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룡 - 나는 솔직하게 살고 싶다」
남한산성
남녀는 평등해야 하지만 모든 부부가 평등할 필요는 없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너무나 신선한 발상의 책 한 권을 만났다.
그 책은 바로 <평등한 부모, 자유로운 아이>라는 책이었다.
부모가 평등하다면 아이들은 남녀의 사회적 역할,
즉 젠더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개성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모든 부부가 평등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곧 완벽한 남녀평등의 출발점으로 보여졌다.
가정이 변하면 사회도 따라서 변할 것이다.
이상적인 사회는 '평등한 부부'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결혼을 해보니 이러한 믿음이 소박한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평등한 부부 혹은 부모라는 것은 '이상'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완벽한 것'이라는 이상을 소명하지 않는다.
완벽주의를 버린 것이다.
완벽한 것은 이루기 힘들다.
그러기에 '이상'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가.
왜 '이상적인 가정' '평등한 부부'를 이루기 힘들까.
사람들은 동등한 관계를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가능하다면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나 자신도 그랬다.
나는 게으르고 일하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돈을 잘 버는 여자를 만나 집에서 살림하면서
남는 시간에 만화나 보고 전자오락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런데 능력 있는 여자들은 나를 싫어했다.
그녀들은 나를 한심하게 여겼다.
그리고 운명은 아이로니컬한 것이다.
대신에 나보다 훨씬 게을러서 하루 12시간은 자야 하며,
회사 생활이라곤 고작 1년 반 하고선 자신은 사회 생활 체질이 아니라며
다시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도 누구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는 타입이지만,
나보다 더 강력한 상대를 만나 사랑하게 되면서 내가 밀린다는 것을 느꼈다.
결혼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고민에 빠졌다.
나는 사람의 근본적인 심성은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내가 아무리 '여성의 일할 권리'를 외친다고 해도 일할 사람이 아니다.
그녀에게 일은 보람이 아니라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결혼한다면, 집에서 한가하게 살림하고 싶다는 꿈은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그녀를 선택하고 말았다.
'그래 차라리 내가 일을 하자'라고 생각을 바꿀 만큼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가정은 남편이 돈을 벌고 부인은 전업 주부인 보통의 가정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곧잘 나에게 질문한다.
'그렇게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 왜 본인은 그렇게 살지 않냐'라고.
이걸 또 구구절절이 설명해야 하나,
내가 아내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기는 커녕,
모시고 살다시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이 평등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아내가 전업 주부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경제적으로 내게 의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 부부만의 얘기가 아닐 것이다.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다.
아니,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쪽을 선택하지 않을까.
부부간의 평등은 모든 것에 있어서의 평등이 아니다.
꼭 서로 독립적인 개체로 동등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한쪽이 다른 쪽에 의존하면서 살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존이 권력이나 고압적 지배와 관련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상대방의 의존을 감싸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
기존의 많은 가정처럼 여자가 남자에게 의존하는 가정,
거꾸로 남자가 여자에게 의존하는 가정의 비율이 얼추 비슷해진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물론 이상적으로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태의 가정이 똑같은 가치를 지니면서
일렬로 늘어서는 편이 다양한 삶의 형태를 확보한다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이 땅의 수많은 똑똑한 여성들이
서로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이상적인 가정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현실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의존하는 가정을 꾸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카스트 제도가 시행되는 인도.
제일 높은 계급인 브라만 계급의 여성들 태반이 결혼조차 못한다고 한다.
태어났을 때는 부모의 계급을 따르지만, 결혼하면 남편의 계급을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가 자기보다 계급이 낮은 남자와 결혼하면 계급이 낮아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결혼을 보는 시각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슷하다.
남자의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가 여자보다 우월하거나 최소한 동등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면 당장 편견과 비웃음에 시달린다.
"왜 하필이면 그런 남자와...."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불 속 논리'로 해석하는 사람도 많다는 점이다.
"여자는 무척 밝히는 타입이고 남자가 정력이 무척 세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 이루어졌다는 식이다.
