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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나무/말없는 친구(하)

by 탄천사랑 2022. 7. 4.

(단편집)베르나르 베르베르 - 「나무

 

 

3주일 후, 
두 경찰관이 마리 나타샤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녀의 손목에는 크롬강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사복형사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뭘 하려는 거죠?"
"시체를 발견한 곳이 여기야.
 이 여자는 <검은 암늑대들>의 일원이었고 동료 두 명을 살해했다는 협의를 받고 있어.
 여기에 그 혐의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지 않을까 해서 온 거야."

마리 나타샤는 두 경찰관을 경멸하듯이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나는 죄가 없어요."
"다이아몬드를 훔친 건 죄가 아니야? 
 훔치려면 다른 걸 훔쳐야지.
 다이아몬드는 목록이 작성되기 때문에 훔쳐 봐야 되팔지를 못해.
 그런데 여자들은 왜 그렇게 다이아몬드에 홀리는 거지?  
 여자와 다이아몬드의 관계를 연구해 보면 재미있을 거야. 
 안 그런가?"
"아마 다이아몬드의 순수성과 관계가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찾는 게 정확히 뭐죠?"
"증거가 될 만한 것이면 뭐든지.  
 덤블 속을 잘 뒤져 보게."   마리 나타샤가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며 말했다.
"찾아봐야 아무것도 나올 게 없을걸요."   

 

저 여자야, 저 여자가 살인지야.
내가 저들을 도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슨 방법이 없을까.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4륜 구동의 소형 화물차였다.
사복형사는 마음이 놓인다는 듯한 표정을 지였다.

"드디어 왔군.  
 우리를 도와줄 사람들일세."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한 사람은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뚱뚱한 남자였다.
통통한 얼굴에 작은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그들 쪽으로 다가오던 그가 마리 나타샤를 알아보고 짧게 인사말을 건넨다.

"안녕, 
 마리 나타샤."   그녀는 대답 대신 턱짓을 해보였다.

과학부 기자 이지도르가 함께 온 갈색 머리 여자를 경찰관들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실비아 페레로 박사였다.   
간단한 수인사가 끝나자 이지도르가 말했다.

"먼저 우리가 가져온 장비를 차에서 내려야 하니까,  
 도와주십시오."

경찰관들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마리 나타샤의 한쪽 손은 풀어 주고 다른 손은 나무의 굵다란 뿌리에 수갑으로 묶어 놓았다.

이지도르와 페레로 박사는 경찰관들의 도움을 받아 탁자를 설치하고 
그 위에 몇 가지 전자 기구들을 올려놓았다.
다수의 눈금판이 붙어 있는 그 기구들에 휴대용 컴퓨터가 연결되었다.
커다란 배터리가 그 복잡한 장비들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해 주고 있었다.

"이 잡동사니는 다 뭐예요?"  마리 나타샤가 묻자, 이지도르가 대답했다.
"검류계야. 
 정서 상태에 따라 일어나는 생리적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야.
 어떤 사람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
"나에게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마리 나타샤가 다시 물어보았다.  
전혀 당황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너에게 사용할 게 아니고,  저 친구에게 사용할거야."

이지도르가 그녀 뒤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모두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굴곡이 심한 실루엣이 하나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이리저리 비틀린 오래된 나무 한 그루.
가지들은 복잡한 요가 자세를 취한 채 꼼짝 않고 있는 듯했고,  
잎들은 바람의 어루만짐에 살랑살랑 화답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땅가죽 위로 솟아오른 굵고 긴 뿌리는 굳견하게 줄기를 떠받치고 있었다.

줄기늬 남쪽 면에는 연회색 바탕에 검은색과 황토색의 줄무늬가 들어가 있었고,
햇살을 덜 받은 북쪽 면에는 이끼들이 피부병처럼 퍼져 있었다.
나무껍질에는 옹두리와 상처가 수두룩하였다.

