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인호 - 사랑의 기쁨」
<사랑의 기쁨>은 1995년 봄부터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그동안 <허수아비>와 같은 현대소설을 쓴 적이 없던 것은 아니나 연재소설로 말하면
<겨울 나그네> 이후 10년 만에 쓴 현대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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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최대의 꿈은 뭐니뭐니해도 가장 아름다운 로망의 소설을 쓰는 것이다.
로망이라면 남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쓰는 직업인데,
따라서 이를 로맨스(Romance) 혹은 연가(戀歌)라고 부른다.
연가, 즉 사랑노래는 소설가에게만 국한된 꿈이 아니라 모든 작곡가, 화가, 영화감독,
시인들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모든 창작의 예술혼인 것이다.
<겨울 나그네>는 갓 사십에 접어들었던 내가 이처럼 로맨스를 쓰고 싶어서 집필했던 작품이었다.
그떄 나는 아름다운 한 청년의 모습을 통해서
누구나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순수한 첫사랑을 그려 보려고 노력했었다.
제목을 <겨울 나그네>라고 했던 것은,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는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연가곡에서 따온 것이었다.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그 그늘 밑에서 단꿈을 꾸며 가지에 희망의 말 새겨놓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가던 보리수나무와 같이
우리가 나이 들고 지칠 때면 인생의 긴 회랑을 거슬러 올라가 청춘의 문을 열고 찾아가는
그러한 늘 푸른 나무와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이
<겨울 나그네>를 쓸 때의 작가로서의 집필 의도였던 것이다.
<사랑의 기쁨> 역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즉 로맨스를 쓰고 싶다는 것이 내 처음의 창작 의도였었다.
다만 달라진 것은
그동안 10년의 세월이 흘렸으며 또한 처음에 쓴 것처럼 가톨릭에 귀의한 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가 사랑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나도 모른다.
모든 작가에게 있어 사랑이야말로 불멸의 소재라면 비록 10년의 짧은 시차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하늘과 땅만큼의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시점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처럼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만 하는 영원한 테마이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빛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 스스로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 자신은 변화하지 않은 채 다만 붓으로만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이는 인간을 병들게 하는 왜곡된 거짓 사랑인 것이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인위적인 줄거리 역시 거짓이다.
사랑이란 단순한 것이다.
진리가 단순한 것처럼 사랑도 단순한 것이다.
엄마와 딸, 엄마와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한 남자.
이 세 사람이 펼쳐보이는 실내악과 같은 단순한 현악 삼중주,
그것이 <사랑의 기쁨>을 쓸 때의 내 기본적인 테마였다.
성프란치스코가 애기했던가.
'꽃잎은 떨어지지만 꽃은 영원히 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여성은 죽지만 엄마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또한 모든 사랑 이야기는 변화한다 해도 사랑 그 자체는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랑은 영원한 고전이다.
마치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하기 전에도 그곳 그 자리에 대륙은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그 대륙을 발견했을 떄야 비로서 그 대륙은 아메리카 대륙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긴 향해 끝에 대륙을 발견한 사람만이 '신세계(新世界)'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신세게를 발견한 사람만이
상처에서 치유될 수 있으며 비로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의 발견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길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하는 길이며 그리고 기쁨인 것이다.
<사랑의 기쁨>
나는 이 소설을 통해서 사랑이야말로 '기쁨'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그려 보이고 싶었었다.
사랑함으로써 고통과 인내와 희생을 겪게 되지만
결국 그러한 고통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나타내 보이고 싶었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는
태양을 향해 날아가면 갈수록 백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 바다에 떨어져 숨을 거두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나는 작가야말로 태양을 향해 달려가는 이카로스와 같다고 생각한다.
다가가면 갈수록 날개가 녹아 추락하여 바다에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지만
모든 작가에게 있어 사랑이란 좀더 가까이 갈 수밖에 없는 태양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 소설 <사랑의 기쁨>이 태양을 향해 출발하는 이카로스 비상(飛翔)의 원점이길 바란다.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될 수많은 독자들과
이 책을 출판한 내 아우 성봉이와 '여백'의 모든 식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1997년 봄 해인당에서
최인호
최인호 - 사랑의 기쁨(상)
여백 - 1997.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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