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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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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아 사랑해 - 에필로그 /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by 탄천사랑 2023. 8. 13.

·「이지선 - 지선아 사랑해」

 

 

에필로그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저는 덤으로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사과 한 개밖에 사지 않았는데 내가 단골이라서, 
혹은 예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인이 값없이 주는 게 '덤'입니다.
그리고 꼭 성한 게 아니더라도,  한 귀퉁이가 조금 뭉그러진 사과일지라도 그저 주는 게 고마운 것....,
그것이 바로 '덤'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그 덤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2000년 여름 사고 나던 날부터 일주일 동안 의사들이 저를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르는 가장 위험한 환자'로 분류해놓았을 그때..., 그렇게 갔을 것입니다.
스물세 살의 어느 날 정말 '찍 소리도 한번 못하고 끝나버리는 게 제 몫이었다면,
온전치는 않지만... 껍데기는 조금 남들과 다르지만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이건 바로 제가 받은 덤입니다. 

주기만 해도 감사한 것이 덤인데... 하나님께서는 덤의 지선이 삶에 또다시 덤의 덤을 얹어주십니다.
제게 천국의 마음을 주셨고 정말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 기도에 힘을 받았습니다.
일본과 미국으로 저의 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
돌아보면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 없이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공부를 하고 꿈을 키울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러고도 뭐가 행복할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솔직하게 다치기 이전보다 훨씬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덤의 인생은 조금 불편하긴 해도 걱정이나 근심, 어쭙잖은 우울함 따위는 없습니다.

언젠가 <병원 24시>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화상을 입은 열 살짜리 꼬마의 이야기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도 그 무시무시 화상 때문에 제가 치료를 받았던 그 치료실에서 처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화상으로 다 타버려 없어진 피부 대신 붕대를 감고 있습니다.
피부도 무엇도 아무것도 없는 그 몸에 소독약을 바릅니다.
거기서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싶을 정도로.... 그 고통은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열 살짜리 아이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사고 후 7개월 동안 받아야 했던 그 치료의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갑니다.
그 고통이 뼛속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이 끝나자 엄마가 저를 안고 엉엉 우셨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제 앞에서 울지 않았던 엄마가 소리 내어 막 우셨습니다.
지난 세월 딸이 받았던 그 고통 때문에 엄마는 가슴이 아파서 그렇게 울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도 저도 이내 눈물을 닦았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살리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고통을 대가로 치르긴 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계속해서 수술대 위에 올라가야 하겠지만...
그러나 살아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고통 가운데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소망'과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으시며 지금의 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모습 그대로 기쁘게 저를 사용하시리라는 소망이 마음에 평안을 주었습니다.

언제나 눈에 보이는, 정말 '짠'하는 기적을 바라왔습니다.
정말 기대를 품고 갔던 일본에서도 
여전히 그런 기적이 나타나지 않아 병원 침대에 누워 하나님 성격 이상하다며,
만나면 꼭 따져볼 거라고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정말 내게 기적이 없었는가?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 이렇게 너무나 잘 살고 있습니다.
기적처럼 눈을 지켜주셨고, 
캄캄한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제 얼굴에 새 피부를 덮어주시기도 했습니다.
의사들 조차 이 깊은 상처 위에 피부가 나올 리가 없다며 믿을 수 없어 했습니다.
하지만 피부는 분명 돋아났고, 그 증거는 제 깨끗한 이마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큰 기적은 제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조차도 이런 제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평안함이 늘 있습니다.
소망 가운데, 감사하는 가운데 임했던 '평안'... 몸의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것....,
전쟁터 속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거기서 오는 영혼의 평안함.
예전 얼굴을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여덟 개의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우리가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평안' 때문이었습니다.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짧고 잘 움직여지지 않는데 
왜 오른손을 더 지켜주시지 않았냐고 울며불며 원망하는 게 아니라,
왼손이라도 오른손처럼 심하지 않아 잘 쓸 수 있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손가락을 절단하려 들어가는 그 수술실 앞에서는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술을 마시고 운전해 우리 차를 들이박은 그 분께 
조금도 미운 마음이나 분노가 생기지 않도록 제 마음을 지켜주셨습니다.
달라진 삶과 얼굴을 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갖기 힘든 마음을....,
하나님은 한번 도를 닦은 적도 없는 제게, 그리 착하지도 않던 제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없으시다면?'이라고 가정해 봅니다.
이 서울을 다 준다고 한들, 
이 나라를 통째로 준다고 한들, 제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어느 것으로도 저를, 제 모습을, 제 꿈을, 제 삶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보상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은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힘든 시간을 지내면서 저는 그것이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정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정말 힘든 가운데도, 어제는 숟가락 혼자 잡을 수 있어서,
오늘은 또 문고리 잡고 열 수 있어서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마음....,
그래서 매일매일이 너무 행복한 마음이 제게 일어난 가장 큰 기적입니다.
제 힘으로나 제 의지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저는 감히 그것을 '기적'이라 부릅니다.

