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에이미 - 「120% COOOL」
감상에 젖는 것은 다 큰 남자가 할 일이 아니야,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남들에게는 낭만을 뜻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눈물 날 것 같은 감정의 안개가 안쪽으로 퍼져 나갈 때 나는 얼른 눈길을 돌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는 사람은 그것을 맛보느라고 멍청한 표정이 되어 버린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매우 좋아한다.
아름답고 덧없고 슬픔을 품고 있는 까닭에 기쁨이 더해서 빛나는 것, 그런 것들이 좋다.
예를 들면 봄에 부는 바람은, 내 코 끝에 달짝지근한 관능적인 우울을 불어 제낀다.
초여름의 푸르름은 잘라 먹고 싶을 정도이다.
가을비는 내 바바리 코트에 작은 강을 만들어 나는 죽어 가는 반딧불조차 동정한다.
겨울도 사랑한다,
쌀쌀맞은 처녀처럼 나에게 입맞추는 북풍으로 마음을 돌린 나뭇잎의 손을 잡고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나는 모든 계절에서 느낌을 바늘처럼 갈고 닦고 망연해한다.
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조차도 받아들일 정도이다.
따라서 나는 정말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서 이리저리 길을 걷다가 감상을 주워서는 마음속에서 시를 짓는다.
나는 시인은 아니지만 다양한 자연의 장난감 안에서 몽상에 잠긴다.
세상사람들은 이런 나의 본성을 모른다.
단지 어른이 되는 중간에 있는 남자라고 알고 있다.
쾌활하게 웃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슬며시 웃음짓는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도
여러 가지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특권계급에 속해 있다라고 생각하고는 남몰래 좋아한다.
정말 얄미운 일이다.
혀를 쏙 내밀기도 한다.
너네들은 비에 감동할 수 있니?
계속 내리는 비에 아름다운 사람이 한숨을 쉬는 것 같은 무상(無償)의 사치를 느낀 적 있어?
나는 그떄마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감동한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 나는 개의치 않는다.
아름다운 순간이 좋다.
보석처럼 시간을 꺠물며 나는 살아갈 것이다.
그런 결심(혼자서 쓴웃음을 짓는 종류의 결심이지만)을 한 어느 날, 나는 그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사랑에 빠졌다.
헤어짐을 생각하면 눈물이 고여 와 나는 눈을 내리깔고 싶어진다.
그러나 언제나 조용한 체념이 내 마음을 스쳐간다.
사랑스러운 사람.
나는 가까운 장래에 그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떨게 한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녀 발목에 감겨 있던 비의 화석의 반짝임은 나의 영원한 보물이 될 것이다.
나를 눈물짓게 하는 그 사람과는 초여름의 비오는 날 오후에 만났다.
굉장한 비였다.
나는 갑작스런 비에 놀랐다.
서둘러 민가의 처마 밑에 뛰어들었을 때는
심한 비는 이미 노트의 잉크를 지워서 하얀 종이에 파란 얼룩이 생겼다.
나는 비가 저질러 놓은 일에 화가 약간 났으나 하는 수 없지, 하고 포기했다.
이 계절의 비는 변덕을 부려서 나 같은 느린 학생을 낭패하게 만든다.
나는 비가 공기에 많은 선을 긋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줄자로 긋는 것보다 훨씬 정확하고 재빠르고 어딘지 될 대로 되라는 식인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이럴 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것처럼 비나 비 저쪽에 마음을 뺏긴 채 서 있기만 한다.
땅에는 물웅덩이가 생겨 원을 그리고 있다.
정말 자연이라는 것은 수많은 기하학 무늬를 갖고 있군이라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옛날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여자애와 이렇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적이 있다.
양복점인가 뭐 그런 가게 앞이었다.
가게는 닫혔고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둘이서 한동안 비를 보고 있었다.
춥지, 라고 여자애는 말했다.
나는 끄덕인 채 비를 보고 있었다.
