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용 -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눈이 녹는 계절
무전이 들어왔다.
마약 마을사람들이 제보를 해왔다.
앞발이 부러져 잘 걷지 못하는 호랑이 한 마리가 마약호수 인근을 떠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전파를 타고 울리는 소리가 습한 계곡의 메아리처럼 칼칼하다.
마약에 주둔하는 군부대가 떠올랐다.
군부대가 숲에 무인총을 깔 거라는 풍문은 지난 여름부터 있었다.
동시에 부표를 굴리며 놀던 설백과 천지백이 떠올랐다.
최근 이 해안지역에 나타난 호랑이는 이 남매뿐이다.
잠복지를 이탈하기로 마음 먹었다.
작은 배냥에 간단한 야영도구만 챙겨 산맥을 올랐다.
근력이 쇠약해져 금세 숨이 찼다.
허한 몸이 자꾸만 내려앉는다.
산을 세 개 넘자 마약호수가 내려다보였다.
냉랭한 초봄의 기운이 호수의 기운과 섞여 짙고 음울한 안개가 산허리에 걸려 있다.
참나무가 촘촘히 들어선 산비탈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비탈은 산맥의 북사면이라 아직도 눈이 서리처럼 날이 서 있다.
그 하얀 눈밭, 붉은 페인트를 쏟아놓은 듯 홍건한 피 속에 블러디 메리가 누워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앙다문 체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 죽어 있었다.
블러디 메리 옆에 선 어린 참나무가 불어오는 건들바람에 마른 잎을 파르르 떨었다.
귓전이 멍해지며 사고의 공백이 찾아왔다.
머리가 찌르듯 쑤셨다.
블러디 메리의 왼쪽 앞발과 어깨 부위가 자잘하게 찢어져 있다.
피는 그곳에서 흘러나와 굳었다.
산탄총의 흔적이다.
하지만 치명상은 복부에 난 소총의 상흔이었다.
러시아 군용소총 칼빈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총알 하나가 오른쪽 아랫배를 뚫고 들어가 왼쪽 아랫배로 나왔다.
뚫고 들어간 자리는 손가락만 했지만 뚫고 나온 자리는 주먹보다 컸다.
그 구멍으로 핏덩어리와 함께 창자가 빠져나왔다.
흘려나온 피가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마약 사람들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중에 타나도 있었다.
어제 아침,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는 마약호수에서 마을사람 몇 명이 낚시를 했다.
타냐는 낚시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야생오리들이 날아와 얼음물을 헤치며 자맥질도 하고 얼음덩어리와 함께 떠다녔다.
탸냐는 물에 비친 산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이는 오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오리들이 고요하던 수면을 차고 꽥꽥거리며 날아올랐다.
타냐는 고개를 돌려 호수를 한 바퀴 빙 돌아가는 오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으로 호랑이가 들어왔다.
호랑이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호숫가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암바야, 암바가 와요!"
타냐가 소리치자 마을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걸어오던 호랑이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하지만 제대로 뛰질 못했다.
앞다리를 절뚝거렸고 옆구리에는 뭔가가 덜렁거렸다.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자 호랑이는 멈췄다.
그리고는 한참을 호숫가에 서 있다 숲으로 들어갔다.
타냐는 달아나면서도 호랑이를 지켜보았다.
주검을 눈치챈 까마귀 한 마리가 그루터기에 올라앉아 이쪽을 기웃거린다.
먼 하늘에는 검은 점 같은 독수리들이 급강하를 하다가 끝없이 펼쳐진 하는 위로 다시 솟구친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교차하는 모습이 훨훨 자유롭다.
블러디 메리는 눈 속을 헤매다 기력이 다해 이 자리에 이렇게 누웠다.
누운 채 뒷발로 눈더미를 차고 앞발로는 긁었다.
끊기려는 막바지 숨을 그 뒷발질의 여력으로 몰아쉬었을 것이다.
부릅뜬 눈에 마지막 순간의 안간힘과 고통이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자연이 휴식을 주는 그런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블러디 메리의 이마를 쓸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수염이 뻣뻣했다.
손등을 스쳐가던 전율이 다시 흘렀다.
가만히 눌러 눈을 감겼다.
쓰러진 블러디 메리 주위를 다른 호랑이 발자국이 맴돌았다.
하나는 작고 하나는 크다.
어미의 죽음을 지켜봤는지 뒤늦게 주검을 발견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남매는 어미 곁을 서성이며 오래 머물렸다.
주변은 남매의 발자국으로 가득하고, 어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눈밭에 엎드려 있었던 자국도 여럿이다.
어미 곁을 맴돌던 남매의 발자국이 결국 어미를 떠났다.
큰 발자국 위에 가끔 작은 발자국이 겹쳐졌다.
천지백이 앞장서고 설백이 뒤따랐다.
산등성이를 가로지르며 오르던 남매의 발자국이 산중턱에 멈췄다.
설백이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뒷발을 양옆구리에 붙인 채 가만히 엎드렸다.
눈밭에 선명하게 찍힌 스핑크스 자국은 산비탈의 어미를 향하고 있다.
