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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밥 - 04 뒤엉킨 삶을 풀어내는 비결

by 탄천사랑 2023. 7. 7.

·「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 청소부 밥」

 

 

로저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부엌에만 환한 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식탁 위를 보니 박스에 피자 두 조각이 담겨 있었다.
싱크대에는 저녁식사 때 쓴 접시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로저는 새워를 하고 내일 발표할 계획안을 검토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먼저 아이들을 보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달린이 두 아이가 누워 있는 침대 사이에 앉아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아빠!"

아이들은 반가운 마음에 목을 껴안으며 매달렸다.
로저는 허리를 굽혀 달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달린은 미소로 답했다.
그간의 서먹했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진 듯한 느낌이었다.

"자기가 애들한테 책을 좀 읽어줄래? 나는 그동안 설거지를 좀 할게"  달린이 부탁했다.
"그래요. 아빠! 아빠가 읽어주세요."
"좋아, 하지만 잠깐만이다. 둘 다 어서 자야지"

그는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등장인물별로 목소리를 바꿔가며 동화책을 읽는 게 어쩐지 바보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달린은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에 훨씬 열성적이었다.
그녀는 별이 그려진 고깔모자를 쓰고 동화 속 요정 흉내를 내며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다.

로저는 재킷과 구두를 벗은 후 침대 사이에 앉았고, 아이들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모자도 쓰고 해야죠. 아빠"  둘째 딸 베카가 고깔 모양의 요정 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는 그런 거 안 써."

로저는 짧게 대답하고는 달린이 표시해 준 부분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아이들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로저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달린이 있는 부엌으로 내려갔다.

"둘 다 세상모르고 잠들었어"  로저가 말했다.
"자기가 책 읽어주면 애들이  무척 좋아해.
 내일 아침 먹으면서 내내 그 얘기만 할 걸? 큰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야."

달린이 테이블에 음식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데운 과자 두 조각과 토스트 샐러드 였다.

"잠깐 같이 있어줄래?"

로저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오면 늘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피해주려고 한 건데....,"

그녀는 마치 그네에 앉은 어린 소녀처럼 조리대 끝에 걸터앉아 긴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일은 어땠어?"
"지옥은 따로 없었어. 애들 얘기나 하자"   로저가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애들이야 항상 똑같지 뭐,
 세라는 계속 소프트볼 경기 얘기만 하고  베카는 '상상의 친구' 척의 머리카락을 잘라줘야 된다고 하고....,
 참! 오늘 기계에 갔다가 우연히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세라가 자꾸 악몽을 꾼다고 말씀드렸거든"

달린이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아, 병원에 가보기로 했었지? 잊고 있었네."

 

로저는 음식을 입에 넣으며 대꾸했고 달린은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의사가 뭐래?"  로저가 음식을 삼키며 물었다.
"애들이 악몽을 꾸는 건 정상적인 일이래.
 어떤 애들은 며칠씩 연속으로 같은 꿈을 꾸기도 한다는 걸?
 그건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대"
"어떤 두려움?'  로저가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 세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자기 반 친구 부모님이 이혼을 했는데 우리도 혹시 이혼할 거냐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로저가 긴장한 얼굴로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마침내 달린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내가 방에서 우는 걸 본 적이 있다고....,"
"우린 이혼 같은 거 안 한다고 달래줬어야지"  로저가 달린을 보며 말했다.
"글쎄... 그래야 했을까?"  달린도 로저를 마주 보며 말했다.
"글쎄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로저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세라가 겁먹었다는 거 알아
 당연히 달래주고  안심시켜줘야 했겠지.
 세라도 그걸 바랐을 거야.
 하지만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아이들한테 상처 주기는 싫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아"
"그런데 당신은 왜 울었는데?"  로저가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뻔하잖아. 그걸 꼭 말해줘야 알아?"  

달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로저는 식욕을 잃은 듯 접시를 밀쳐냈다.
"수도 없이 말했잖아!
 어젯밤에도 말했고, 똑같은 말을 대체 몇 번을 해야 해?
 우리는 서로 원해서 결혼했어.
 한쪽이 억지를 부려서 다른 한쪽이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게 아니잖아.
 그런데도 자기는 나와 아이들이 무슨 큰 짐이나 되는 것처럼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거 알아?
 원하지도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 짐짝처럼 말이야.
 난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둘 다 이런 생활을 원했다는 걸 의심해 본 적이 없어.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생각해 봐.
 정말 꿈만 같았잖아.
 결혼 초기에는 자기도 일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왔고,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나나 애들이 그렇게 부담스럽다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서로를 원하지도 않는데 집에 멋진 차,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야?
 난 이제 더 이상 확신이 서지 않아.
 자기한테는 아무리 말해줘 봐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 같고"