춥지, 하고 여자애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 순간 내 손은 비가 공기에 선을 긋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똑바로 뻗어서 여자애의 손에 닿았다.
그리고 잡았다.
여자애는 떨고 있었으나 이제는 춥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여자애를 끌어당겨 입맞춤을 했다.
셔터에 부딪치는 떨리는 어깨를 껴안고 나는 따뜻한 것을 빨았다.
비 냄새. 나는 눈을 감고 있는데도 비에 가려 뿌옇던 초여름의 푸르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금세 그칠까."
나는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옆에 어느새 사람이 와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첫사랑의 추억에 넋이 빠졌던 것이 부끄러웠다.
나는 겸연쩍은 웃음을 띠고 옆을 보았다.
거기에는 머리가 젖어 어쩔 줄 모르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곧 그칠 것 같은데요." 나는 쑥쓰러움을 감추려 그런 말을 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비 피하는 것에는 누구든지 은밀한 추억이 있나 봐."
"당신도 있나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으나
속으로는 훔쳐본 감상적인 기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우스운 듯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
"몇 가지 있어. 모두 사랑에 관한 것만."
"달콤한 추억? 아니면 쓰라린 추억?"
"지금은 모두 쓰라린 추억이 되었어."
"왜?"
"왜냐하면 모두 잃어버린 사랑이니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어정쩡하게 끄덕였다.
"달콤한 추억은 진짜 사랑이 아니야. 너 같은 젊은 남자는 모르겠지만."
"진짜 사랑이 아니라도 좋잖아요. 멋진 과거를 감상할 수 있다면 그쪽이 좋지요."
나는 뚱해서 말했다.
나는 진짜라든가 가짜라든가 하는 식으로 매사를 정의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의 가치는 자기 안에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약간 슬픈 표정이 되었다.
나는 그녀를 한순간 가엾게 여겼다.
나처럼 비를 피하는 것을 그녀는 즐기지 않는 것이다.
비가 아름다워도 그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미안. 나 멋없지."
"아, 아뇨.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당황했다.
처음 본 사람으로부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로 사과를 받다니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우연히 만난 사람하고 이런 알맹이 없는 대화를 나누다니 나로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사람이란 뭔지 구체적인 것을 사이에 두고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얕잡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느닷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에 올리는 그녀에 놀랐다.
그녀는 지금 처마밑에서 나하고 사랑에 관한 추억이 어떠니하는 이유로 기분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우산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라든가, 옷이 젖어서 불쾌하다라든가 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고.
"물어 봐도 돼?"
"뭘요?"
"계속 미소를 머금고 있던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처음 키스한 여자애 생각이요."
"어머!! 귀여운 추억이네."
"비에 젖은 나뭇잎이라든가, 떨고 있던 그 여자애라든가. 마침 이맘때 계절이었어요."
"사랑했었구나."
"글세. 그녀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정말은 빗속에서 키스했다는 상태가 좋았는지도 몰라."
"빗속에서 키스하는 것 좋아해?"
"아마."
"여기도 입술이 있는데, 어때?"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사람은 간식을 나누어주듯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갑작스레 그런 말해도......"
"어때, 재밌잖아.
갓 만난 두 사람이 키스하다니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걸.
상상을 초월한 것이야.
재미있다."
물론 나는 그녀에게 입맞추지는 않았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즐겼다.
그녀도 내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어쩔 줄 몰라 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에게 마음을 놓고 있었다.
아까까지의 신경이 곤두섰던 사람과는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 거미줄이다." 내 시선을 좇아 그녀도 뒤돌아보았다. 비는 어느새 그치고 해가 약하게 비치고 있었다.
"거미 좋아해?"
"아니 그렇진 않은데,
비 개인 뒤의 거미줄이 예뻐서."
거미줄에는 윗면 가득 빗방울이 맺혀서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내가 주위의 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이럴 때이다.
내 눈동자는 매우 귀중한 것이 주어진 것처럼 깜박이는 것을 잊는다.
