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 1995년 봄부터 연재했던 최인호- 사랑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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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는 불안한 꿈에서 채희는 깨어났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 그 동안의 피로가 물로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 것을 느꼈다.
혼자만의 통곡으로 그동안의 슬픔과 누적된 피로감이 모두 씻겨서 사라진 모양이었다.
눈물은 인간의 감정을 정화(淨化)시키는 특수한 작용이라도 있는 것일까.
밖은 완전히 어두어져 있었다.
손목시계를 따로 차고 다니지 않는 채희였으므로 지금이 몇시인지 알 수 없었다.
밤 7시는 넘었을 것이다.
어쩌면 9시가 넘였을지도 모른다.
채희는 몹시 배가 고팠으므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찬장 속에 다행히 라면이 들어 있어 채희는 뜨거운 물을 끓이기 시작하였다.
부엌에 마련된 간이식탁에 않아서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시어빠진 김치를 곁들여서
라면을 먹기 시작하였다.
혼자 먹는 라면은 혼자만의 식사에 익숙해진 채희였지만 맛이 없었다.
그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마는 매일매일 혼자서 음식을 만들고 혼자만의 밥을 짓고
혼자만의 요리를 해서 혼자서 그 음식을 먹곤 했을 것이다.
그것도 30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엄마의 음식 솜씨는 정말 일품이었다.
엄마의 손이 닿으면 그 어떤 음식도 맛이 있었다.
엄마는 무슨 요리책 같은 것을 구해서
그 책에서 시키는 대로 재료를 사다가 이름있는 음식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고안해 낸 방법으로
자신만이 창안해 낸 음식재료를 통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맛을 창조해 내곤 했었다.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을 하곤 하였다.
"난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요리사는 인어공주에게 마법의 요리를 만들어 주어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대신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 바닷속에 사는 마녀라고 생각한단다.
어릴 때 읽은 동화에서 잘 기억되지는 않지만 그 마녀는 자기가 만드는 수프 속에 거미의 눈,
개미의 코, 거위의 간, 자라의 발톱, 여우의 눈꼽,
원숭이의 코딱지 같은 것을 넣어서 사랑의 묘약(妙藥)을 만들어내지 않았니"
엄마는 어린애처럼 자기의 상상 속에 나오는 온갖 추잡한 물건들을
인어공주의 동화에 대입시킨 후 신이 나서 말하곤 하였다.
채희는 음식 솜씨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폐증에 걸려서 음식을 거부하는 증상으로 체중이 30kg까지 내려가
살아 있는 미라가 된 이후로 음식은 채희에게 쾌감이나 즐거움의 대상이 못 되었다.
그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 있었다.
음식을 보면 식욕이 나지 않고
하기 싫은 숙제를 맞닥뜨렸을 때 느껴지는 부담감부터 떠올려지곤 했었다.
그러나 엄마는 달랐다.
아침에는 으레 커피 한 잔을 곁들여서 토스트를 만들어 먹는 것이 엄마의 오랜 습관이었는데
엄마는 이 간단한 아침식사조차 정중한 만찬처럼 포크와 나이프까지 식탁에 챙겨 놓고
무릎에는 냅킨까지 펼쳐 놓고 천천히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르고
또 그 위에 잼까지 발라서 마치 백작부인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게 먹곤 했었다.
채희는 빨리빨리 밥을 먹는 게 보통이었고 엄마는 아주 천천히 밥을 먹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어쩌다 모녀가 함께 외식을 하면 항상 시차가 엇갈렸다.
"넌 섹스도 그렇게 하니."
일찌감치 음식을 먹어 버리고 지루해서 화장 거울을 꺼내 들고
입가에 지워진 루즈 자국을 덧칠하고 있는 채희에게 느닷없이 엄마가 그런 질문부터 던져 왔었다.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밥 먹다 말고."
"이봐, 밥 먹는 습관을 보면 그 사람의 섹스 습관을 알 수가 있는 법이야.
성욕과 식욕은 비례하니까.
밥 먹는 속도를 보니까 넌 섹스도 맛을 보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옷을 벗고 애무도 건너뛰고
대뜸 그짓부터 하다가 헐레벌떡 나자빠져 버리겠구나.
그것은 섹스가 아니다."
"섹스가 아니면."
"그건 섹스가 아니라 교미다.
순 우리말로 하면 홀레라고 하는 거다."
"그럼 엄마는 섹스 한 번 하는 데 열 시간은 하겠구려.
밥 먹는 속도를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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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채희는 밤늦게야 오늘이 엄마의 생일임을 알게 되었다.
부랴부랴 꽃을 사들고 엄마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엄마는 밤이 늦은 시각이었는데 눈에 띌 만큼 진한 화장에 짙은 향수까지 뿌리고 있었다.
