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용 -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폭풍의 정령, 테무
악수 같은 비를 맞으며 용의 등뼈를 기어올랐다.
강물 속을 걸어가듯 흠뻑 젓고 나니, 어느덧 장대비를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산맥 정상을 넘고 나사야 겨우 동굴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굿은 날씨라 동굴 속은 음침하다.
깊이는 4~5미터쯤, 작은 동굴은 아니지만 텐트를 치기에는 폭이 좁다.
배냥을 벗고 한숨을 돌렸다.
발로쟈 부부를 보니 물에 빠진 생쥐꼴이다.
다행히 동굴 안쪽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낙엽 안쪽에 큰 짐승이 누워있었던 자국이 어렴풋이 보인다.
황갈색 털도 떨어져 있다.
호랑이가 쉬어간 자리다.
우리보다 먼저 용위 등뼈를 올라간 왕대일까? 오소리 발자국도 보인다.
이 녀석도 우리처럼 여기서 쪼그리고 앉아 비를 피했겠구나 생각하니 친근감이 느껴진다.
짐승이나 인간이나 자연에서는 같은 신세다.
낙엽을 끌어다 불을 피우고 젓은 옷과 몸을 말렸다.
매운 연기가 동굴 안에 꽉 차 눈알이 빨게진다.
연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공기가 차츰 따뜻해진다.
빗물을 받아다 차를 끓이고 간단한 요기를 마쳤다.
발로쟈가 모닥불에 담배를 댕겨 문다. 갈리나가 호랑이굴에서 담배냄새를 풍긴다고 타박을 한다.
발로쟈는 아랑곳없이 행복한 표정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결국은 모두 침묵에 빠져들었다.
세상을 날려버릴 듯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지는 장대비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쉽게 그칠 태풍이 아니다.
숲 속 생활을 하다보면 갖가지 자연의 느낌에 젖어든다.
정제된 새벽공기,
늪 같은 아침안개,
적막한 정오 햇살,
부드러운 저녁바람,
얼어붙은 동토의 푸른기운,
화려한 설국의 하얀 눈꽃...
동굴 속에서 바라보는 저 폭풍우는 장엄하다.
폭풍우 치는 자연에서 바라본 동굴 안은 어떨까? 격리된 아늑함!
낙엽을 끌어다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폈다.
침낭 속으로 기어들자 잠자리가 제법 안락하다.
폭풍우 소리도 잠자리의 운치를 돋구워준다.
내가 누워 있는 이 자리에 누워 있던 호랑이는 누구일까?
블러디 메리의 가족은 이 폭풍우를 어디서 피하고 있을까?
내 마음속 상상의 나래가 바깥세상의 소란스러움과 섞여 아득해지더니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안개 속의 사슴 사냥
태풍이 지니가자마자 사냥에 나선 블러디 메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태풍 직후의 짙은 안개와 발자국 소리를 줄여주는 젖은 숲을 사냥에 이용했다.
우수리 사슴 모녀가 그 희생물이 되었다.
달아난 새끼사슴은 새끼호랑이가 잡았다.
새끼호랑이 중 발자국이 제일 작은 암컷이 70~80미터 떨어진곳에서 새끼사슴을죽이고 이리로 끌고 와 뜯어 먹었다.
질퍽한 호랑이 발자국에 고인 흙탕물이 흔들리고 있다.
블러디 메리의 가족은 방금까지도 사슴을 뜯어 먹고 있었다.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듣고 자리를 피한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개만 자욱하다.
숲 속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우리의 기척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가족이 안심하고 돌아와 사슴을 마저 먹을 수 있도록,
간단한 조사만 마치고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넓은 강가로 물러났다.
강을 따라 내려가며 우리가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블러디 메리에게 호랑이만 쫓아다니는 사람으로 인식되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우연히 마주쳤거나 그냥 지나가던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좋다.
이곳에 오래 머물며 샅샅이 조사할 때와 기본적인 사실만 슬쩍 쳐다보듯 조사하고 지나갈 때는 분명 다르다.
야생호랑이는 그 차이를 감지하고 다르게 반응한다.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도 주인의 행동과 표정을 보고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자기를 예뻐하는지 싫어하는지 금방 알아차린다.
영민한 야생의 호랑이는 말할 것도 없다.
저 인간들이 왜 왔을까?
우연일까?
의도적일까?
사람의 행동과 표정, 그리고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으로 이런 것을 감지하고 경계하며 어떤 때는 공격한다.