아름다운 천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하나, 둘.
나는 그것은 손에 받고 시은 충동이 일지만, 내 손에서는 비가 두고 간 것은 반짝이지 않는다.
거미줄 너머로 부드러운 나무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비가 남기고 간 내음새는 오후의 시간에 덮개를 씌운다.
거미는 자기들의 집이 이다지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까.
"로맨티시스트야."
"뭐!?"
나는 놀라 그녀를 보았다.
나는 로맨티시스트라고 자처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열중할 따름이다.
몸 여러 군데의 촉각을 흔드는 멋진 것들을, 내 멋대로 즐길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감정을 녹이면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로맨티시스트라는 건 아닌데. 당신은 생각하지 않나요.
저 빗방울이 어떤 장식품보다 거미줄을 아름답게 한다고. 나는 이런 순간을 좋아합니다.
남들에게 말하면 바보 취급당할 것 같아 말은 않지만, 하지만 당신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니 괜찮지요.
죄송해요.
정말 초록을 비추는 사탕같다, 저 빗방울.
거미가 먹기는 아까워요." 나의 이런 헛소리를 그녀는 웃으며 듣고 있었다.
"멋있어.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부러워.
나는 벌써 여러 해 그런 일이 없는데." 나는 그녀가 갑자기 힘이 빠진 것 같아 당황했다.
"그런 나는 남들하고 다른 점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도 마음이 편할 때는 행복하죠."
"글세."
"적어도 첫키스를 생각하거나 할 때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걸요."
"생각이 안나."
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그녀는 눈에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거미줄에서 비가 떨어진다.
비의 모양은 눈물을 닮았다.
그녀는 어느덧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바라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눈물방울에는 나뭇잎이 비쳐 있어 내 시선은 그곳에 못박힌다.
그리고 새삼스레 그녀가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당황한다.
비를 피하던 처마 밑. 그래 나는 옛날에 여자애에게 입맞췄다.
시간이 멎고 떨고 있는 그 아이를 끌어안았다.
나는 책이랑 노트를 안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울고 있는 여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뗀 순간에 그녀는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젖은 눈동자는 내 모습을 비추고 있고, 속눈썹에는 눈물이 그대로 있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나는 얼굴을 붉히고 내 행동을 사과한다.
주위의 여러 가지에 감동하기를 잘하는 나,
사람에게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고 나의 대담함에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나무나 풀이라면 비라면 마음은 말 없는 시를 읊고, 그것이 사람이라면 입술은 키스를 낳는다.
키스는 부리가 되어서 내 마음을 쿡쿡 쑤신다.
나는 비 개인 오후에 갓 만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얼마나 엉뚱한 시작인가.
그러나 울고 있는 그녀는 너무도 가련해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상하지.
이런 일도 있나 봐.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마음을 건져올린 거야."
건져올린 그녀의 마음을 나는 마치 최고급 실크처럼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으며 내 마음을 감싸안는다.
나는 완전히 갠 길을 그녀와 걷는다.
남겨진 거미줄은 언제까지나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내 마음을 달콤하게 적신다.
그날 나를 찾아온 사랑은 내 생활을 매우 부자유스럽게 했다.
나는 그때까지 인간관계를 가볍게 받아들이고는 번거로운 것은 피했었다.
나는 심각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음이 다치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고 나서부터 경험하지 못했던 고생을 겪게 되었다.
그녀는 결혼한 상태였고 한 남자에 속해 있었다.
나는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를 처음으로 느끼고는 괴로웠다.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으나, 지금 나는 그녀를 내것으로 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날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녀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미줄을 보지 않았다면 그녀의 눈물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 몇방울인가의 빗방울.
그리고 그것이 어느새 눈물로 변했다는 순간 어느새 나는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안이한 시작인가!?
게다가 그녀는 결혼한 상태이고, 나 같은 멍한 보통 학생이 이런 사랑을 하다니.