마치 무슨 무도회라도 참석하듯 엄마는 화려한 야회복을 입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엄마는 밤늦게 나타난 채희를 보고 불안한 목소리로 물으며 말했다.
"또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긴거냐.
난 밤늦게 네가 불쑥 나타나면 심장이 뛴다."
그런데 채희는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깜짝 놀랐었다.
방안과 정원의 외등이 모두 불을 밝히고 거실 탁자 위에는 엄마의 나이 만큼의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춤이라도 출 것처럼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사랑의 기쁨'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한바탕 대규모의 손님을 맞을 채비를 완벽하게 꾸며 놓았으므로
체희는 믿어지지 않아서 엄마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손님이라도 초대했어요." 그러자 엄마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초대했지."
"그런데 다들 어디 갔어, 밤이 늦었는데."
"내 손님은 벌써 오셨다."
"그게 누군데." 채희가 묻자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내 손님은 바로 나 자신이야.
더 이상의 손님은 필요없다.
오늘은 내 딸인 너까지 왔으니 오늘이야말로 성대한 생일파티다."
"그렇담." 채희는 놀란 목소리로 물어 말하였다.
"엄마는 혼자만의 생일 파티를 열기 위해서 이렇게 성대한 생일잔치를 벌였단 말이예요."
"그야 물론."
엄마는 이미 전작이 있었는지 얼굴이 발그스레 상기되어 있었다.
얼음을 재운 포도주를 잔에 따라 놓고 엄마는 마치 귀족처럼 우아하게 말하였다.
"혼자라고 해서 초라하게 생일을 보내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혼자라고 해도 생일만큼은 여왕처럼 화려하게 보내야 한다." 엄마는 진짜 초대받은 왕녀 같았다.
"춤 한번 추실까요. 공주님."
채희는 춤을 잘 추지도 못 추지도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닐 밤 채희는 엄마가 깜짝 놀랄 만큼의 춤 솜씨를 갖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남자 스텝을 밟으면서 채희를 리드하였는데 음악에 따라 왈츠를 추어 나갔다.
-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눈물로 보낸 나의 사랑이여
그립다. 어디로 갔는가 나의 사랑이여--- -
엄마가 좋아하는 나나 무스쿠리가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사랑의 기쁨' 멜로디에 이미 술 취한 엄마는 채희의 손을 잡고 마루가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춤을 추다 말고 갑자기 감정이 고조되었는지, 체희의 입에다 입을 맞추었다.
채희는 그날 느닷없이 자신의 입술에 부딪쳐 온 엄마의 입술이 촟농처럼 뜨겁다 못해
달궈진 참숯처럼 입술이 타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미쳤어요."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 연인끼리만 나눌 수 있는 뜨거운 입술 키스를
갑자기 퍼붓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아서 채희가 비명을 지르자 엄마는 깔깔 웃으면서 말하였다.
"어떠냐. 뭐, 동성연애자들도 있는데."
엄마는 30년 동안 줄곧 이렇게 생일 축하 파티를 열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초대하지 않고 혼자서 포도주를 마시고 온 방의 불을 대낮처럼 밝히고
음악을 틀고 혼자서 왈츠를 추고 블루스를 추면서 케이크에 꽃힌 불을 껐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엄마는 유일하게 믿을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특히 엄마는 혼자서 식사를 할 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식사를 하다 말고 갑자기 실성한 듯 깔깔, 느닷없이 웃기도 했었다.
마치 누구에게 말하듯 다정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모습도 본 적이 있었다.
"사람은 말이다. 가장 외로울 때가 말이다.
혼자서 밥을 먹을 때 란다.
오죽하면 신(神)이라는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 밤에는 제자들과 함께 밥을 나눠 먹었겠니.
얼마나 외로웠으면 말이다."
라면을 먹은 후 채희는 커피 물을 끓여서 밤이 늦었지만 진하게 커피를 탔다.
커피에 예민해서 밤늦게 커피를 마시면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 어차피. 채희는 커피잔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으며 생각했다.
--- 오늘 밤은 이 집에서 보낼 것이다.
처음에 엄마의 집을 찾아올 때만 해도 엄마의 빈집이 어떻게 되었을까
잘 정돈되어 있을까. 형편만 살피고 돌아가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채희의 마음은 엄마의 빈집에 차츰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어차피 이 집을 나간다 해도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아파트뿐이 아닌가.
그럴 바엔 엄마의 집에서 밤을 보낼 것이다.
엄마의 빈집은 산 속의 절처럼 조용하였다.
채희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 흔한 TV도 없이 연속극도 보지 않고 영화도 보는 일 없이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까.
아직 초봄이었으므로 밤이 되자 기온이 내려갔다.
