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용 -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해변의 호랑이 가족
해변에 호랑이 발자국이 나 있다.
블러디 메리의 가족이 모두 모였다.
흔적이 보이지 않던 새끼 암컷도 돌아왔다.
그런데 네 마리가 아니라 다섯 마리다.
커다란 발자국이 새로 합류했다.
앞발 볼의 너비가 12.9센티미터. 왕대였다.
하쟈인이 블러디 메리의 가족과 함께 해변을 걸어간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시베리아호랑이가 이렇게 다섯 마리까지 모이는 일은 정말 드물다.
하지만 더 특별한 것은 왕대가 블러디 메리의 가족 속에 자연스럽게 섞였다는사실이다.
이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하쟈인이 새끼호랑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고.
또 하나는 하쟈인과 새끼 수컷의 관계가 어떤 갈등의 흔적도 없이 원만하다는것이다.
새끼 수호랑이에게는 인간이나 다른 맹수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다.
바로 아비가 아닌 수호랑이다.
수호랑이는자신의 씨를 가능한 한 널리 퍼뜨리려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넓은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쓰며,
자신의 영역 안에 사는 암호랑이들이 다른 씨를 가지지 못하도록 떠돌이 수호랑이들을 영역 밖으로 쫓아낸다.
이렇게 확실하게 티를 잡은 호랑이가 왕대다.
왕대의 영역이 넓을수록 그 지역에서 태어난 젊은 수호랑이들은 그만큼 더 멀리까지 떠돌아다녀야 한다,
하지만 쫓겨난 수호랑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지 못해 씨를 뿌리지 못한다.
자리가 난다 해도 경쟁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떻게 영역을 확보하더라도 영역 내의 암호랑이가 이미 새끼를 데리고 있다면 그것도 곤란하다.
새끼를 기르는 동안은 암호랑이가 발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 호랑이가 자신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암호랑이가 새끼를 다 키워낼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남의 새끼가 다 자랄 때까지 기다려줄만큼 마음씨 좋은 수호랑이는 별로 없다.
영역을 차지한 수호랑이는 다른 수호랑이의 새끼들을 죽여 버린다.
그러면 새끼를 잃은 암호랑이는 몇 주 또는 몇 달 내에 다시 발정을 하게 되고, 그 암호랑이와 빨리 짝짓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이 해변의 왕대는 왕대가 아니라 아비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영토를 돌다가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 오붓한 한때를 보냈다.
블러디 메리의 가족은 개울을 따라 해안산맥 산마루로 향했다.
주변 참나무 숲에 우수리사슴의 신선한 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사슴과 멧돼지의 두개골과 뼈다귀들도 가끔 보인다.
해안산맥 정상에서 호랑이 가족이 헤어졌다.
블러디 메리의 가족은 산맥을 따라 마약 마을 방향으로, 왕대는 산맥을 넘어 내륙으로 향했다.
남동쪽으로는 푸른 동해가 넘살대고, 북서쪽으로는 푸른 수해(樹海)가 펼쳐져 있다.
하쟈인은 시호테알린 산맥 저 너머로 다시 영토 순례를 떠났다.
수없이 중첩된 산맥의 주름 속으로 왕대가 걸어가는 듯했다.
한기가 스친 것처럼 몸을 떨며 나 자신, 외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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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백과 천지백의 갈등
호랑이를 기다리는 일은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다.
10분마다 카메라를 켜보고 켤 때마다 기대를 부풀린다.
바람은 추운지 비트로 파고들고, 빛은 어둠이 싫어 비트를 외면한다.
카메라를 켤 때마다 뷰파인더의 뿌연 우윳빛 기둥만이 비트의 어둠을 밝힌다.
하루가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간다.
호랑이가 오지 않으면 혹시 사고가 생겼나?
이동로가 바뀌었나?
그래도 안 오면 ‘설마 오늘 올까?’ 그렇게 몇 달을 안 오면 ‘오늘도 안 오겠지’ 점점 부정적인 생각에 젖어든다.
처음에 집중하다가 서서히 흐려지는, 세월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호랑이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날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호랑이가 오지 않는 날과 오는 날은 모두 단 하루의 차이다.
이 두 날이 만나는 경계선이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연속됨을 믿어야 한다.
두 달 동안 안 왔으니 이제 올 확률이 높아졌겠지,
석 달 동안 안 왔으니 내일은 올 확률이 더 높아졌겠지, 이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점점 집중도를 높인다,
호랑이를 기다리는 일은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과 닮았다.
마라토너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이어져서 결승선을 밟듯이
발걸음 하나 호홉 하나 가다듬으며 막판 스퍼트를 준비해야 한다.
기다림과 사소한 정성 사이를 오가며 새월을 보내다 보면 예고 없이 문득 호랑이가 나타난다.
눈 덮인 수풀 사이로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호랑이가 스윽 나타나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뜻한 느낌이 뭉클 솟아오른다.
이 녀석, 아무 사고 없이 돌아왔구나, 자신의 주기대로 살아가는구나.
그런 안도감이 호랑이를 기다리고 자신을 기다린 세월에 스며들고 눈시울은 붉어진다.
야릇한 감상도 잠시, 안도감을 밀어내고 살아 펄떡이는 긴장감이 심장박동을 타고 서서히 흘러들어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막판 스퍼트 하는 마라토너들이 느끼는 것처럼 숨이 끊어지고 온몸의 모세혈관이 터질듯
야생호랑이를 영상 기록하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결승선을 빛살처럼 통과하고 나면 잠시 환희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곧이어 마라토너들은 썰물같이 빠져나가고 호랑이도 언제 오기나 했었냐는 듯 소리 없이 사라진다.