이런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여자에게 의존하며 살겠다는 남자가 나오기 힘들고,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의식 있고 능력 있는 여성도 드물다.
결국 능력 있는 여성들은 자기와 동등하거나 자기보다 우월한 남자를 찾는다.
눈에 차는 남자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에게 의존하는 가정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앞의 전백련을 보면서 이제 서서히 사회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편견과 비웃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남자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백련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사람들의 취향은 그만큼 다양하다.
다만 이런 남자들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회풍토 때문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는 여성들이 말로만 주장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길 때다.
집에서 살림하면서 부인 뒷바라지 하겠다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무엇을 망설이는가.
여성들에게 의존하려는 남자들과 결혼해라.
바로 그것이 사회적으로 남녀평등을 이루는 첫걸음이다.
이런 사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단지 여성들만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교과서를 비롯한 교육을 뜯어 고쳐야 한다.
우리 교과서는 '아버지가 일하고 어머니는 전업 주부인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족'을
보통의 가정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편모 가정이나 편부 가정은
'결손가정(말이 너무 무섭다. 부모가 다 있어도 사랑이 없는 가정이 결손가정이다)이라고 부르고,
맞벌이 부부 가정도 정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런 가정에서 비행 청소년들이 많이 나온 것은 학교에서
'너희 가정은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일하고 아버지가 살림하는 가정의 아이들도 같은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고쳐야 한다.
그 어떤 형태의 가족 구성과 역할 분담도 있을 수 있고,
모든 가족 형태는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르쳐야 한다.
편견이 없어진다면
살림하기 원하는 여자는 두 사람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와 결혼하고,
살림하기 원하는 남자는 능력 있는 여자와 결혼한다.
그 중간 형태도 모두 개인의 선택사항이고,
그 어떤 형태의 선택도 개인의 자유 의사에 맡길 일이다.
사회 제도도 손볼 곳이 많다.
그 중의 하나는 임금 형태의 개선이다.
능력 있는 사람은 회사에서 어디로 보낼지 모른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사람을 부산으로 보내기도 하고, 외국 주재원으로 보내기도 한다.
맞벌이 부부라면 무척 곤란한 일이다.
한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거나 장기간 따로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런 피해는 거의 모두 여성의 몫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은 이중적 고용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근무지를 선택할 수 없는 대신에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고 승진의 기회가 높은 것과,
근무지 선택의 자유를 보장 받는 대신 월급이 적고 승진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중적 고용 체계.
능력 있는 사람은 분명히 근무지 선택의 자유를 반납하는 대신, 월급도 많이 받고 출세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을 원할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맞벌이를 원하는 사람은 근무지 선택의 자유를 얻으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월급은 적지만 둘이 합치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고,
어디로 발령 날지 걱정하지 않으면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숭고한 일이라고 떠들어봐야 회사 입장에선 귀찮은 일에 불과하다.
언제 출산휴가를 낼지 모르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은 그 어떤 이유를 대건 사회 생활에 핸디캡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임신과 출산의 사회적 의의 운운할 필요가 없다.
부인이 출산하면 남편도 자동적으로 휴가를 보내는 것이다.
만약 이 기간에도 일을 시키는 회사가 있다면 벌금 1억 정도를 물린다.
이렇게 된다면 결혼, 임심, 출산, 육아로 인해 여성이 회사에서 차별대우 받는 것이 줄어들 것이며,
특별히 남자를 선호할 아유가 많이 없어질 것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옆에서 같이 보고 달래주고 안아주어야 애정이 생긴다.
우리 아버지들이 자식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것은 아이가 가장 귀워웠을 때,
회사일에 바빠 아이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부인이 출산했을 때 법으로 3개월 정도 쉬게 하면 우리 가족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을까.
21세기에는 남녀가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은 이상적인 하나의 틀을 만들어 놓고
모든 사람을 끼워 넣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가능성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고 각각의 삶의 형태에 우열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p273)
※ 이 글은 <나는 솔직하게 살고 싶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지룡 - 나는 솔직하게 살고 싶다
명진출판사 - 1999. 07. 15.
남힌산성 [t-23.10.26. 231001-1143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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