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웅빈 - 관포지교」
두 청년
위수에 홀로 앉은 저 어옹
바늘 없는 낚싯대로 무엇을 낚으려나
백 년 묵은 잉어도, 천년 묵은 이무기도 아니라네
태평천하 이룰 문왕을 기다린다네
낭랑한 노래 소리가 산골짜기를 울려 펴져 길게 여운을 남긴다.
노랫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던 포숙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날렸다.
"저 친구 배짱 하나는 알아 주어야 겠군. 피신해 있는 처지에 한가하게 노래나 부르고 있으니.....,"
때는 한 여름철이었다.
때 아닌 노래 소리에 놀라 멈추었던 매미 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울려 펴졌다.
포숙은 흘려내리는 땀방울을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니 평평한 들판이 나타났다.
풀밭가에 나무꾼이나 사냥꾼이 쉬어 가는 허름한 초옥이 한 채 있었고,
초옥 옆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해를 가리고 있었다.
소나무 밑에 한 청년이 팔베개를 하고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포숙은 다시 한번 피식 웃음을 날리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강태공은 여기 계신데 문왕은 언제 오시려나?" 누워 있던 청년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 왔는가? 용케 찾아왔군. 이리 앉게."
포숙은 권하는 대로 풀밭에 주저앉았다.
소나무 그늘이라 시원하기 그지 없엇다.
바람이 쏴아 불어 삽시간에 땀을 말려버렸다.
"어, 시원하다. 이거 신선이 따로 없군. 그래, 얼굴도 좋아졌고....,"
포숙은 앞가슴을 풀어 해쳐 바람을 맞으며, 상대를 바라 보았다.
관중은 열쪅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턱수염을 매만졌다.
"나무꾼 부부가 수발을 들어줘 불편한 것은 없네."
"공연히 나만 안달복달했었군.' 내가 얼마나 자네를 찾았는지 아나?"왔다.
"미안허이. 그래서 나무꾼을 통해 소식을 전한 게 아닌가."
나이 이제 스물인데 벌써 구레나룻이 시커멓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입매, 큼직한 귀, 상대방을 위압하는 부리부리한 눈망울은 예전과 마찬가지다.
"이 친구하고 나하고는 전생에 어떤 업보를 타고 만났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듯 나를 골탕 먹일 수 있겠는가."
포숙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관중을 돕는 것이 어쩌면 자기의 숙명일 것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관중과 포숙은 태어난 해도 같고 고향도 같은 영상 출신으로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집에서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자라났었다.
지금의 안후이 성 서부에 있는 영상은 춘추시대에도 상업도시로 번성하던 곳이었다.
관중과 포숙 집안은 영상에서 대대로 살면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두 집안 모두 이곳에서 유명한 건어물상을 했지만 포숙네는 도매상을 관중네는 소매상이었다.
자연히 포숙은 유족하였고 관중은 입에 풀칠 정도나 하는 형편이었다.
관중이 열 살 무렵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과부가 된 어머니가 점포를 하며 외아들 관중을 키웠다.
18세가 되자 관중이 직접 장사에 뛰어들어 건어물을 이웃나라에 팔고,
그곳 특산물을 사다 파는, 당시로는 큰 모험에 속하는 무역업을 시작 큰 자본이 필요했다.
"나와 함께 장사하세, 자본을 좀 대게나." 관중은 포숙을 꼬였으나 신중한 포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그게 잘 될까? 경험이 풍부한 장사꾼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나만 믿으라고. 그동안 철저히 연구했으니까. 왜, 자본금을 떼 먹힐까 봐 걱정되나?"
"아니, 그건 아닐세."
친구의 부탁을 거절해 본 적이 없는 포숙은 결국 자본을 댔다.
처음에는 장사가 제법 쏠쏠했다.
그 이익금의 대부분을 관중이 가져갔다.
포숙을 좋아하는 종업원이 불평을 했다.
"포 서방님, 이거 되겠습니까?"
"무얼?"
조혼이 관습인 시대, 더구나 대 상인의 자제인 포숙인지라 일찍 장가를 들어 아이가 둘이었다.
장사 맛에 흠뻑 빠진 관중은 아직 장가를 들지 못했다.