다람쥐 한 마리가 사람들의 눈길이 자기 쪽으로 쏠리고 있음을 느끼고 
우듬지 쪽으로 달아나 잔가지와 넓은 잎사귀들 사이에 숨었다.
박새 한 마리도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제 둥지에 있는 알들을 빼앗아 갈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이제 박새의 알을 먹지 않는데도, 
그것을 알 리 없는 박새는 나뭇잎 사이에서 부동자세로 파수를 서고 있었다. 

 


오늘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날이다.



실비아 페레로는 아주 조심스럽게 나무껍질 속에 집게들을 꽃았다.
끄트머리가 금속으로 되어 있는 그 집게들은 전선으로 검류계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지도르가 두 경찰관에게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내 친구 중에 제라르 로젠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텔아비브 대학 교수이고 관개灌槪와 사막화 저지 사업과 식물 행동 연구의 전문가죠.
그가 1984년에 식물이 외부 즈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했습니다.
나무 껍질에 전극을 꽂은 다음, 
전기 저향의 아주 미세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검류계에 이 전극을 연결했죠.
그럼으로써 그는 외부의 자극이 나무들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타오르는 가시덤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 생각하고 있죠.
<말하는 가시덤불>에 대한 비유라는 겁니다.
처음에 그가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꽃이예요.
꽃에게 하드록에서 클래식까지 여러 종류의 음악을 들려주었죠.
그 실험을 통해 그가 확인한 것은 꽃들이 비발디를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었지요?"
"사람을 상대로 실험할 때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확인하는 겁니다.
우리는 휴식 상태에서 20을 최대치로 잡는다고 할 떄 10 정도의 전기 저항을 보입니다.
 마음이 아쥬 평온할 때는 그 수치가 5로 내려가고,
 흥분 상태가 되면 15 정도로 올라가죠.
 로젠 교수의 식물들은 음악이 마음에 들 때는 평온한 상태가 되어 계기의 바늘이 10 이하로 내려갔습니다.
 반대로 자극이 공격적일 때는 수치가 급등했죠.
 마치 화를 내면서 자극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맑이예요...,
 로젠 교수가 그다음에 생각한 것은 식물들을 온갖 종류의 다른 자극에 노출시켜 보는 것이었습니다.
 추위, 더위, 어둠, 텔레비전 등에 말입니다."
"텔레비전요?
 식물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요?"
"식물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주위 세계를 자각합니다.
 어느 날, 로젠 교수는 아카시아에 전극을 연결하고 
 어떤 자극을 보낼 준비를 하다가 무리한 동작을 하는 바람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친 것에 대해서 아카시아가 반응을 보이더랍니다.
 로젠 교수는 그 점을 분명히 확인하고 싶어서 다른 방식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아카시아 근처에서 고깃덩어리를 썰어 보았지요.
 나무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 고깃덩어리가 이미 죽은 것임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다음에는 꽃 한 송이를 액체 산소에 담가 보았습니다.
 나무는 반응을 보였고 계기의 바늘이 13으로 올라갔어요.
 이어서 로젠교수는 나무 근처에서 또 다른 식물을 끓는 물에 던져넣었습니다.
 바늘은 다시 14로 올라갔죠.
 효모를 끓는 물에 넣었을 떄는 12를 가리켰다고 합니다.
 아카시아가 효모의 죽음을 감지한 것이지요." 
"효모라고요!  
 그게 살아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로젠 교수는 나무 앞에서 면도날로 자기 살을 베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나무의 전기 저항이 즉시 12로 올라가더랍니다.
 인간의 세포가 죽는 것이든 효모가 뜨거운 물 속에서 죽는 것이든 
 나무를 자극하는 폭력행위이기는 마찬가지죠.
 제라르 로젠이 오늘 여기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렇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자기의 주요한 보조자인 실비아를 우리에게 보냈어요."

바람이 잔가지들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갑자기 공기가 약간 삽상해지고 있었다.

"이 나무는 범행을 목격했어요.
 나무 나름의 감각으로 살인을 지각했을 겁니다.
 이 나무는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죠. 
 우리가 하려는 일은 이 나무가 무언가를 말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건 역사적인 순간이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동물들이 나무 주위로 자꾸 왔다갔다 하면서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땅거죽 근처의 잔뿌리들을 짓이기고 있었다.