그날 그녀는 남편과 몇백 번째인가의 다툼 끝에 집을 뛰쳐나왔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녀의 눈물이 아름답다는 생각이나 했었다.
화나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것은 현재를 쌓아 가는 것이며 과거를 가지지는 않는다.
그 일로는 나는 이미 그녀를 받아들였다.
나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를 유지하며 인간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허둥거려 봤자 헛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만나고 싶다고 해서 달려가 만날 수 있는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얼마간의 체념이 내 마음에 밀려올 때 다리는 흠칫하고 내 사랑의 밀도는 더 진해진다.
격정을 누른 마음에는 우울의 베일이 내려지고 매우 애잔한 기분이 나를 휘감는다.
그랬더니 어떤가.
나의 오감(五感)은 전에 비해 훨씬 선명해져서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달콤한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가 나를 향할 때는 언제나 당혹감울 어깨언저리에 달고 있다.
우연히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에 더 깊숙이 빠져도 될 것인가를 정하지 못한 듯이.
다소간의 떨림과 새롭게 찾아온 행복을 저울에 달고 그녀는 내 눈앞에서 턱을 괸다.
때로는 소녀처럼 웃기도 하고 커다란 동물을 얼르는 것처럼 말을 걸기도 하고
내가 너무 빠져들지 말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내가 싫증내지 않게 배려하기도 한다.
그녀는 매우 약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쉽게 내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악의가 없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무리한 청은 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다.
정말은 그녀를 엉멍진창으로 만들고 싶다.
무릎 꿇고, 내 것이 되어 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나는 참는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나는 다만 그녀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다.
사랑의 말조차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는 위태위태한 상태로 균형을 잡고 있는 둘 사이의 조용한 공간을 깨기 싫다고 진정으로 바란다.
그녀는 언제나 간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이 점도 내 눈에는 바람직하게 생각된다.
그녀의 커다란 젖은 두 눈,
그리고 그 눈의 태를 이루는 긴 속눈썹등이 지나치게 충분할 정도로 그녀를 말해 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그려진 립스틱만이 그녀의 나에 대한 작위성인 것 같다.
맑은 초여름의 공기나 꿀색 같은 포도주나 눈부신 햇살 등이
그녀를 돋보이게 해서 내 눈에 눈물 막을 드리운다.
그리고 그날 고요함은 깨졌다.
그녀는 갑자기 카페의 테이블에서 백포도주를 주문하고는 울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처음 만났을 때에도 보았으나, 분명히 이때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왜냐 하면 처음 때와 달리 지금 그녀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다름아닌 나 자신인 까닭에.
그녀는 한참을 울고 난 후 얼굴을 들고 나를 보았다.
여인이 자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광경인가.
나는 그녀가 이야기하기를 기다렸다.
"내가 왜 우는지 알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떄문에 우는 거 아니야.
나는 그야 남편과는 원만하지 않아.
그렇지만 그런 것쯤은 견딜 수 있어.
내가 우는 것은 너 때문이야.
너 대신 우는 거야."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너보다 훨씬 나이도 위이고 게다가 결혼도 했어.
그리고 너를 사랑해.
이건 정말이야.
나는 처음 만난 날부터 너에게 마음을 옮겼어.
하루하루가 불안과 행복으로 말도 못해. 나는 이것을 너에게 말해 두겠어.
나는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를 알아주기를 바라. 그러나 너는 말하지 않아.
처음과 같은 것처럼 나를 대하려고 해.
우리가 만난 우연에 책임을 지우지 않으려고 나를 위해 신경쓰고 있어.
하지만 네가 나에게 그렇게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더 아파."
"내가 당신을 다치게 해?"
"그래." 그녀는 매우 안쓰러운 듯 나를 본다.
"나를 좋아하지.
좋아서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
네가 입을 다물 때마다 네 눈에서는 나에 대한 마음이 넘쳐나와.
너무 힘들어.
네 눈은 너무 많은 말을 해.