포숙이 큰 눈을 껌벅거리며 바라보자 종업원은 입에서 침을 튕겼다.
"아 글쎄, 관 도련님이 이익금을 몽땅 가져가시니 이래도 되는 겁니까?"
"난 또 뭐라구, 관중은 홀 어머니를 모시고 있지 않나?
거기다 이번 장사에 자본을 대려고 이곳 저곳에 빚을 지고 있으니 그걸 갚아야 할 것 아닌가."
"원 참! 서방님도.... 아, 자본이야 서방님이 거의 다 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일도 서방님이 다 하셨지 관 도련님이 무얼 하셨습니까?
그저 술이나 마시며 산천 구경이나 하시지 않았습니까?"
나이 젊은 종업원 녀석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가슴까지 탕탕 쳤다.
그래도 포숙은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핫핫핫.... 대붕의 뜻을 연작이 어찌 알리오.
관중은 내 하나 밖에 없는 친구이니 너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아라."
포숙은 도리어 종업원에게 입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잘 나가는 듯 싶었던 건어물 무역은 불과 석 달도 못가 폭삭 망했다.
당시의 시대 상황 탓이었다.
강력했던 주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수백의 제후들이 서로 으르렁대는 시대였다.
법보다 주먹이 강한 때이니 사방에 도적떼가 득실거렸다.
관중과 포숙의 무역업은 도적떼에게 몇 번 털리고 나니 빈 껍데기만 남았다.
게다가 이곳 저곳에 설치된 국경 관문 초소에 바치는 출입세에 금지 품목이다 하여 압수 당하는 물품,
관리에게 뜯기는 뇌물 등으로 본전은 커녕 빚만 잔뜩 지고 넘어지고 말았다.
이 빚도 포숙의 몫이었다.
울화가 치민 다고 관중은 술타령만 하고 있으니 포숙은 호통치는 아버지를 졸라 빚을 청산하였다.
"다시 그 놈과 어울렸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테니 알아서 혀!"
아버지의 불호령이 있었지만 포숙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두 친구는 그 이후에도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관중으로서는 포숙 없이는 한 발자국도 운신할 형편이 못 되었다.
"넌, 장사꾼이 될 소질이 없으니 공부나 혀.
공부해서 관리가 되는 것이 제일이여, 이 녀석아.
그만 술 좀 작작 퍼마시고 책이나 열심히 읽어, 이 어미가 어떻게든 네 입 하나 건사하지 못할까."
이러면서 관중의 어머니는 용돈을 딱 끊어버렸다.
그러나 관중의 용돈은 자연히 포숙의 책임이었다.
관중은 어느 반점에 들어가든 먹고 마시고 그냥 일어서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중 석 달 전에 사건이 터졌다.
관중이 탈영이라는 중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지방 토호들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사사건건 으르렁거리며 싸움이 잦았었다.
그 싸움이 점점 커지자 동원령이 내려졌고 관중과 포숙도 징집이 되었다.
포숙은 대상인의 아들이라, 지금으로 치면 중대장에 임명되고,
소상인의 신분인 관중은 소졸로 떨어질 뻔 했으나 포숙의 덕분에 소대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관중은 불만이 많았다.
"이런 무의미한 전쟁에 내가 낄 필요가 없지.
내가 왜 멍청한 놈들의 전쟁 놀음에 끼어들어 목숨을 걸어야 하지?
이런데 걸 만치 내 목숨이 하찮은 것이 아닐세. 나는 원대한 꿈에 내 목숨을 걸겠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관중이 탈영을 했고 포숙은 친구를 위해 극구 변명하기에 바빴다.
"관중에게는 홀어머니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홀어머니가 급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앞뒤 가리지 않고 탈영한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면 반드시 귀대할 것입니다. 제 목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음, 관중이란 놈이 그토록 효자란 말인가? 돌아온다면 용서해 주지."
포숙의 상관인 고우에게 호소했고 고우는 염소 수염을 배배 꼬며 머리를 끄덕였다.
공자가 태어나기 전의 시대였다.
하지만 이때도 효를 사람이 지켜야 할 예의 규범의 첫 번째로 강조했다.
당시의 인심은 효에 중점을 두었으니 포숙의 변명 덕에 관중의 수배령은 취소되었다.