심장 둥둥 울리는 환희에서 문득 깨어나 주변을 돌아보면 다시 마라톤의 출발점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호랑이를 보려면 자신을 바라보며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고....
다시 마음을 다독인다.
해안 암벽 위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달빛에 은은하게 젖어들던 암벽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무언가를 뜯어 먹는지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숙이곤 한다.
그 모습이 커다랗게 중폭된 맹수의 형상이다.
또 하나의 그림자가 점점 커지며 암벽으로 다가가자 앉아 있던 그림자가 벌떡 일어선다.
다가서던 그림자가 작아지며 물러난다.
처음 그림자가 일어섰다 앉았다를 되풀이할 때마다 다가가던 그림자는
해안절벽을 휘감고 지나가는 바람에 너울거리듯 암벽에 접근했다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천지백과 설백이 사슴을 먹으러 돌아왔다.
하지만 이상하다.
전날 밤 사이좋게 공놀이를 하던 다정함은 어디 가고 한 녀석이 다른 한 녀석의 접근을 막고 있다.
혼자 사슴을 뜯어 먹던 녀석이 사슴을 끌고 어둑한 숲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다른 녀석도 따라간다.
웅장한 파도 위로 괴괴한 달빛이 은어 때처럼 반짝인다.
이튼날, 푸른 가지들이 삿갓 모양으로 나지막하게 흘려내린 다복솔 밑에 사슴이 놓여 있다.
뜯어 먹다 만 사슴 옆으로 키 작은 관목이 즐비하고 그너머로 푸른 바다가 펄쳐져 있다.
지난여름, 아비인 하쟈인이 찾아왔을 때 블러디 메리의 가족이 함께 사슴을 나눠 먹었던 장소다.
간밤에 호랑이는 저 으슥한 다복솔밭으로 사슴을 끌어들어 반 남게 먹어치웠다.
렌즈의 초점을 다복솔밭에 맞춰놓고 10분마다 켜 보았다.
오후 4시경, 다복솔밭 저쪽에서 천지백이 나타났다.
날씨가 눈이 올 듯 찌뿌듯해서인지, 아니면 아직 철이 없어서인지 놀랄 만큼 이른 시간의 출현이다.
간밤에는 잘 몰랐지만 두 달 전에 비해 한결 자랐다.
갈기가 성성해지고 견갑골도 불쑥 올라온 게 우수리 숲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했다.
독립을 앞둔 이 시기에 암컷과 수컷은 골격과 체격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수컷들은 놀랄 정도로 무럭무럭 자라며 성격도 더욱 대범해진다.
초점을 조심스럽게 천지백에게 맞췄다.
호랑이를 촬영할 때는 항상 눈을 주시해야 한다.
그래야 호랑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며 렌즈를 움직일지 말지 판단할 수 있다.
만약 호랑이의 눈이 화면에서 빠져 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그때는 함부로 카메라를 움직이면 안 된다.
섣부른 상황판단을 미루고 천천히 줌아웃 한 다음,
호랑이의 눈을 다시 확인하고 호랑이가 이쪽에 신경 쓰지 않을 때 카메라 앵글을 조절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본 천지백이 앉아서 사슴을 뜯어 먹기 시작한다.
그때 천지백의 널찍한 등 뒤로 또 다른 형체가 어른거리더니 조심스레 다가온다.
'어~흥, 크르르릉....,'
천지백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뒤돌아서서 소리를 질렀다.
다가오던 설백이 멈칫한다.
천지백은 돌아서서 다시 사슴을 뜯어 먹는다.
먹이 앞에서 사이좋던 두 달 전과는 달리 천지백이 설백을 경계한다.
멈칫거리던 설백이 다시 살금살금 다가온다.
'커~ 흐흥, 크르르릉...,'
천지백이 더 크게 소리 지르며 달려 나간다.
달려 나간 천지백이 차마 물지는 못하고 설백의 얼굴에 콧김을 뿜으며 설골을 올려 위협한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는 듯, 설백은 가까이 마주한 천지백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본다.
천지백이 계속 으르렁거리자 설백이 뒷걸음치며 물러난다.
설백을 멀찌감치 쫓아낸 천지백은 돌아와 다시 사슴을 뜯기 시작했다.
설백은 소나무 둥치의 냄새를 맡는 척하며 천지백을 슬쩍 바라본다.
한참 딴청을 피우는 척하다가 다시 조금씩 다가온다.
다가오는 거 다 안다는 듯, 천지백은 사슴을 뜯으며 뒤도 돌아보지 앉은 채 으르릉거린다.
망설이던 설백이 눈밭에 털썩 주저앉아 물끄러미 쳐다본다.
천지백은 아랑곳없이 남은 사슴을 마저 먹어치운다.
어미 곁에서 사이좋게 먹이를 나눠 먹던 시기는 지나갔다.
천지백에게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런 때가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찾아왔었고,
그 아비의 아비에게도 첮아왔었던, 이 세상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런 시기가 찾아왔다.
봄날 도토리에서 뻗어 나온 참나무 싹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하듯,
지금 이렇게 가까이 있지만 둘은 머지않아 더 넓은 사낭터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일 것이다.
더 성장하면 천지백은 이 지역에서 가장 힘센 수컷, 자신의 아버지이자 왕대인 하쟈인과도 경쟁해야 한다.
하쟈인도 그랬고, 꼬리도 그랬으며, 꾸찌마파도 그랬다.
남매가 사라진 숲에 눈이 내린다.
정물화처럼 서 있는 다복솔 위로 새하얀 눈이 세월처럼 소복소복 쌓여 간다.
비트 속에서도 세월이 흘러간다. (p280)
※ 이 글은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박수용 -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김영사 - 2011.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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