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 On the Road 카오산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에필로그
친구들은 다큐멘터리 <On the Road>를 보고 내가 영어를 잘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외국 친구들에게서 깊은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었다면,
그건 내가 영어를 잘 해서가 아니다.
내가 만난 친구들이 친절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촬영한답시고 제대로 대꾸도 못해주면서 연거푸 질문만 해댄 나를 그들이 끈기 있게 받아줬기 때문이다.
사실 외국인 여행자를 본격적으로 인터뷰한다는 계획은 사전에 없었다.
애초 한국 여행자들에게 집중할 생각이었던 데다가
외국인 여행자들과 속 깊은 인터뷰를 하는 게 가능할지 확신도 없었다.
게다가 카오산에 와서 인터뷰 섭외에 애를 먹고 있는데
한국 사람도 아닌 외국인을 섭외한다는 게 엄두가 날 리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결과적으로 외국인 여행자를 섭외하는 게 한국 여행자들보다 훨씬 쉬었다.
다행히 그들은 하나같이 형편없는 내 영어를 잘 견뎌주었다.
인터뷰를 하고 나서 다시 카오산에서 만날 수 있었던 이는 드물었다.
모두 제각각 또 다른 목적지로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고맙다는 말만 전했을 뿐 근사한 식사 한 번 사지 못했다.
여행을 하면서 외국 친구를 사귀는 건 의외로 간단할지 모른다.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면 된다.
영어를 잘 못해도 상관없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눈빛과 몸짓으로 어떤 사람인가 전해져 온다.
인터뷰에 응해준 친구들 모두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난 그들과 여행의 매혹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나눌 수 있었다.
여행의 매혹이란 여행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인생의 매혹이다.
사람들은 대게 장기 여행자를 유별나다고 여긴다.
때로는 '여행자'라는 이상한 직업을 붙이면서 대리만족 수준에 머문다.
이때 여행은 마치 여행가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돼버린다.
여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가끔 일상을 떠나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은 모든 이에게 필요하다.
여행은 바로 그런 시간일 뿐이다.
단기이건 장기이건 중요하지 않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여행자들은 있다.
한국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넘어가 육로로 아시아를 횡단해 중동을 거쳐 유럽까지 넘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제 지구상 어디를 봐도 여행자들이 없는 오지란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적인 가이드 북 '론리 플래닛'은 심지어 <남극>편을 출간했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이 참을 수 없는 유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행이 중독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중독은 겸손을 배운다는 여행의 의미에 어긋난다.
여행을 다녀와서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현실과 여행은 구별돼야 할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떠난다고 영원히 현실로 돌아오지 않을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도피라는 걸 알고 도피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두려움은 호주머니 속에 잠시 넣어두라.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을 위한 부정일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난생처음 여행을 떠나보겠다고 간신히 마음을 먹어도 난관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작 집을 나서려고 하면 애초의 의지는 온데간데 없고 두려움부터 앞선다.
하지만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여행을 다녀왔다 해서 세상이 두 쪽 나는 일은 없다.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여행 후 내가 어떻게 달라질까를 걱정하는 건 너무 조급하지 않은가.
여행을 한다고 일상을 버리는 건 아니다.
집 평수를 늘리는 게 중요한 만큼
행복을 느끼는 마음의 평수에도 가끔은 관심을 둬야 하지 않을까.
여행을 하면서 우리가 버리는 건 일상이 아니라 욕심일지도 모른다.
회사가 한 달간의 휴가를 준다 해도 사람들은 쉽게 떠나지 못한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떠나고 싶지만 두렵다.
한 달의 휴가에서 돌아와 다시 일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한 달간이나 여행을 가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고 의심한다.
그럴 바에야 나중에 직장을 그만두고 오래 여행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면서 속으론 한숨을 내쉰다.
내가 여행을 가는 건 쉽지 않겠지? 결국 좋은 시절 다 갔구나 하고 한탄한다.
앞으로 내 인생에 한 달간 여행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떠나는데 정작 발목을 잡는 건 항상 우리 자신이다.
여행을 떠나면 보통 사람으로 살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한가?
그래서 어딘가에 소속해야 할 것 같은가?
그래서 떠나자마자 허둥지둥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는가?
그럼 지금 회사에 소속되어 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어서 만족스러운가?
언제 사그라질지 몰라 불안한 행복은 아닌가?