거의 동시에 쌍방의 전투태세도 해제되었다.
군역에서 풀려난 포숙은 당연히 관중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관중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관중이 보낸 나무꾼이 포숙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포숙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자네에게 내린 수배령도 취소되었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가세.
아무도 자네를 붙잡거나 탓할 사람은 없네."
"그까짓 일로 내가 집에 못 갈 줄 알았나? 나는 여기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있다네."
하면서 관중은 무릎 옆에 놓인 죽편을 두드렸다.
손때가 반들반들하게 묻은 그 죽편은 포숙도 익히 알고 있는 '육도六稻'였다.
죽편이란 옛날 책을 말한다.
옛날 종이가 없을 때에는 대나무를 납작하게 깎아 옻칠로 글자를 써서, 질긴 가죽끈으로 엮어 책을 만들었다.
이것을 읽지 않을 때에는 발처럼 말아 두었다.
그리고 이 책이 상-중-하 세 편이 있다면, 이것을 권일-권이-권삼 이라고 한 것이다.
죽편에 눈길을 보내던 포숙이 빙그레 웃었다.
"가죽끈이 새 것인 걸 보니 또 새로 엮은 모양일세."
"음, 이번이 네 번째일세."
"그토록 읽었으니 달달 외우고도 남겠네."
포숙은 대견하다는 듯이 관중을 그윽이 바라본다.
가죽끈을 네 번이나 다시 바꿀 정도로 책을 읽었다면 보통 정성이 아니다.
'육도'는 문왕 - 무왕을 보필해 주왕조를 일으킨 강태공의 저서로
특히 제나라에서는 국조께서 지은 것이라 하여 뜻있는 자들의 필독서였다.
하여간 이 '육도'를 관중은 자나 께나 끼고 있을 만큼 손에서 놓지 않았음을 고향에서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었다.
"육도는 어려워서 난 겨우 한 번밖에 못 읽었네."
"육도에 정통하면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에 훤히 뚫릴 걸세.
그러나 워낙 어려워 나 역시 겨우 반 분쯤 이해한다고나 할까....,"
관중의 어조가 갑자기 풀이 죽었다.
포숙은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 하다가 문득 "육도' 밑에 삐죽이 나와 있는 한 개의 죽편에 시선이 갔다.
"그건 뭔가?"
"이건 내가 심심풀이 삼아 적어 본 것일세."
"어디 좀 보세나."
관중이 내민 한 개의 죽편에는 눈에 익은 관중의 글씨가 반쯤 쓰여 있었다.
포숙은 빨려들 듯이 글을 읽어 내려갔다.
제목은 '목민牧民'이었다.
관중이 쓴 글을 다 읽고 죽편을 내려놓는 포숙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관중을 바라보는 눈초리도 전과 같지가 않았다.
"자네 흉중엔 정말로 태공망의 지혜가 들어 있었구먼."
"내 감히 어떻게 태공망 어른을 입에 담을 수 있겠나.
다만 그 분의 우국충정을 백분의 일이나마 따라잡을 수 있다면 원이 없겠네."
"아니, 자네는 꼭 국가의 동량이 될 걸세. 내 자네를 힘껏 돕겠네."
"고마우이.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말해 보게나."
"미안하지만 어머니를 얼마 동안 자네에게 부탁해야겠네."
".....,"
"자네가 내 대신 어머님을 지금까지 모시고 있었으니 염치가 없네.
하지만 자네 말고 또 누가 있겠나?"
포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자당이야 아직 정정하시니 별 걱정은 없네만..... 임치로 갈 작정인가?"
"음....,"
관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치는 제나라의 서울로 당시 중국의 최대 도시라 할 수 있었다.
"알겠네. 집 걱정은 말고 다녀 오게나.
큰 뜻을 품은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지.
또 누가 아나? 임치에서 문왕 같은 인물을 만날지..... 핫핫핫....,"
"핫핫핫...., 고맙네, 고마워....., "
두 사람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졌다.
해는 벌써 뉘엿뉘엿 저물어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p27)
※ 이 글은 <관포지교>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최웅빈 - 관포지교
선비 - 1991. 09. 01.
[t-23.08.09. 220817-1745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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