달린은 조리대에서 내려와 빠른 걸음으로 침실을 향해 사라졌다. 
그랬다. 똑같은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로저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녀의 주장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와 딸들이 좋은 집에서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왔다.
그것이 로저의 의무였다.
그래서 죽도록 일에 매달렸다.
그런데도 달린은 로저가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둥,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둥, 끓임 없이 불만만 늘어놓는다.
로저는 잠자코 있다가 느닷없이 화를 내곤 하는 달린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저는 접시를 식기세척기에 대충 던져 넣고 계획안을 검토하기 위해 서류 가방을 찾았다.
그런데 가방을 샅샅이 뒤져봐도 계획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사무실에 두고 왔나?'
비서에게 전화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사무실에 다시 갔다 오자니 한 시간은 족히 걸릴 테고.....,

로저는 그냥 잠을 자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달린은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은지 독서 등까지 모두 끈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로저는 5시 30분으로 알람을 맞추다가 문득 침대 옆 탁자에 책이 한 아름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달린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는 그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쓴 <한계를 극복하는 사람들>이라는 책이었다.

'내 얘기 같군. 나도 매일 한계를 넘어서고 있으니 말이야.'
로저는 책을 읽으면 수면제 없이도 잠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두 시간이 지나도록 여전히 잠들 수 없었다. 
책에 완전히 매료되어 덮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상황에서 남을 위해 희생한 휴머니스트들의 이야기가 '희망' 이라는 단어에 담겨
깊은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로저는 감동을 받았다.
그는 책을 읽는 동안 계획안에 대한 걱정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계 바늘은 어느덧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알람을 다시 7시 30분에 맞추고 책을 읽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달린이 그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늦잠 잔 거 아니야? 벌써 일곱 시 반이 넘었어."
"괜찮아. 쉬고 싶어서 그랬어."  로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애들을 학교에 데려다줄게"
"정말?"  

달린이 반색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정말이면, 이제 자기 웃는 얼굴 볼 수 있는 거야?" 로저가 욕실로 가며 물었다.
"웃는 얼굴뿐이겠어?
 메이플 시럽을 얹은 블루베리 팬케이크도 덤으로 줄게"

달린은 기분이 좋은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로저가 대답했다.

그는 항상 모두가 자고 있는 시간에 혼자 일어나 출근을 했었다.
마치 파티에 놀러 왔던 손님이 하룻밤 신세를 지고는 
미안한 마음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듯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향했던 것이다.

아직 졸음이 덜 가신 얼굴로 식탁에 앉아 
시리얼을 먹고 있는 두 딸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사랑스러웠다.

"침대 옆 탁자에 있던 책을 한 권 읽었어.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쓴 책 말이야"  로저가 아침을 먹으며 말했다.
"한계를 극복하는 사람들? 정말 대단하지 않아?"

달린이 밝은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심하게 싸우더라도 다음 날이면 기분 나쁜 내색 없이 다정한 아내로 돌아와 주는 달린이 로저는 고마웠다.

"감동적이었어
 한번 읽기 시작하니까 놓을 수가 없는 거야.
 그들은 정말 특별한 사람들인 것 같아. 나 같으면 절대 그런 일 못할 거야"

로저가 말했다.

"무슨 말이야.
  자기도 매일 다른 사람을 돕고 남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잖아"

달린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달린에게서 이런 다정한 말을 듣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 로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애들을 학교에 데려다줄 수 있겠어?"

달린이 걱정스러운 듯 아이들을 흘끗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로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아이들 등교 준비를 도운 후 차에 올랐다.
그리고 출발하기 전 고개를 돌려 달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말없이 미소를 띤 채 남편과 아이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잠옷 차림에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베카와 꼭 닮아 있었다.
달린은 손을 흔들어주었고 로저는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고마워' 라고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화창한 아침이었다.
어젯밤 이혼 얘기가 오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달린과 로저는 서로를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퇴근 후 밤늦게 집에 들어가 달린과 또 다시 똑같은 말다툼을 하는 일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로저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계획안을 검토하기 위해 비서 베키에게 외부 전화를 연결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청소부 밥이 그에게 건네주었던 메모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첫 번째 지침: 지쳤을 때는 재충전하라'

로저는 어젯밤 책을 읽었던 것이 오늘 아침 그에게 얼마나 큰 에너지를 불어 넣어 줬는지 깨달았다.
그 책 덕분에 달린과도 쉽게 대화를 풀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지쳤을 때 재충전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군. 그 양반 말이 옳았어'

로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집중해서 계획안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30분 만에 모든 일을 끝냈다.
그는 베키에게 몇 가지 의견과 함께 계획안을 넘겨 수정하도록 한 후,
회의 시간 전에 여유 있게 그것을 모두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일이,  어제는 왜 그리도 힘들 게 느껴졌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p63)
※ 이 글은 <청소부 밥>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 청소부 밥
역자 - 신윤경
위즈덤하우스 - 2006. 11. 15.

[t-23.07.07.  210731-0705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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