여행을 가는 것도 가지 않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다.
하지만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않고 여행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길을 나서면 적은 돈이건 큰 돈이건 돈이 드는 건 당연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루 만 원을 쓰는 것도 부담스러울 수 있겠지만
여행을 하는데 돈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건 아니다.
최소한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적은 돈이 든다.
안야가 1년 반 동안 여행하면서 쓴 돈은 660만 원이다.
한 달 평균 35만원 꼴이다.
코베나 키티, 지현도 거의 비슷했다.
영어를 꼭 잘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능숙한 영어는 정보를 주고받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영어를 못한다고 여행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돈이나 영어가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장기 여행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장기 여행'이란 말부터가 낯설기 때문이다.
장기 여행은 별나거나 잘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조금 더 오래 여행을 하는 것뿐이다.
해보면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일도 별 것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내가 <On the Road>를 만들면서 만났던 모든 장기 여행자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나 망설이고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움직여보면 별 거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장기 여행도 똑 같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구에게나 여행이 필요로 한 순간이 온다.
무엇인가 참을 수 없을 때,
단 며칠도 좋고 장기라면 더더욱 좋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돌아와서 무엇을 할까?’라는 근심 대신 자기 자신을 믿고 배낭을 싸면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돈을 좀 충분히 모아서 갈까?
아이 좀 키워놓은 다음에 갈까?
망설이지 마라.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떤가?
내 자리가 어디 그것 하나뿐일까?
중요한 건 자신을 믿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내가 만났던 여행자들 중 장기 여행이 힘들다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지금이 아니라도 괜찮다.
장기 여행을 떠날 수 없다면 짧은 여행도 좋다.
당장 떠나지는 못하더라도 하루에 만 원,
2만 원이면 할 수 있는 여행을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번에 만난 한 여학생은 낮에는 빵집에서,
저녁엔 식당에서, 주말엔 과외를 해서 여행 경비를 마련했다고 했다.
1년 후에라도 2년 후에라도
한번 떠날 수 있다는 꿈을 꾼다면 생활이 조금은 덜 힘들지도 모른다.
누구나 처음 한번은 힘들게 여행을 시작한다.
하지만 여행을 떠났다고 해서 무조건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여행을 떠나면 일상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자유를 누린다.
난 일본과 태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인도에서 두 번, 뉴욕과 방콕, 그리고 라오스 시골에서 한 번씩 죽도록 아팠던 적이 있다.
라오스에서 아팠을 때는 정말 말라리아에라도 걸린 줄 알았다.
의사를 부르고 링거를 맞고 며칠간 끙끙 앓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꼈을 뿐이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언어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여행을 당장 그만둬야 할 정도는 아니다.
여행 중 문제가 생기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밀라노 부근 베라 가모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고도
내가 들고 있던 큰 가방이 문제가 돼 게이트 밖으로 세 번이나 쫓겨난 적이 있다.
나를 세 번이나 쫓아내던 공항 보안요원은 단 한마디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어쩔 수가 없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내가 문제의 빌미를 제공했고 내가 외국인이란 사실을 여유 있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웃으며 털어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 여행이 준 경험은 오로지 당신의 것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그 모든 경험은 소중할 수 있다.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짜릿한 행복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여행을 한다고 바로 무언가가 남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행하던 날들을 되돌아보면,
낯선 거리를 헤매고 다니던 시간은 평생 웃음 지을 수 있는 기억이 된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사치가 아니다.
운이 좋거나 상황이 억세게 좋은 인간들만 한가롭게 여행을 다니는 건 아니다.
살면서 꼭 한번은 혼자서, 한 달쯤 여행을 떠나보라.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가?
결혼을 했건 미혼이건,
취업을 했건 하지 못했건,
돈이 많건 적건, 남자건 여자건 한번은 떠나봐야 한다.
기왕이면 한 달은 돼야 하고 3개월 이상이면 더욱 좋다.
80년이란 인생을 살면서 순전히 자기를 위해 겨우 몇 달의 시간을 내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다.
왜 꿈만 꾸고 있는가.
한번은 떠나야 한다.
떠나는 건 일상을 버리는 게 아니다.
돌아와 일상 속에서 더 잘 살기 위해서다.
※ 이 글은 <On the Road 카오산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박준 - On the Road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넥서스BOOKS - 2006. 06. 10.
[t-23.08.30. 210809-172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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