그 주위를 천지백이 돌며 서성였다.
천지백이 길을 재촉하자 설백이 다시 따라나섰다.
발자국이 산등성이를 넘어 사라졌다.
남매는 그렇게 어미와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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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
어깨가 시려 눈을 떴다.
아침 안개가 강과 숲으로 꿈틀거리며 내려왔다.
점점 짙어지더니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죽음처럼 가라앉은 적막이 호젓하게 흐르는 강물을 타고 흐른다.
강 건너편 안개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발굽에 자갈이 채이더니 첨벙거리며 강으로 들어선다.
뿌연 안개 너머로 우수리 사슴 서너 마리가 물살을 가르며 강을 건너고 있다.
어린 새끼를 데리고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새벽 정적을 울리며 멜로디처럼 들려온다.
숲은 날이 갈수록 열기가 차오르며 여름이 빠르게 무르익었다.
강의 상류로 올라갈수록 짐승들의 흔적이 눈에 많이 뛴다.
잣나무 숲을 낀 개울을 따라가다 오솔길 옆의 너럭바위에서 배냥을 벗고 휴식을 취했다.
흑빵과 소시지를 잘라 허기를 채우고 맑은 개울물로 목을 축였다.
스테파노비치는 너럭바위에 드러눕더니 이내 코를 곤다.
나도 바위에 걸터앉아 피곤한 몸을 맥없이 늘어뜨리고 전방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아람드리 잣나무들이 즐비하다.
향기로운 잣 향이 흘려왔다.
그때 5~6미터 앞의 잣나무 뒤에서 둥그스름한 무언가가 스르르 밀려나왔다.
멍한 내 시야에 털북숭이 얼굴 하나가 들어오더니 또렷해졌다.
눈빛이 불타는 듯 깊었다.
호랑이었다.
호랑이는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머리가 무척 크고 골격이 우람했다.
갈기도 성성하고 풍채가 남달랐다.
직감적으로 '왕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호테알린 산맥의 정령, 하쟈인이었다.
왕대의 눈 빛은 무심한 듯 이글거렸고, 뚫을 듯 나에게만 집중되었다.
들킨 자의 눈빛이 아니라 확인하는 자의 눈빛이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왕대가 살짝 씰룩였다.
허튼짓하지 말라는 암묵의 경고였다.
그 씰룩임이 내 몸에 남아 있던 기운을 마저 앗아갔다.
왕대가 잣나무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육중한 전신의 웅자(雄姿)가 드러났다.
왕대는 잣나무에서 오솔길까지 사선으로 천천히 걸으며 계속 나를 주시했다.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왕대와 눈을 마주쳤다.
왕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으려니 심리적 마비 현상과 함께 팽팽한 긴장으로 온몸이 바늘로 찔리듯 찌릿찌릿했다.
왕대는 나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인지해 놓겠다는 듯 오솔길로 접어들 때까지 단 한순간도 내게서 눈을 때지 않았다.
그 무심한 시선에 다가가서도 안 되고 멀어져서도 안 되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느꼈다.
오솔길로 접어들자 왕대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앞을 보며 묵묵히 오솔길을 걸어갔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숲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나는 갑자기 초라해졌다.
무시당한 기분이랄까,
허탈한 기분이랄까, 왕대의 시선이 거두어진 순간부터 나 자신은 이미 초라해져 있었다.
월백은 새끼들과 엎치락뒤치락 뒹굴면서도 바깥세상과 가족 사이에 경계를 두어, 안과 밖을 뚜렷이 구분했다.
경계의 바깥은 마음의 밖으로 내쳐서 거리를 둔 냉정한 공간이었지만,
경계의 안쪽은 가족끼리 마음을 주고 받는 온화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바깥세상을 향해 긴장하고 절제했으며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경계의 안에서 월백은 강아지처럼 순수했다.
새끼는 평화로웠고 어미는 다정했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온전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호랑이를 무섭고 용맹하게만 생각하지만, 이렇게 평화롭고 다정한 모습이 호랑이의 일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사람들은 호랑이에게서 강렬하고 자극적인 모습을 찾는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배를 드러내고 뒹구는 모습을 보면 시시해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월백의 가족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이 가슴 떨리는 삶의 절정이다.
암호랑이가 야생에서 새끼들과 뒹굴며 노는 모습은 자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불 수 있다.
가장 은밀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만 암호랑이는 자신의 내밀한 가정사를 언뜻 보여준다.
지금 나 자신, 자연의 객체로 온전히 녹아들었음을 느낀다.
봄을 재촉하는 햇살이 텅 빈 은빛 빙판에 보슬보슬 흩어진다.
그 너머 맨살을 드러내고 빽빽이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옅은 빙무가 걸려 있다.
예부터 호랑이가 살아왔던 우수리의 밀림,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밀림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호랑이는 살아가고 있다.
월백의 어미와 그 어미들이 그래왔듯이
월백의 자식들도 이곳에서 새끼를 낳고 무사히 길러내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p419)
- 끝 -
※ 이 글은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박수용 -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김영사 - 2011.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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