오래전부터 품어온 꿈이 있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많은 것을 잃게 된 장애인들의 상실감과 우울함,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고통을 치료하는 상담 센터를 만드는 게 제 꿈입니다.
의학은 한계가 있지요.
의사는 신이 아니니까요.
열심히 치료받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남은 장애,
달라진 상황과 몸을 내 것으로,
내 이야기로,
사실로,
현실로 받아들릴 수 있는 마음과 생각이 숙제로 남습니다.
갑작스레 잃어버리게 된 것들에 대한 상실감,
변하게 될 환경과 상황들에 대한 두려움, 분명 몸의 치료만큼이나 중요한 치료입니다.
그 치료를 돕는 사람, 그 치료를 감당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걸 제가 직접 잃어보고 아파본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아픔의 크기는.... 결코 잃어버린 것들의 많고 적음이나 
달라져버린 상황의 경종에 비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재활상담이라는 분야에 대해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몸보다 더 무너져버렸을지 모르는 그 마음을 세상을 향해 다시 펼쳐 보일 수 있도록 돕는 사람,
그리하여 '덤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도록 돕는 사람,
그 무너진 마음 곁에 함께 앉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전문 상담가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환자들도 아무 때나 손쉽게 찾아가 상한 마음을 치료받을 곳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손으로 성형외과 의사는 될 수 없지만, 제가 받은 위로와 평안으로 상한 영혼과 마음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제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화상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눈에 보이는 희망'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화상을 입은 대부분의 환자들은 막대한 치료 비용 때문에 경제적인 고통까지 함께 안고 있습니다.
불을 만지는 직업도 대부분 큰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이중고를 겪는 분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저처럼 고통사고로 화상을 입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요.
때문에 보험 혜택도 받기 어려운 경우가 참 많습니다.
지금 제게 큰돈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씩 시작할 수 있습니다.
조금씩 시작해서 뜻 있는 분들과 함께 사랑을 모아 저와 같은 아픔을 겪는 분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그동안 받은 큰 사랑들을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제 몸이지만 저조차 예상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았던 일들로 지난 3년여의 시간이 채워졌습니다.
몸은 상하고 아팠지만, 또 불편해졌지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범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제가 당한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때로는 고난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삶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 얼굴과 짧아진 손가락들, 치료실에서 보낸 수많은 낮과 밤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힘겹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기고 나면 주어지는 보물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열매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저는 이제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사고 나기 전 그 자리로 되돌려 준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바보 같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제 대답은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을 믿고 있고,
또 지금 제 안에 담겨 있는 고난이 가져다준 축복의 보물들은 정말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안에 있습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앞으로도 펼쳐질 것입니다.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이 모습이 아니고는, 그간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는 전할 수 없는 메시지들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아니고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며,
이런 모습의 저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분명 제게 맡겨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p263)
※ 이 글은 <지선아 사랑해>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지선-지선아 사랑해
이레 - 2003. 05. 07.

[t-23.08.13.  230812-1749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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