생만 시키고 제대로 된 교육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도 엄마라고 
떨어지지 않으려 울부짖는 아이를 보면서도 고작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직접 아이를 키울 수 있게 지원하거나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내 양육비를 강제로 부과하는 방법도 있는데 말이다.

익명 게시판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등학생 중 열의 두세 명은 성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그렇다.
이런 상황인데도 주변에서 미혼모를 쉽게 볼 수 없는 이유는 뻔하다.
모두 다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을 뿐이다.

버려진 아이들은 아동보호시설로 가서 18세까지 살거나 입양된다.
미혼모 대부분은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의 부정적 시각 때문에 아이를 포기하고 해외 입양을 결정한다고 한다.
혈통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입양이 힘들기도 하고,
대체로 성공한 입양인만을 보도하는 매체 탓에 외국으로 입양시키면 좋은 가정에서 잘 자랄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외 입양은 신중해야 한다.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의 주인공 신유숙 씨는 '아이를 보내지 마세요'라는 기고문에서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은 외모 때문에 일상적인 고통을 겪는다."라며
"스웨덴으로 입양된 아이들의 실업률은 50%이고, 자살률은 스웨덴 평균의 5배가 넘는다"라고 말한다.

벨기에로 입양된 전정식의 자전적 만화 
<피부 색깔=꿀색>에서도 마약에 중독되고 자살하는 입양아가 많다는 얘기가 나온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은 물론이고 성적+육체적 학대를 받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2004년 이전에 미국으로 입양된 사람 중 1만 8천여 명이 양부모의 과실이나 의무 해태로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채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으로 추방돼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은 상장하면서 자신을 버린 한국이 못 사는 나라도 아니고 
  경제 선진국이란 사실 때문에 더 상처를 받습니다.
  미혼모를 죄악시하고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나중에 생모를 찾았는데 
  안 만나주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차라리 국내 입양이 됐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을 겁니다"  전정식 씨의 인터뷰 내용이다.


2. 또다시 버려졌습니다만 
'베이비 박스'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 책은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아이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가슴이 찢어지게 아리거나 눈물을 펑펑 쏟아낼 정도로 감동적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주인공은 두 번의 유기라는 재앙 앞에서 
자신의 불행을 목 놓아 호소하지 않고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삶을 헤쳐 나간다.
기존의 입양아 서사가 친모 찾기나 자아 찾기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 책은 거기에 두 엄마와의 화해라는 미션이 추가돼 있다.
엄마들과의 화해가 과장되거나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어
그 울림이 은은하면서 오래 간다.

미국으로 입양된 리사 밀러는 엄마를 찾으러 한국에 왔다.
다른 사람들이 뿌리를 찾기 위해 왔다면 그녀가 한국에 온 동기는 약간 다르다.
미국에서 또다시 버림받았다는 것을 친엄마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라나?
외로워서 슬퍼도 울지 않고 착하기만 한 평면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저질하고 속 좁고 착하지만은 않은 평범한 우리와 닮았다.

'자기를 버린 엄마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도, 엄마를 그리워하지도' 않으며 
잘 지내던 그녀의 삶에 균열이 생긴 것은 11학년 때였다.

리사는 양아버지의 유별난 사랑 아래 철저한 미국인으로 살았다.
외모 때문에 놀림을 받았지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빠의 넉넉한 품 덕분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사고로 급작스럽게 죽고 만다.
그러자 사사건건 리사를 싫어하고 미워했던 양 엄마는 그녀를 내쫓아버린다.
열여덟,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이다.
아빠라는 보호막이 걷히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두 번이나 가족에게 버림받은 초라한 존재라는 실체가 확연히 드러난다.
리사는 자신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녀가 한국에 오게 된 배경이다.

리사는 어학 연수차 미국에 왔던 인연으로 진의 집에서 머무는데,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친모에 대한 복수의 독기가 사라진 데는 진의 가족 덕이 크다.
진의 가족은 연극배우인 엄마와 고등학생인 랑, 대학생인 진 셋이 전부다.
진의 아빠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리사는 또래인 랑의 방에서 묶는데, 랑은 방 안에서 텐트를 치고 잔다.
리사는 '엉뚱한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손님에게 침대를 양보하느라 텐트족인 양했던 거였다.
진은 리사가 엄마를 찾는 동안 늘 동행하며 도움을 준다.
진의 엄마는
"식구가 따로 있겠니, 밥 같이 먹으면 식구지"라며 그녀를 가족처럼 대해준다.
이와 같은 진 가족의 환대는 리사의 마음을 녹인다.
이 책에서 리사가 눈물을 흘릴 때는 두 번인데 그 첫 번째가 진의 가족과 목욕탕에 갔을 때다.


아줌마는 욕탕에서 나와 손바닥 크기의 얇은 녹색 타월을 손에 끼우더니 
랑의 등을 죽죽 밀기 시작했다.
"아야! 아야! 살살해" 소리치는 랑의 팔을 한쪽 손으로 붙잡고 아줌마는 사정없이 밀어댔다.
"이런 식으로 복수하기야?"