"결국 로젠 교수의 실험을 여기에서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애를 쓰실 만큼 이 사건이 특별한가요?"
"아나이스는 내 조카예요."

마리 나타샤가 법과대학에서 들었던 강의를 떠올리며 끼어들었다.

"피해자와 친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은 사건을 수사할 권리가 없어요.
 변호사를 만나게 해주세요."
"나는 수사관이 아니라 과학부 기자야.
 살인 사건에 관한 취재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자아, 계속합시다.
 실비아."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여자가 검류계의 눈금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현재 수치는 ---- 
 잠깐만요---- 
 평균보다 높은데요.  
 11이에요. 
 약간 흥분한 상태예요."
"이제부터 무얼 하는 거죠?"  사복형사가 물었다.
"증인을 신문해야죠."  

이지도르가 그렇게 대답하자 마리 나타샤가 빈정거렸다.

"그렇게 다루어서 나무가 말을 하겠어요? 
 고문을 해야죠.
 가지를 잘라 보세요.  
 그러면 말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아니면 잎을 태워 보든가."

10분 후,  
실비아는 나무껍질에 스피커를 붙여 놓고 하드록을 들려주었다.
에이시 디시의 <선더 스트릭>이었다.   
검류계의 바늘이 14로 올라갔다.
디발디의 <사계>를 들려주자 수치가 6으로 내려갔다.

"대단히 민감한 나무로군. 
 어쨌거나 우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건 분명해."

정복 경찰관은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세상에 나무가 증인이라니!
이지도르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나이스의 사진 한 장을 나무줄기에서 가장 많이 돌출한 옹두리 앞으로 가져갔다.
나무에 눈이 있다고 한다면 그 옹두리가 눈으로 여겨질 법했다.

"어때요?"  실비아는 기계의 몇몇 스위치를 조작해 보고 나서 말했다.
"11인데요."

이지도르는 경찰관들에게 부탁해서 마리 나타샤를 잠시 풀어 주게 한 다음,
그녀에게 나무껍찔을 만져 보라고 요구했다.

"변화가 있어요?"  실비아가 잠시 기다리다가 대답했다.
"여전히 11이예요."


안 돼. 
목표에 거의 도달했는데 여기서 실패하면 안 돼.
어떤 식으로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야 해.
내가 겪은 고통스러운 일들을 생각해 보자.
청딱다구리 한 마리가 나의 어린 가지를 쪼아 댄 일.
다람쥐 한 마리가 내 열매를 훔쳐 간 일.
폭풍이 몰아쳐 나를 휘청거리게 한 일.
나를 뒤흔들고 나의 많은 친구들을 뿌리째 뽑아 버린 1999년 12월의 어마어마한 폭풍!



"이건 아무래도 시간 낭비 같아요.
 그리고 왜 굳이 이 나무하고만 씨름하는 거죠?  
 주위에 다른 나무들도 많은데 말이예요."

정복 경찰관이 그렇게 지적하자 이지도르가 되받았다.

"이 나무는 시체가 발견된 빈터 바로 앞에 있거든요.
 내가 보기엔 이 나무가 알고 있어요.  
 이 나무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만 찾아내면 돼요.
 우리가 외계인을 만나서 대화를 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대화가 가능하려면 그들의 의사소통 방식을 알아애야 하죠.  
 나무와 소통하는 것도 그와 비슷해요."
"하지만 이건 식물이예요. 
 입도 없고, 귀도 없어요.
 외계인하고는 다르죠. 
 외계인에게는 입과 귀가 있을 테니까요." 
"내가 곧 대화를 시돟해 볼 겁니다."

마리 나타샤가 다시 빈정거렸다.

"갈수록 가관이네요.
 이렇게 재미있는 구경은 돈을 주고도 못 할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일부려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다.
이지도르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나무야,
 저 여자를 알아보겠니?"


알아보고말고, 그래, 바로 저 여자가 범인이야.


