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용 -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해골분지의 암호랑이
넓은 분지에 굴참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바닥에 누런 가랑잎과 굴참나무의 거무스름한 껍질, 마른 풀들과 주변의 갈대밭.....
호랑이의 보호색이 잘 발휘되는 장소다.
은신하고 사냥하기에 안성마츰이다.
봄철, 참나무의 마른 잎을 주워 먹으며 해안으로 내려오는 사슴들이 주로 이 숲에서 당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호랑이가 죽인 사슴의 두개골과 허연 뼈다귀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해가 맑고 바람이 잠잠한 날,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마른 낙엽이 담요처럼 깔린 숲이 안락하니 나른해지고 금방 졸음이 쏟아진다.
잠이 들게 하는 분지다.
하지만 해변에 안개라도 몰려오는 날이면, 젖은 굴참나무의 칙칙한 껍질이며
곳곳에 널려 있는 사슴 뼈다귀와 두개골들이 어둑한 우윳빛 안개와 어울려 괴기스러움을 더한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죽은 사슴들의 원혼이 스멀스멀 살아나와 물끄러미 쳐다보는 듯도 하고,
블러디 메리가 소리 없이 다가와 금방이도 덮칠 것도 같다.
왠지 무섭고 축축해서 지나가기 싫은 안개다.
해마다 이곳을 지나야하는 우수리사슴들에게는 더할 것이다.
그래서 타친코 해안의 이 분지를 해골분지라고 부른다.
최근 한 달 이내에 죽은 사슴의 두개골도 두 개나 보인다.
대부분은 블러디 메리의 짓일 것이다.
그녀가 사슴 뼈다귀를 깨끗이 발라먹지 않고 살점을 남기는 이유를 알겠다.
무서운 타친코의 봄이다.
올듯 말듯하던 봄이 왔다. 그 한발 앞에서 쓰러졌다.
우수리사슴들에게는 공포의 장소지만, 그들이 해안으로 이동하는 봄철,
해골분지를 포함한 라조 동해안 지역은 블러디 메리가 새끼를 낳아 기르기에 더없이 좋은 영토다.
그녀가 새끼를 잘 키우기로 소문난 또 다른 이유다.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훅 불어내는 콧김의 감촉이 그녀의 길고 뻣뻣한 수염과 함께 나의 왼손 등을 스쳐가고,
마침내 그녀의 죽음까지 목격하리라고는,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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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테알린 산맥의 정령
배냥을 메고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수호이 개울을 따라가면 용의 등뼈가 나오고 용의 등뼈를 넘으면 동해안에 못 미쳐 미지네츠 강 상류가 나온다.
미지네츠는 새끼손가락이란 뜻으로,
다섯 개의 강이 마치 다섯 손가락을 펼친 것처럼 흐르는 곳이 있는데 그중 새끼손가락에 해당하는 강이다.
새끼손가락 강은 남쪽으로 흐르다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과 합류하고,
다시 작은 강 샤우카(小河)와 만나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직선으로는 5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숲을 좌우로 폭넓게 오르내리며 꼼꼼히 관철하려면
200~300킬로미터는 족히 움직일 각오를 해야 한다.
스테파노비치는 우랄을 몰고 다섯손가락 강 하류로 갔다.
그곳에 우랄을 세워놓고 강을 따라 올라오며 조사할 것이다.
블러디 메리가 새끼를 데리고 다닌 흔적은 과거에 여러번 목격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숲을 매일 다니는심마니들이라면 우연히 한 번 마주칠 법도 하지만,
특유의 조심성 때문에 그녀는 오랫동안 미지의 얼굴로 남아 있다.
블러디 메리의 영토에 인접한 마을을 찾아 다니며 새끼호랑이의 발자국을 본 사람들을 수소문해 본 결과,
그녀는 대략 7년 전과 4년 전에 새끼를 낳았다.
7년 전에는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아 무사히 독립시켰고, 4년 전에는 무려 네 마리를 낳아 길렸다.
기르는 도중 한 마리를 잃었지만 세 마리의 흔적은 독립할 때까지 그녀 곁에 남아 있었다.
우수리호랑이는 세 살쯤 되면 첫 새끼를 낳아 2년에서 2년 반쯤 키워 독립시킨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블러디 메리는 대략 열 살 정도 된 노련한 암호랑이다.
정상적인 짝짓기를 했다면 지금쯤 세 번째 새끼를 데리고 다닐 시기다.
과연 새끼가 있는지, 있다면 몇 마리인지 궁금했다.
이번 관찰조사의 목표는 블러디 메리다.
블러디 메리를 직접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 흔적을 찾아내고 조사해서 그녀의 현 상태에 대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이 목표다.
예로부터 우수리 원주민들은 한 지역에서 가장 강하고 전성기에 있는 수호랑이를 왕대라고 불렸다.
