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보장이 거의 안 되는 워싱턴에서 5년을 지낸 후 페레즈는 한 가지 신념을 굳게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아침 햇빛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의 둥근 지붕인 돔을 보면 아직도 영감을 자극한다고 생각했다.
이 돔은 정부가 국민의 의사에 종속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가장 광범위하게 노력한 역사적 시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가 매일 출근하여 일하는 국회의사당은 자기 권력의 후광 속에 완전히 파묻혀 있다.
미국의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 이후 백악관은 미국 최고 통치자의 관저가 되어 왔다.
몰 거리는 낮이 되면 관광객들로 붐볐다.
페레즈는 경외감을 품고 처음 본 순간부터 거대한 링컨기념관의 명상에 잠긴 듯한 정적을 존경했으며
달빛을 반사하는 제퍼슨기념관의 아름다운 회색 건물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영웅을 기린다기보다는 전몰용사를 애도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도
그를 감동시킨 워싱턴의 기념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이해시키기가 어려웠다.
미의회에서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그의 남녀 동료들에게 팽배한 냉소주의는
너나 할것 없이 침묵을 권유하는 분위기 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이방인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사표현을 자제하고 지냈다.
정치가가 미국은 동질적인 사회라고 입으로만 떠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레즈는 워싱턴에서 아직도 황색 피부를 가진 중남미계 인종으로 분류되어
백인이나 흑인과는 달리 취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비록 토요일이었지만 그는 덕슨 상원사무소 건물에 있는 우즈 상원의원의 사무실에서 오후 늦게까지 일을 하면서
혼자 몰 거리를 걸어 내려가 저녁식사를 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사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물결치는 금발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미인의 얼굴이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났다.
"좋아요, 페레즈.
당신이 이겼어요---,
당신이 상을 타게 되었군요."
페레즈는 그녀를 즉각 알아보았다.
미의사당 내에서 얼굴이 널리 알려진 라이사 가드너는
중요한 인사와 서로 세례명을 부르며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워싱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로비회사 가운데 하나인 토머스 앤드 위트머 주식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사의 고객 가운데는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 가운데 적어도 10여 개 회사가 포함되고
터키에서 대만에 이르는 여러 나라도 이 회사에 로비를 의뢰하는 고객들이었다.
이 회사의 사장은 마지막 공화당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인물이었고
민주당 전국대회 의장 출신이 고문 상담역을 맡고 있었다.
"무슨 상을 말하는 겁니까?"
그는 젊은 여인의 고혹적인 미모에 약간 겁을 먹은 채 물었다.
"8월의 토요일 오후에 이 건물에 혼자 남아 진짜 일을 하여 모든 상식을 거역한 공로지요."
"상은 뭔데요?"
"파티에 나와 동행해서 양껏 먹고 마실 수 있는 특권을 주는 거예요.
그리고 나와 데이트하는 것도 물론 포함되지요."
"내가 어떻게 그런 행운을 잡게 된 겁니까?"
"당신의 인과옹보의 운명 때문이지요.
아니면 나를 바람맞친 개자식, 아니 오클라호마의 존경받는 젊은 상원의원 덕분이라고나 할까요.
아마 여편네가 고향으로 불러들인 모양이에요."
가드너와 푸른 눈동자에는 즐거운 기색이 넘쳤다.
"하지만 당신이 어느 정도의 행운을 잡았는지 알기에는 아직 저녁 시간이 너무 일러요.
내가 지금 필요한 것은 파티에 동반할 남자예요."
"나로서는 아주 운이 좋군요."
페레즈는 책상 위의 서류철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불을 껐다.
"누가 주최한 파티인가요?"
"주미일본 대사 주최래요."
자신의 파티 참석이 행운이기보다는 의도적인 초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추측케 한 최초의 단서가
바로 일본 대사가 주최한다는 사실이다.
"일본 대사도 당신네 회사 고객입니까?"
"우리는 일본 고객들이 많지만---
일본 정부는 우리 회사 고객이 아니에요."
가드너는 순백색의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일본 정부는 우리의 고객 만큼 중요하지 않아요.
페레즈, 너무 뻣뻣하게 굴지 말아요.
당신을 공적으로 부패시키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사실 이번 파티 참석은 당신에게 바로 동맹군을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는 기회예요.
파티에는 각계의 전문가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VIP가 참석하거든요.
당신은 사귀어 둘 필요가 있는 인사도 몇 사람 만나게 될 거구요."
"나는 부패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천만에, 당신은 그걸 걱정하고 있어요."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페레즈.
아마 당신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예요." (p161)
※ 이 글은 <음모>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잭 앤더슨 - 음모
역자 - 오성환
한국경제신문사 - 1994.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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