그들은 대답을 기다렸다.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샤를로트도 죽였어.
다이아몬드를 혼자서 다 가지려고 그런 짓을 했어.
모든 게 다이아몬드 때문에 생긴 일이야.
마치 광물이 무슨 저주라도 내린 것처럼 그런 일이 벌어졌어.


"여전히 11이예요.
 이 사건과 관련해서 알려줄 게 없는 모양이예요."

이지도르는 아나이스가 쓰던 물건들을 나무 가까이에 가져갔다.
모두 아나이스의 향수 냄새가 아직 배어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러지 말고 다이아몬드들을 상대로 직접 신문해 보지 그래요?
 다이아몬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마리 나타샤는 더욱 기가 살아서 그들을 마음껏 비웃어 댔다.

네 사람은 낭패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웃음거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리 나타샤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깔깔거리고 있었다.
사복형사는 그쯤에서 일을 끝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지도르, 
 미안하지만 이 실험에서는 얻을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시도를 했다는 것으로 만족합시다.
 아가씨는 뭐가 좋다고 그렇게 깔깔거리는 거야?
 이 시도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키는 게 당신 신상에도 좋을걸."
"나한테는 그게 아무에게나 마구 떠들고 다니라는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좋아요.  
 그런 거라면 날 믿어도 돼요.  
 아예 기자 회견을 한번 하죠. 
 뭐. 일주일쯤 지나면 살인 사건을 처리하는 이 새로운 방법을 온 국민이 다 알게 될걸요.
 나무의 증인이라니. 
 하하!"
 
형사는 홧김에 나무를 걷어찼다.  
그러자 즉시 바늘이 13으로 올라갔다.

"나무가 반응을 보이는 건 분명하네요."   


저 빌어먹을 바늘을 움직일 수가 없어
이런 식으로는 안 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이지도르 말마따나 나의 의사소통 방식을 찾아내야 해.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
그게 뭘까?
나는 네 뿌리들을 자라게 해서 수분의 원천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어.
비록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절릴지언정 그건 내가 할 줄 아는 일이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또 뭐가 있지?
아무것도 없다.
아니, 한 가지 있다.
그게 나의 마지막 기회다.


그들은 장비를 차에 싣기 시작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꼭 해볼 필요가 있었던 일이야"   

형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어.
힘을 한데 모아서 단번에 센 힘을 내야 해.
자아, 힘을 모으자.
내 안에는 우주의 기氣가 흐르고 있고,
내 모든 기억과 내 모든 감각의 에너지가 펴져 있어.
이 모든 힘을 한데 모아 아나이스의 원수를 갚아야 해.

 


넓은 나뭇잎 하나.
잎몸에는 연한 빛깔의 잎맥이 그물처럼 뻗어 있고 이 잎맥들은 잎몸 가운데의 오목한 곳으로 모여든다.
이 넓은 잎사귀의 잎자루 내부에서 서서히 어떤 변화가 일고 있다.
수액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오, 아아이스, 이건 너를 위해 하는 일이야. 난 할 수 있어.


모두가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그 넓은 나뭇잎이 갑자기 떨어졌다.
나무잎이 떨어지면서 나무줄기에 뚫린 구멍 하나가 드러났다.
나뭇잎에 가려 이제껏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았던 깊숙한 구멍이다.

이지도르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무를 돌아보다가  
나뭇잎이 마치 느린 동작 화면에서처럼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눈을 깜박이고 자동차에 발을 올리려던 동작을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을 날던 새조차 날갯짓 소리를 내지 않았다.
숲 속의 동물들 역시 홀린 듯이 동작을 멈추었다.
뭔가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해냈어!


이지도르가 무어라고 한마디를 했다.
그 말 역시 음반이 저속으로 돌아갈 때처럼 입에서 느릿느릿 나왔다.

"잠 --- 깐 ---만---,"

이지도르는 아주 천천히 다가가 나무줄기의 구멍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래 됐어!

 


그는 가시랭이에 손가락을 찔려 가면서 더듬더듬 구멍속을 뒤졌다.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머리카락 뭉치 같았다.
꺼내어 보니 거뭇한 물질이 묻어 있는 금발 뭉치였다.