너는 나와 계속 만남으로써 자꾸만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 같애."
그건 아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상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랑을 위해 스스로 입히는 상처는 결코 마음을 깎아먹는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입을 맞추고 소중한 나의 결정(結晶)을 만들어 가는, 그런 상처도 있을 것이다.
"난 네가 나를 볼 때 너무나 슬퍼져.
나 이런 기분이 된 적 없었어.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자기 마음을 잘 전할 줄 아는 남자야.
여자의 마음을 쉽게 잡는 사람이야.
너를 볼 때마다 난 한 사람의 남자를 다치게 한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나한테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해 줘."
"나는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아."
"나를 가지고 싶지 않아?
질투에 미쳐서 나에게 소리치고 싶진 않아?
나는 다른 남자에게 속해 있으면서 너를 사랑하는 자기위주인 여자야."
"나는 당신과 이러구 있는 것만으로 족해.
이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해.
당신이 다른 남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이 또 나를 만나러 오는 것도 사실이야.
내가 겁내는 것은 당신을 내 눈으로 볼 수 없게 되는 것, 그뿐이야." 그녀는 나를 보고 말했다.
"거짓말쟁이."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많은 술을 마시고 뻗었다.
그녀가 한 말은 정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자연을 사랑하듯이 여자를 살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원했다.
단지 편안한 감상에 젖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만 여러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단 한 사람으로서 그녀가 옆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그녀 없이는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움이라는 감정을 매우 싫어할 텐데도
어느새 그녀를 내 것으로 할 수 없는 이 상황을 미워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는 내가 잘못했어.
그녀가 며칠 후에 전화를 해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무력감으로 곧 쓰러질 것 같은 상태였다.
나는 그 며칠 동안에 갑자기 팍 늙어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사랑이란 것은 비나 바람이나 나무들처럼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공허라는 것을 맛보았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이다지도 강한 힘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그 힘 앞에 엎드렸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 훌쩍훌쩍 울었다.
"괜찮아?"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그냥 울고 있었다.
"내 생각하고 우는구나."
"응."
"너무 깊이 빠졌나 봐."
"그런가 봐."
"나도 그래."
"당신도 울었어?"
"나도."
"헤어질 수 없지."
"너랑?"
"그럼. 알면서."
"오늘 밤, 너한테 갈 거야."
"괜찮아?"
"괜찮아.
나를 안아 줘.
나도 너를 안아 줄게."
나는 전화를 끊고 멍하니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 같다.
땅이 젖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공기에 선을 긋는 소리. 그것은 규칙적이어서 내 심장소리에 겹쳐진다.
나는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안아 줄게. 그 말이 나를 침착케한 것이다.
나는 마른 눈물자국을 박박 손으로 문질렀다.
그녀가 오기 전에 평소 얼굴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무리였다.
눈에 뛰어들어오는 주위의 것들에 의해 감정을 조성하는 생활을 나는 이미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내 마음을 다 털어놓자.
그녀가 이제 그만이라고 애원할 때까지,
나는 지금까지 쌓아 온 사랑한다는 자격을 그녀에게 계속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문은 두드리고 그리고 맞이한 내 몸에 넘어지듯 안겼다.
우리는 방에 들어가는 것도 급해서 문 앞에서 입맞춤을 나누었다.
한참 후 서로의 몸을 떼고 바라보았을 때 어느 쪽이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밤은 우리의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알았다.
급한 마음을 애태우면서 우리는 그녀가 가져온 포도주로 건배했다.
"그때 비를 피한 너를 보고 나는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어."
"헤헤 웃고 있었지."
"그렇지 않았어.
난 놀랐어.
혼자 있는 걸 그렇게 즐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거든.
나는 매일매일 우울하고 그걸 누구에게 풀어야 할지도 모른 상태인데.
하지만 너는 비를 보며 기쁜 것 같았어.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 같아 부러웠어."
"그러나 당신을 만나고 역시 괴로웠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힘들었어.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처럼 붕붕 뜬 채로는 살 수 없을 거야."