랑은 아우성을 쳤다.
랑의 등은 손길을 따라 발갛게 마찰 자국이 생겼다.
"때 봐라. 우동이야 우동"

아줌마는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랑의 등을 철썩 때린 다음 샤워기 물을 뿌리고 타월을 빨았다.
그러고 나선 내 차례! 
랑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동안 나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까슬까슬한 타월이 불규칙하게 등을 쓸어나갈 떄마다 가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내 팔과 등을 여기저기 붙잡는 아줌마의 손길이 느껴졌다.
맨살과 맨살이 접촉할 때마다 내 몸이 움찔움찔 반응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따갑게 등을 쓸고 지나갔다.
내 등을 밀고 있는 사람이 엄마라면...., 그런 생각이 들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픈 것도 모른 채 나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지막에 내 등을 물로 씻어내고 아줌마가 등을 철썩 때릴 땐 알 수 없는 쾌감이 몸 전체로 퍼졌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랑의 엄마가 랑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리사에게 했다는 부분이다.
팔과 등을 잡고 때를 밀고 철썩 때리기도 한다.
리사는 등과 손바닥 사이의 맨살을 통해 '모녀 사이의 압축된 사랑'을 느낀다.
양 엄마인 데이나에게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이 '아줌마'를 통해 해소되었기에
리사의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이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며 상처 회복에 한 걸음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  
진이 엄마의 다음과 같은 말이 리사에게 진정성 있게 들렸던 것도 그 때문이다.


"리사 너도 니 엄마 이해해라"  아줌마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니 엄마, 자기 인생 맘대로 할 수 없었어.
  결혼이 애 낳는 자격증처럼 돼 있지.
  식구들 운명이 몽땅 아버지 손에 쥐어져 있지.
  돈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거라고. 
  그때 엄마가 열여덟 살이었다며?
  그럼 뻔해. 
  니가 그 입장이었다면 혼자서 애 잘 키웠을 것 같아?
  천만에. 
  사람 사는 거 그렇게 간단한 문제 아니다"
---

"리사"
아줌마가 나를 불렸다.
접시에 눈을 박은 채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한 샐러드가 침과 섞였다.
"니 엄마, 너 만나기 쉽지 않을 거야.
  지금은 인생이 남편 손에 맡겨져 있을 거거든"


리사가 자신을 버렸을 뿐 아니라, 
현재 만나려고도 하지 않는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은 
이처럼 아줌마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 가족의 환대와 아줌마의 조언은 리사의 마음을 조금씩 녹이지만 엄마를 용서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리사는 아빠가 없다는 것 외에 진 자매에게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네들에게도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자매의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라 돌아가신 아빠와 재혼한 새엄마였다,
진 자매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재혼한다면 헤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을 안고 잇었던 것이다.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해 보이던 사람들도 
자신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으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혼자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살아갈 힘이 나는 법이다.
친모를 용서하게 된 것은 외부적으로는 엄마의 상황을 이해하게 됐고,
내부적으로는 다른 사람도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데에서 삶의 원동력을 회복하고 
생의 감각을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진의 가족은 결혼으로 대표되는 정상 가족 안에서만 출산해야 한다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시키는 새로운 유형의 가족이다.
죽은 남편의 전실 자식과 새엄마의 결합은 정상 가족과 멀어도 한참 멀다.
그렇지만 이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
재혼도 거부하고 자매를 돌보는 새엄마는 그야말로 새엄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으면 어떻고, 피가 안 섞이면 어떤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면 진정한 가족이 아니 겠냐는 작가의 가족관은 '부모 - 자녀 관계'는 
'혈연이나 입양이 아니더라도 돌봄, 책임, 계약과 유사한 관계를 지닌 모든 상황'을 아우른다는 
캐나다 <온타리오 인권 법>의 소설적 적용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양 엄마와의 관계는 어떻게 풀릴까?
작가는 둘을 극적으로 화해시키거나 억지로 상처를 봉합하지 않는다,
리사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한다면' 하는 마음으로 입양에 동의했을 때는 겨우 스물세 살, 
그때는 어리고 순진한 아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먼 나라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면서 인정머리 없고 신경질적인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데이나는 나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가졌다고 믿었다.
---
처음 몇 년은 마이클과 함께 사랑으로 날 키우려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양 아빠에게 병적으로 집착하고 노새처럼 고집이 세며, 
집 안을 정신없이 어질러 놓고, 나중엔 여덟 살이나 어린 동생에 심술을 부리는 아이를 예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데려온 문제아를 하루에도 몇 번씩 돌려보내고 싶었겠지.
서로가 서로에게 스트레스였던 데이나와 내가 수시로 전쟁을 벌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리사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자신을 미워했던 양 엄마를 이해한다.
참회나 용서, 포옹은 없지만 둘의 화해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3. 미지unknown 에서 미지 美智로.
운미지, 입양 서류에 적힌 리사의 한국 이름이다.
진은 '미지'가 '어떤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함'이라는 뜻이라고 리사에게 가르쳐 준다.
이 말을 듣고 리사는 크게 위축되는데, 
그렇지 않아도 아빠가 죽은 뒤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던 차에 이름조차도 아무런 의미 없는 사람,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리사는 우여곡절 끝에 엄마를 만난다.
리사가 직면한 문제의 최초 원인이었던 엄마를 만났을 때, 
그녀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이웃 청년을 오빠처럼 따르다 열여덟 살에 임신을 하였'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끝내 고려되지 않았다'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자신의 처지를 용인할 만큼 내적인 힘이 길러졌기 때문이다.