"노란 머리털에 피가 말라붙어 있는데요!"   

마리 나타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지도르는 머리털 뭉치를 가져와서 마리 나타샤의 머리에 가까이 대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이 머리카락이 우리 아가씨 것인지 아닌지는 법의학자가 밝혀 낼 겁니다.
 아울러 나무에 뚫린 커다란 구멍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도 알아내겠지요.
 내가 보기엔 바닥에 다이아몬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지도르는 자기 손가락 끝에서 반짝이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천천히 살폈다.
다른 사람들도 다가가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형사는 구멍에서 긁어모은 것들을 비단 손수건에 쌌다.


나는 비단이 좋다. 
비단은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로 짠 천이고 누에는 뽕잎을 먹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안다기보다 느낀다. 
나는 마치 바람이 전해 주는 정보를 감지하듯이 존재들간의 관계를 지각한다.
나는 귀가 없어도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 
아니, 어쩌면 내 껍질 전체가 하나의 민감한 고막일지도 모른다.



마리 나타샤는 너무 놀라서 입을 벌렸다.  
자기가 방금 본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지도르는 나무에 뚫린 구멍 바로 위에서 칼자국을 발견했다.
그것은 오래전에 아나이스가 나무껍질에 깊숙이 새겨 놓은 이름과 기호였다.

아나이스 + 조르주 =  ♡


나무 1.  그가 해냈어.
나무 2.  누가?
나무 3.  조르주라는 친구가.
나무 2.  그가 뭘 했는데?
나무 1.  움직였어!
나무 2.  뿌리를 땅 위로 들어 올렸어?
나무 1.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이야.  중요한 순간에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어.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일을 해결해 주었지
나무 2.  앞을 떨어뜨리는 일이라면 그건 나도 할 줄 알아  내 잎도 아주 예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주워 가지
나무 1.  그는 한여름에 그 일을 해냈어!  단지 그의 의지력만 가지고 말이야
나무 2.  설마!
나무 1.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야. 우리가 인간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능한 일이야.

               우리는 이제 그것을 알고 있어


이미지들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내 생각도 뭉게뭉게 솟는다. 나는 너를 잊어 본 적이 없다. 
너는 내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다. 아나이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나는 수세기 전부터 무수한 사람들이 와서 나를 만지고 내 뿌리에서 버섯을 캐어 가는 것을 보았어.

그들은 늘 폭력으로 자기들의 존재를 표현하고 싶어 했어.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나는 늘 깜짝 놀라곤 했지.
옛날에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살생을 했어.
요즘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살생을 하고 무엇 때문에 서로 죽이는지 모르겠어. 아마도 습관 때문일 거야.

우리라고 해서 폭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야. 내 가지에서도 이따금 잎들 사이에 싸움이 벙어져.
잎들은 햇빛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지. 빛이 잘 드는 자리를 차지한 약삭 빠른 잎들은 더욱더 커지게 돼.
게다가 우리에게도 천적이 있어. 칡덩굴이 우리를 휘감아 조르고 곤충들이 우리 껍질을 파먹어.
새들은 우리 줄기에 구멍을 파서 둥지를 만들지.

하지만 그런 폭력에는 하나의 의미가 있어.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해. 
하지만 인간의 폭력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 인간은 왜 서로 싸우고 죽이는 걸까? 
너무 수가 많아서 스스로 수를 조절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따분해서일까?

수세기 전부터 인간은 우리를 땔감이나 종이의 원료로만 생각해 왔어. 하지만 우리는 죽어 있는 물건이 아니야.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우리는 살아 있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지각하고 있어.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고통을 받고 기쁨을 느껴.

나는 당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언젠가는 우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몰라......
당신들이 그걸 원한다면 말이야.    (p292)
- 끝 -

※ 이 글은 단편 <나무>에 실린 전문을 필사한 것임.


베르나르 베르베르 -  나무
역자 - 이세욱 
열린책들 - 2003.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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