내가 아는 절간 향나무에 어치가 둥지를 튼 적이 있다.
어떤 녀석인가 궁금해진 스님이 둥지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때 알을 품고 있던 어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스님은 남의 안방을 들여다본 듯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둥지 옆을 지나 다녀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어치도 스님이 둥지 옆을 왔다 갔다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치는 새끼를 무사히 다 키워나갔다.
친구네 정원에도 물까치가 둥지를 튼 적이 있다.
연한 파란색의 무늬와 긴 꼬리의 물까치가 너무 아름다워, 친구는 오며 가며 둥지를 자주 들여다 보았다.
얼마 후 물까치는 둥지를 포기하고 떠나버렸다.
둥지 안에는 곪은 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자연은 눈으로 다 볼 수도 없고, 다 보아여 할 필요도 없다.
스님이 어치 새끼를 보지 않고도 잘 크려니 믿는 것,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호랑이가 보고 있다는것을 믿고 자제하는 것,
눈으로 보지 않아도 믿는 이런 마음이 중요하다.
스님이 어치에게 무심하면 어치도 스님에게 무심해지고
우리가 호랑이에게 무심하면 호랑이도 우리에게 무심해진다.
우리에게 호랑이 조사는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지만,
호랑이에게 우리의 행동은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자연에서는 필요 없는 파문을 일으키는 것을 삼가야 한다.
숲에서 인간이 가장 자연스러울 때는 인간답게 행동하지 않고 동물답게 행동할 때다.
인간이라는 한 종족의 규칙이 아니라 모든 종족에게 해당하는 자연의 규칙으로 다른 종족을 바라보는 것,
그러면서 자연에 길들어지는 과정, 이것이 이동 관찰의 묘미다. (p133)
강한 새끼만 키운다
눈을 떴다.
작은 새들이 조용히 지저귀고 있다.
텐트 입구를 열어젖히자 텐트 위에서 새벽 이슬이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은은한 안개 밑으로 강물이 흐른다.
강가로 나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호랑이 발자국이 나 있었다.
숲에서 걸어 나온 발자국은 갈리나가 자고 있는 텐트 앞에 멈춰다가
방향을 바꿔 나와 발로쟈가 잔 텐트를 두 바뀌 돈 다음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잠든 사이 블러디 메리가 다녀갔다.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놀라운 일도 아니고 그녀의 영토에 들어온 이상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우리 주변을 맴도는 집요함이 놀랍다.
블러디 메리는 간밤에 세끼들을 떼어놓고 홀로 숲 속에서 우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을 기다려 조심스럽게 걸어 나와 살펴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데 자신의 영토에서 얼쩡거리는지,
위험한 쇠붙이 냄새는 나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우리 텐트를 두 바퀴나 돌았다.
하지만 갈리나의 텐트에는 잠깐 멈춰 서서 냄새만 한 번 훅 맡고 지나갔다.
고리드인 둔까이는 사냥꾼이자 호랑이를 그리는 화가다.
그는 호랑이가 사람을 분별한다고 했다.
"고리드는 호랑이에게 총을 쏘지 않아요.
그건 우데게도 마찬가지죠.
호랑이에게 총을 쏘면 그 사람은 평생 호랑이에게 쫓기게 됩니다.
고리드는 숲에서 늘 나무지팡이를 짚고 다녀요.
호랑이는 지팡이 소리를 들으면 고리드인 줄 압니다.
고리드들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지팡이를 든 사람은 경계하지 않죠.
하지만 총을 들고 다니는 러시아 사냥꾼은 경계합니다.
예의주시하다가 여차하면 공격하죠."
호랑이는 일반인과 사샹꾼을 구분한다.
심마니가 둘러멘 망테기와 사냥꾼이 둘러멘 사냥총을 구분하고,
입고 있는 복장이나 화장품 냄새, 담배냄새 등으로 남자와 여자도 구분한다.
여자보다는 남자가 훨씬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블러디 메리가 갈리나의 텐트는 신경쓰지 않고 우리 텐트만 두 번 둘러보고 간 이유다.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새끼를 데리고 있다.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암호랑이는 무서울 정도로 예민하다.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분명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저 숲 속 어딘가에서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녀의 의심을 사는 행동은 하지 않기로 했다.
블러디 메리의 가족을 남겨두고 우리는 샤우카로 이동했다.
강물이 많이 줄었다. (p146)
※ 이 글은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박수용 -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김영사 - 2011.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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