다소 쌀쌀하게 느껴지는 기온이라서 채희는 무릎을 덮을 담요라도 한 장 꺼내야겠다고
방안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인디언 담요 한 장을 꺼내 가지고 방을 나서려는데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가 쓰던 낡은 타이프라이터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무심코 타이프라이터를 보아 왔고,
이제라도 마악 타이프를 치려는 듯 흰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뭔가 그 종이 위에 글씨가 찍혀져 있는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채희는 책상 위를 비추는 스텐드의 불을 켰다.
채희의 대학 졸업식 날 학사모를 쓰고 엄마와 다정히 웃고 서 있는 액자 사진이 정면으로 놓여 있었고,
타이프라이터 위에는
방금 엄마가 무엇인가 타이프를 치다가 잠깐 나들이를 나간 것처럼 흰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채희는 그 흰 종이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 찍혀진 내용을 천천히 읽기 시작하였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가 쓰는 이 편지를 받으시는 순간 얼마나 놀라실지 짐작이 갑니다.
마치 죽었던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으시는 기분이겠지요.
안녕하세요. 접니다. 전 장유진이예요.
이렇게 제 이름을 밝히면서도
편지 서두에 선생님의 이름을 쓰지못하는 것은 너무나 오랜만의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세월이 오래 흘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선생님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제마음은 마치
'무지개를 바라보니 내 가슴은 뛴다. 내 어렸을 때도 그러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도다' 던
옛 시인의 노래처럼 무섭게 가슴이 뛰고 있습니다.
선생님. 너무나 오랜만이예요. -
무심코 타이프라이터에 끼워져 있는 종이 위에 찍혀진 내용을 읽다가 채희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이 편지가 엄마가 어떤 외국 소설의 한 장면을 번역하다가
그대로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둔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편지의 내용 중에 엄마의 이름인 장유진을 밝히는 내용이 분명히 명기되어 있는 이상
이 편지는 엄마가 자신의 이름으로 그 누구인가에게 보내는 편지였던 것이다.
또한 서두에 씌어진 내용으로 보아 이 편지는 단순한 문안 편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소위 연애편지였던 것이다.
채희는 다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 제가 이렇게 선생님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보내는 것은
얼마 안가서 제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선생님에게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몇달이 지나지 않아서 저는 죽을 거예요.
아마도 이번의 겨울을 넘기기가 힘이 들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미 지난 가을에 유방암으로 오른쪽 젖가슴을 절개해 냈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어떻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신경하게 내버려두었느냐고
꾸중을 하였을 정도로 뒤늦은 대수술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술은 성공리에 마쳤다고 자신있게 말하였지만
환부가 워낙 넓은 것으로 보아서 초기에 암 단계는 이미 지난 것같습니다.
저도 의학 상식쯤은 있으니까 오른쪽 팔을 쓰는 것이 부자유스러울 정도로 유방뿐 아니라
겨드랑이까지 넓게 절개한 것을 보면
암세포가 이미 제 몸 어디엔가 전이된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쯤은 갖고 있습니다.
이젠 번역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
오랜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낯간지럽게 유방 타령을 하고 있는 제가 참 한심스럽지요.
언젠가는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고
또 언젠가는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쓰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편지가 이처럼 비참하게 죽음을 앞두고서야 쓰게 되다니요.
선생님, 저는 제가 죽는 것이 싫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정말 죽기 싫습니다.
비록 만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디엔가 선생님이 있다.
또 내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 하나로 나날의 삶은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먼저 죽습니다.
선생님을 남겨 두고 제가 먼저 죽습니다.
아아, 이럴 수는 없습니다.
아아, 지금 이 순간 선생님이 언젠가 들려주시던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에 나오는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떠나겠나이다. 안녕히 계시오소서
형제여
제가 온 형제들에게 절하면서 작별하나이다.
여기 내 문의 열쇠를 돌려드리나이다.
또 내 집에 대한 온갖 권리도 포기하나이다.
오직 지금 그대들로부터 마지막으로 다정한 말씀을
간청할 뿐이나이다.
엄마의 편지는 거기서 그쳐 있었다.
흰 백지가 거의 다 찰 때까지 쓴 한 장의 편지였다.
갑자기 끊어진 편지의 구절은
연주 도중에 현이 끊어져 갑자기 중단된 바이올린 연주곡을 듣는 느낌이었다.
채희는 어디엔가 계속 이어진 편지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책상을 구석구석 뒤져보기 시작하였다.
책상 머리맡에는
최근에 엄마가 보던 책들과 번역을 할 때 쓰던 엄마의 돋보기 안경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 편지의 뒷부분은 없었다.
채희는 그래서 책상의 서랍을 열어 보았다.
서랍 속은 갖은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최인호 - 사랑의 기쁨(상)
여백 - 1997.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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