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 시집 -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엄마의 통장
김상미
엄마의 통장을 어떻게 하나?
내 통장 상자에 아직도 들어 있는 엄마의 통장
이제는 쓸 수 없으니 버려야 하는데
객지에 사는 딸이 매달 부쳐주는 용돈을
딸이 보내는 반가운 편지인 듯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돌아가시면서 건네주시던 그 통장
그 통장의 돈을 형제들과 똑같이 나누면서 펑펑 울었던
아, 우리 엄마의 통장
그 내리사랑을 어떻게 하나?
이제는 훨훨 태워 자유롭게 보내드려야 하는데
아끼고 아껴서 자식에게 되돌려줄 기쁨에
불어나는 통장 액수만큼 몇 배로 검소하셨을 우리 엄마
그 착한 통장을 어떻게 버리나?
일거리가 없는 달엔 하루 한 끼만 먹고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엄마의 용돈
그 용돈 보내는 재미로 힘내며 힘차게 살았는데
이제는 그 재미 사라진 지도 어느덧 십여 년
은행에 가기 위해 통장을 꺼내는데
그 아래에서 삐죽 고개 내밀며 활짝 웃는 엄마의 통장
나도 모르게 엄마, 은행 다녀올게!
꾸벅 인사하는 나
아직도 엄마의 손길, 엄마 냄새 가득한
착하디착한 그 통장을 어떻게 버리나?
창밖엔 엄마가 그리도 좋아하던 수국이 한창인데
나는 그 수국조차 엄마가 남긴 그리운 유품 같아
눈시울이 자꾸만 붉어지고 붉어지는데
시인의 말
다섯번째 시집을 묶는다. 내 시가 꼭 오늘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몇백 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라 해도
설사 시가 아니라 해도 삐뚤삐뚤, 비틀비틀, 넘어지고, 엎어지면서도 나는 계속 시를 써왔다. 아무도, 아무것도 아닌
내가 한 편의 시로 다시 태어날 때마다 나는 내 시 안에 뿌리내린 세상이, 사람들이, 사물들이 너무나 고맙고 행복했다.
문학이라는 그 사나운 팔자가.
- 2022년
문학동네시인선 183
김상미 시집 -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 2022. 12. 02.
[t-23.09.08. 230901-1625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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