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 「해변의 카프카 」
까마귀 소년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나서 손가락 끝으로 양쪽 눈꺼풀을 누른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 어둠 속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늘 하던 게임을 하자." 라고 그는 말한다.
"좋아." 하고 나는 말한다. 나도 그와 같이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크게 쉰다.
"내 말 잘 들어, 엄청나게 지독한 모래 폭풍을 상상해 봐." 하고 그가 말한다.
"다른 모든 일은 모두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야."
그가 시키는 대로, 엄청나게 지독한 모래 폭풍을 상상한다.
다른 일은 모두 완전히 잊어버린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내 속은 텅빈 것 같다.
모래 폭풍이 곧 머리에 떠오른다.
늘 그랬듯이 나와 까마귀 소년은 아버지 서재의 낡은 가죽 소파 위에서 그 모래 폭풍울 함께 상상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운명이란 끊임없이 진행하는,
방향을 바꿔가며 어느 특정한 지점에 집중되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하고 까마귀 소년은 나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료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듯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시 또 모래 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네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또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 뿐이야.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조차 없어.
거기에는 백골을 분쇄해 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런 모래폭풍을 상상하란 말야."
나는 그런 모래 폭풍을 상상한다.
하얀 회오리바람이 하늘을 향해 굵은 동아줄처럼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고 있다.
나는 두 손으로 눈과 귀를 꽉 틀어 막는다. 몸 안으로 그 고운 모래가 들어오지 못하게.
그 모래 폭풍은 이쪽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자꾸자꾸 다가온다.
나는 그 폭풍의 압력을 멀리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이제 막 나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다.
이윽고 까마귀 소년이 내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는다. 그러자 모래폭풍은 사라진다.
나는 아직도 눈을 감고 있다.
"넌 지금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되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터프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네 스스로 이해해야만 하는 거다,
알겠지?"
나는 그냥 잠자코 있다.
까마귀 소년의 손의 감촉을 어깨 위에 느끼면서 이대로 천천히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넌 지금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된다."
하고 까마귀 소년이 잠들려고 하는 내 귀가에 조용히 속삭인다.
내 마음에 짙은 남색 글자로 한 땀 한 땀 문신을 새겨 넣듯이.
"그리고 물론 너는 실제로 그놈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될 거야.
그 맹렬한 모래 폭풍으로부터. 형이상학적이고 상징적인 모래 폭풍을 뚫고 나가야 하는 거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놈은 천 개의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네 생살을 찢게 될 거야.
몇몇 사람들이 그래서 피를 흘리고, 너 자신도 별수 없이 피를 흘리게 될 거야.
뜨겁고 새빨간 피를 너는 두손으로 받게 될 거야.
그것은 네 피이고 다른 사람들의 피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 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 거야.” (p19)
※ 이 글은 <해변의 카프카 (상)>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무라카미 하루키 - 해변의 카프카(상)
역자 - 김춘미
문학사상사 - 2010. 08.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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