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영 - 책만 보는 바보」
나는 책만 보는 바보
햇살과 함께하는 감미로운 책읽기는,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스무 살 무렵, 내가 살던 집은 몸시 작고 내가 쓰던 방은 더욱 작았다.
그래도 동쪽, 남쪽, 서쪽으로 창이 나 있어 오래도록 넉넉하게 해가 들었다.
어려운 살림에 등잔 기름 걱정을 덜해도 되니 다행스럽기도 했다.
나는 온종일 그 방 안에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상을 옮겨 가며 책을 보았다.
동쪽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어느새 고개를 돌려 벽을 향하면 펼쳐 놓은 책장에는 설핏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책 속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면 얼른 남쪽 창가로 책상을 옮겨 놓았다.
그러면 다시 얼굴 가득 햇살을 담은 책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었다.
날이 저물어 갈 때면, 해님도 아쉬운지 서쪽 창가에서 오래오래 햇살을 길게 비껴 주었다.
햇살이 환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신기하기도 했다.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책 한 권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가로 한 뼘 남짓, 세로 두 뼘가량, 두께는 엄지손가락의 절반쯤이나 될까.
그러나 일단 책을 펼치고 보면, 그 속에 담긴 세상은 끝도 없이 넓고 아득했다.
넘실넘실 바다를 건너고 굽이굽이 산맥을 넘는 기분이었다.
책과 책을 펼쳐 든 내가,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얼마쯤 될까.
기껏해야 내 앉은키를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책과 내 마음이 오가고 있는 공간은,
온 우주를 다 담고 있다 할 만큼 드넓고도 신비로웠다
번쩍번쩍 섬광이 비치고 때로는 우르르 천둥소리가 들리는듯하였다.
하고한 날 좁은 방 안에 들어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날마다 책 속을 누비고 다니느라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때론 가슴 벅차기도 하고,
때론 숨 가쁘기도 하고, 때론 실제로 돌아다닌 것처럼 다리가 뻐근하기도 했다.
못 보던 책을 처음 보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덕무의 눈을 거치지 않고서야, 어찌 책이 책 구실을 하겠느냐" 며
귀한 책을 구해 자신이 보기 앞서 내게 먼저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책표지만 바라보아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좀처럼 옷을 일이 없는 생활인지라,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던 집안 식구들도 나중에는 으레 귀한 책을 얻어서 그러려니 생각하였다.
누가 일러 주고 깨우쳐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책을 읽었기에,
막히는 구절이 나오면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얼굴은 먹빛처럼 어두워지고 앓는 사람마냥 끙끙대는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뜻을 깨치기라도 하면,
나는 벌떡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크게 고함을 질렀다.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깨친 내용을 몇 번이고 웅얼거렸다.
눈앞에 누가 있는 양 큰 소리로 일러 주며 웃기도 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집안 식구들도 나중에는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혼자 실없이 웃거나 끙끙대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책만 들여다보는 날도 많았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간서치 看書痴'라고 놀렸다.
어딘가 모자라는, 책만 보는 바보라는 말이다.
나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p22)
※ 이 글은 <책만 보는 바보>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안소영 - 책만 보는 바보
보림 - 2005. 11. 04.
[t-23.08.27. 230825-17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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