리사는 친모에게 왜 이름을 미지라고 지었는지를 맨 먼저 묻는다.
그만큼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엄마는 금작 체인이 달린 인조 가죽 핸드백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냈다.
엄마가 수첩에 쓰는 글자는 중국 글자 같았다.
美智.
"아름다울 미, 지혜 지, 아름답고 지혜롭다는 뜻이야. 
  그런 아이로 자라길.....,"


리사는 엄마의 말을 통해 자신이 의미 있고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서 어떤 사람인지 정체성을 확실히 찾은 것이다.
그래서 양 엄마아게 버림받았을 때는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름을 알고 나선 '한국인, 미국인 둘 다'라는 생각에 이른다.
한국 이름을 넣어 '리가 미지 밀러'라고 한 것은 그녀가 엄마와 한국을 받아들였다는 증거이다.

버림을 받고서도 리사는 친엄마를 배려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꼽으라면 미국에 가족이 있다고 엄마에게 말하는 장면을 들겠다.
엄마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하는 대목은 눈물겹다.
그녀는 엄마에게 다시 만나자고도 하지 않는다.
대신 혼자서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롤러코스터 같았던 열여덟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지금,
내가 할 일은 그 경험 위에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에게 강요되었던 아슬아슬한 굴곡의 영여덟 인생이 완결되고 있었다.
앞으로의 인생은 내가 내 힘으로 결정하고 살아갈 것이다.
천사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나는 나의 수레바퀴를 돌릴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을 끌어내며 나는 나 자신을 안심시켰다.


엄마를 보내고 리사는 
'앞으로의 인생은 내가 내 힘으로 결정하고 살아갈 것'이라고 마음먹는다.
이런 결의에 신뢰를 보낼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열여덟의 믿음직한 화자로 설정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열여덟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굴곡의 열여덟 인생이 완결되고 있다'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혈혈단신 이국에서 생활해야 할 신산한 삶이 이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칭크 칭크 옐로 치크 옐로 멍키"
유치원에서 나는 재미있는 놀잇감이었다.
못된 애들이 손가락으로 자기 눈 밑을 치켜올리고 혀를 날름거리는 건 보통이었다.
내 눈이 그리 작지도 여우처럼 찢어지지도 않았는데 그랬다.
심할 땐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나를 집어넣어 끌고 다니며 고무 공으로 위에서 내려친 후 
나중엔 플라스틱 통을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기겁해 달려온 교사는 그만 멈추라며 팔을 내저을 뿐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애들은 그렇다 치고, 어른인 '보육 교사'도 소극적으로 폭력에 가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인종차별이 약화됐다고는 하나 아직도 심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학교에 들어간다고 놀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신체적 폭력은 없어졌으되, 언어폭력은 더 가혹해진다.


"노란 피부의 엄마, 아빠에게 버림받고 사는 기분은 어때?"
"너 한국인가 하는 나라에서 팔려온 애지? 얼마짜리야?"



리사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피부를 아빠처럼 만들어달라고 늘 기도한다.
그만큼 아빠를 사랑해서이기도 하지만 외모에 대한 차별과 따돌림이 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유치원 때부터 집 밖에 나가면 길을 잃어버리는 병을 앓는데 그 원인은 '스트레스와 공포' 때문이었다.
해외 입양아들은 대체로 유기에 대한 불안과 공포라는 '원초적 상처' 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고 하는데,
아빠의 너른 품 안에 있던 리사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앞에는 경제, 통일, 교육, 취업, 불평등 해소, 인권 등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다들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렇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갓 태어난 아이가 죽어가고 있고 겨우 살아남았다 해도 온갖 고통을 겪는다.
낳은 부모가 아이를 잘 키운다는 보장은 없지만, 같이 살 수 잇도록 해주는 게 먼저다.
언제까지 우리는 '리사 미지 밀러'들을 만들어낼 것인가?


글 - 김명순 (청소년문학평론가. 문학박사. 2011년 '아동문학평론' 신인문학상 평론부분 수상)

박선히 - '베이비 박스'  자음과 모음 2018.

 

 

※ 이 글은 <아동 문학 평론>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4.03.19.  20220308-1638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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