"할 수 있을 거야. 어려움을 알고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좋은 일이야.
많은 어른들은 그렇게 되는 것을 굉장히 빨리 포기해 버리지.
난 네가 그런 사람이 되는 거 싫어. 하지만 네가 너무 좋아.
어떻게해야 할지 모르겠어."
빗방울은 창문을 두드리고 나는 그녀 어깨를 껴안는다.
그녀는 다리를 펴고 나는 발목에 둘러진 줄을 본다.
그것은 밤의 어둠에 더욱 돋보인 채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
"그거......"
"발찌 말야?"
"평소에도 끼고 있었어?"
"응. 몰랐어? 백금이야.
난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것은 달라.
매우 조용하거든."
"발에 잘 맞는 것 같아."
나는 그녀의 발목을 가만히 잡으면서 발찌를 흔든다.
그것은 예의바른 사탕을 끼워 놓은 것처럼 나에게 입맞춤을 재촉한다.
나는 그때까지 백금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나, 달빛을 빨아들인 것 같은 색에 매료되었다.
나는 그녀를 안아 조심스럽게 침대로 옮긴다.
그 은밀한 움직임에 맞추어서 발목은 반짝이고, 나는 비 오는 밤에 달을 본다.
그녀는 베개 위에 머리카락을 펴고 내 목에 팔을 감는다.
나는 기쁨에 떨면서 그녀를 꼭 껴안는다.
행복에 취해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오늘 밤부터 나를 만들어 갈지 모른다고.
발목의 줄은 나와 그녀의 체온을 빨아들여 어느새 이불을 구기고 얌전하게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소리만 낸다.
"잊지 않을 거야.
오늘 밤을."
그녀는 나를 쳐다보고 이렇게 속삭인다.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여서 볼을 흐른다.
역시 눈물은 빗방울 모양과 비슷하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었어.
이상해? 연상의 여자가 이런 말 하는 거. 하지만 나는 너와 만나기를 기다렸었어.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만 닿아도 울고 싶어지는 그런 나를 되찾고 싶었던 거야.
내가 마치 너를 이용한 것같이 됐다. 너에게 무엇을 돌려줘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나를 이용한 이 사랑하는 사람을 물론 용서한다.
나는 그녀가 나를 이용한다고 전혀 생각지 않는다.
나는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을 잘 안다.
나는 그 중의 하나를 지금 가지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힘을 빼고 그리고 힘을 주어 나는 이 묵직한 사랑스러운 것을 맛보고 있다.
나는 나에게 사로잡힌 것 같으면서도 실은 나를 사로잡은 이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날,
처마 밑에서 그녀의 어깨너머로 본 거미줄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가.
반짝이는 천 같은 거미줄에 수놓인 빗방울.
그러고 보니 거미줄의 주인을 나는 발견하지 못했었다.
빗방울은 하나씩 떨어져서 어딘가로 사라졌지만,
실은 그들이 내 마음속에 사뿐히 내려와 앉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나는 이제는 감정을 마음속에 밀어 넣고 나 혼자서 맛볼 수는 없다.
울고 싶을 정도의 안쓰러움은 눈동자를 넘어서 주변을 젖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녀에게 사랑을 전하고 안락함을 얻는다.
눈물은 이윽고 말라 버리지만 우리의 마음은 언제까지나 젖어 있다.
"첫키스 얘기를 해줘." 그녀는 이런 말을 꺼내서 나를 놀린다.
비가 내리고 있었어.
여자애는 떨고 있었어.
기분이 참 좋았어.
나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어.
비 냄새가 났었지.
꼭 지금처럼.
그러나 눈물을 닮은 아름다운 비의 화석(化石)같은 보물은 그때는 만질 수조차 없었어. (p143
※ 이 글은 <120% COOOL>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야마다 에이미 - 120% COOOL
역자 - 박정윤
웅진출판 - 1994.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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