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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폴 오스터 - 달의 궁전

by 탄천사랑 2022. 7. 2.

폴 오스터 - 「달의 궁전

 

 

내 가족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다.
등장 인물도 많지 않았고, 그들 중 대부분은 이 세상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열한 살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으므로 어머니와 나, 단 둘 뿐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곧 어머니마저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보스턴의 어느 거리에서 빙판에 미끄러진 버스에 치인 것이었다.
어머니가 처녀 때의 성을 계속 썼다는 사실로 보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 내가 사생아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린아이였던 나로서는 그런 일에 대해서 물어 볼 생각 따윈 떠오르지도 않았다.

나는 마르코 포그였고, 어머니는 에밀리 포그, 그리고 시카고에 있는 외삼촌은 빅터 포그였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포그였지만, 내게는 한 집안 사람들의 성이 모두 같다는 게 의당 그래야 하는 일로 보였다.
나중에 나는 빅터 삼촌에게는 외할아버지의 성이 원래는 포겔만이었지만 
엘리스 섬에 있던 이민국의 어떤 직원이 안개라는 뜻을 지니 포그(fog)로 줄였고,
1907년에 g가 하나 더 붙기까지는 그것이 성으로 쓰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외삼촌이 내게 알려준 대로라면 포겔은 새라는 뜻이었는데, 나는 내 이름자에 새가 들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내 조상들 중에서 누군가 뛰어난 사람은 살제로 날 수 있었을 거라는 상상도 해보았다,
나는 늘 안개를 헤치고 나는 새, 미국에 이를 때까지 쉬지 않고 대양을 가로질러 나는 거대한 새를 생각하곤 했다.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사진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아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의 눈으로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늘 어린아이처럼 가느다란 손목과 가날픈 흰 손가락에 
짧고 검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면 나는 불현듯, 그리고 너무도 자주, 그 손길이 얼마나 기분좋게 느껴졌는지를 기억할 수 있다.
내 눈앞에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은 언제나 젊고 예쁜데, 

어머니가 사망했을 당시 스물아홉 살 밖에 안되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그것이 정확한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보스턴과 케임브리지에 있는 여러 곳의 조그만 아파트들로 이사를 다니며 살았고,
어머니는 교과서를 만드는 회사 같은 곳에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거기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내가 너무 어렸던 탓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게 가장 분명히 떠오르는 기억은 우리가 몇 번인가 함께 영화

(랜돌프 스코트의 서부 영화들- 세계의 전쟁, 피노키오)를  보러 가서 어두컴컴한 극장에 앉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내 봉지에 든 팝콘을 먹으면서 손을 잡고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는 내가 배를 잡고 웃을 만큼 재미있는 농담을 할 줄 알았지만 
그런 일은 아주 드물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때에만 생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체로는 울적한 기분에 잠겨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일 떄가 많았는데,
나는 때때로 어머니가 진정한 슬품, 뭔가 거대하고 내적인 혼란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커갈수록 어머니는 나를 애 보는 여자와 함께 집에 남겨 두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지만 나는 훨씬 더 뒤에까지,
그러니까 어머니가 죽고 나서 한참 뒤에까지도 그 수수깨끼 같은 외출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도, 또 그 이후로도 완전한 공백이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지 않은 단 한가지 주제였고,
내가 그 질문을 할 때마다 어머니는 늘 똑 같은 대답이었다.

"네 아빠는 오래 전에 죽었어.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집안 어디에도 아버지의 흔적은 없었다.
단 한 장의 사진도, 심지어는 이름조차도, 나는 뭔가 매달릴 것을 갖고 싶어서 아버지를 검은 머리칼의 벅 로저스, 
4차원 세계로  들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한 우주 비행사로 상상하곤 했다.

어머니는 웨스트론 묘지의 외조부모 옆에 묻혔고, 나는 시카고 북부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처음 살게 되었던 때의 기억은 대부분 흐릿해졌지만, 

나는 틀림없이 꽤나 여러 날 동안 맥없이 돌아다니고,
훌쩍거릴 만큼 훌쩍거리고,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애처로운 고아 주인공처럼 밤이면 흐느꺼 울다가 잠이 들었을 것이다. 
한번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외삼촌이 알고 있던 좀 모자라는 여자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며 울기 시작하더니
내가 가엾은 에이미의 사생아인 모양이라느니 뭐니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전에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그 말에 뭔가 끔찍하고 불행한 의미가 배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외삼촌에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해 달라고 하자, 

그는 내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대답을 꾸며 냈다.

"아이들은 모두 사생아란다.
  하지만 제일 착한 아이들만이 그렇게 불리지."

어머니의 오빠는 클라리넷 연주자로 삶을 꾸러가고 있던, 

호리호리한 몸집에 메부리 코를 한 마흔 세 살 된 독신 남자였다.
포그 집안 사람들이 다 그렇듯, 그에게도 뚜렸한 목적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면서 공상에 잠기고,
벼락같이 화를 내고, 한참씩 무기력에 빠져드는 기질이 있었다.
그래서 외삼촌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장래성 있는 출발을 했으면서도 
그런 기질을 극복하지 못한 탓에 마침내는 인생을 망치고야 말았다.

그는 리허설 있는 날 늦잠을 잤고, 넥타이도 매지 않은 채 공연장에 나타났고,
언젠가는 무모하게도 불가리아 인 콘서트마스터가 듣는 앞에서 고약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 악단에서 해고를 당한 뒤 빅터 삼촌은 차츰차츰 더 시시한, 
한 번씩 옮겨갈 때마다 조금씩 더 시원찮은 몇 군데의 악단을 진전했고, 
1953년에 시카고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자기의 경력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었다.

1958년 2월 내가 그의 집으로 옮겨 갔을 때 
그는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렛슨을 하는 한편 하위 던의 문라이트 무즈(Moonlight Moods) 
- 결혼식, 견진성사(堅振聖事), 졸업파티 같은 곳들을 돌아다니는 소규모 캄보밴드 - 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외삼촌은 자기에게 야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 음악 이외의 다른 것들도 있다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들이 너무 많아서 때로는 그런 것들에 치일 지경이었다.
그는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늘 다른 생각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곡을 연습하려고 자리에 앉았다가도 머릿속에 떠오른 체스 문제를 풀려고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고, 
체스를 하다가 시카고 컵스의 실책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야구 경기를 관람하다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어떤 대수롭지 않은 인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채 20분도 안 되어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 있건 또는 어디로 가건 항상 말을 잘못 옮긴 체스며, 
작성하다 그만둔 박스 스코어며, 
반쯤 읽다 만 책 같은 것으로 혼란스러운 흔적을 남기곤 했다.

​그렇더라도 나는 외삼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함게 살던 때에 비한다면 음식도 더 나빠졌고 우리가 사는 아파트도 더 옹색했지만, 
그런 것들은 결국 사소한 문제였다. 
외삼촌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인 척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아버지 노릇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를 자식이라기보다는 친구,
애지중지하는 어린 벗으로 대했다.  그것은 우리 둘 모두에게 알맞은 조치였다.
내가 외삼촌 집에서 살게된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우리는 마음에 다른 나라들,
자연의 법칙을 뒤엎어 버리는 상상의 세계를 고안해 내는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현실 세계가 우리 둘 모두에게 강요한 어려움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가능한 한 자주 현실로부터 도피를 하고 싶어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p12)
이 글은 <달의 궁전>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입니다.



폴 오스터 - 달의 궁전
역자 - 황보석
열린책들 - 2008.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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