시베리아 호랑이의 줄무늬는 어릴 때는 가늘게 퍼져 있다가 자라면서 체격이 장대해질수록 굵고 선명해진다.
다 자라면 검은 줄무늬가 이마에는 임금 王 자로, 등줄기로 넘어가는 뒷덜미에는 큰 大 자로 선명하게 나타난다.
줄무늬가 가늘고 면도날로 잘라낸 듯 날카로운 열대지방 호랑이와는 달리
줄무늬가 굵고 선명한 시베리아 호랑이만의 특징이다.
특히 암호랑이 보다 체격이 월등히 큰 수호랑이, 그 중에서 가장 크고 힘센 수호랑이에게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데게에게는 왕대와 관련된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그들의 선조인 누르하치가 만주로 사냥을 나갔다.
그때 부하들이 큰 호랑이 한 마리를 그물로 사로잡아 누르하치에게 바쳤다.
누르하치는 그 호랑이를 살펴보다 이마와 등의 줄무늬가 '王大'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심상치않게 여긴 누르하치는 호랑이를 풀어주웠고, 이후 사냥을 나갈 때는 꼭 왕대에게 고사를 지냈다.
그 후 누르하치는 후금(後金)을 세웠고 후손들은 중화민족(漢族)을 복속시켜 청나라를 건국했다.
우데게와 고리드는 퉁구스족의 종교관과 우주관을 지키는마지막 남은 정령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이 세상이 위의 세계(上界) , 중간세계(中間界) , 아래세계(下界) ,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다.
위의 세계는 대정령(大精靈)들이 사는 하늘 세계고, 중간세계는 사람과 자연의 정령들이 사는 땅의 세계며,
아래세계는 죽은 자의 영혼이 사는 지하 세계다.
이 세 개의 세계는 엔그제킷 강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로 친다면 황천강(黃泉江)이다.
위의 세계에는 최고의 신 '엔두리'와 대정령들이 살고 있다.
엔두리는 하늘과 땅과 인간세상의 조화를 관장하는 하늘의 대정령이다.
이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추위와 번개 같은 악마와 싸우며,
중간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숲과 물의 대정령을 중간세계로 내려 보낸다.
물의 대정령은 '테무'다.
테무는 바다와 강을 다스리는 책무를 맡고 있다.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테무도 자신에게 속한 정령을 사자로 보낸다.
예를 들면 아무르 강을 다스리기 위해 칼루가를 사자로 보내는데,
칼루가는 해마다 5월이면 산란을 위해 오호츠크 해에서 아무르 강으로 올라오는 철갑상어다.
이 칼루가는 덩치가 커서 5미터에 500킬로그램은 족히 넘는다.
아무르 강가에 사는 나나이들은 이 칼루가를 잡으며 살아 왔다.
하지만 테무가 보낸 사자로 존중해 자신들이 먹을 만큼 이상은 잡지 않았다.
특히 알을 가진 암컷의 경우, 잡는 수를 더욱 제한했고, 잡고 나서도 칼루가의 영혼을 위로하는 속죄의식을 치렀다.
중간세계는 사람과 자연물들이 살고 있는 땅의 세계다.
자연은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존재이며, 그 속의 모든 자연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 영혼들의 대표는 물의 정령, 불의 정령, 바람의 정령, 바위의 정령, 물고기의 정령 등 정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데게와 고리드의 삶에 가장 깊숙이 배어 있는 것이 이 정령주의(Animism)다.
'암바'는 엔두리가 만물과 인간세상의 조화를 유지하고
그 기운을 서로 소통시키기 위해 중간세계로 내려 보낸 숲의 대정령이다.
암바는 숲의 모든 정령들과 교류하며 인간과 기운을 나눈다.
만물에 영혼이 존재함을 믿어온 우데게와 고리드는 암바를 숲의 신으로 숭배한다.
암바는 '제일 힘센 자'란 의미의 우데게 말로, 우수리 숲을 다스리는 호랑이를 말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 센 우두머리가 왕대다.
우수리 원주민들에게 왕대들이 사는 시호테알린 산맥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자 정신적 지주다.
그들은 시호테알린 산맥을 '쿤카 캬마니', 즉 '잠자는 영혼'이라고 부른다.
라조 지역의 한 우데카가 쿤카 캬마니를 다니다 어느 날 엄청나게 큰 수호랑이와 마주쳤다.
그 후 우데게들은 이 호랑이를
'쿤카 캬마니의 하쟈인', 줄여서, '하쟈인(정령 또는 주인이라는 뜻)'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지금 라조 지역의 왕대인 '시호테알린 산맥의 정령'이다
왕대는 네다섯 마리의 암호랑이를 거느린다.
움직이는 면적이 보통 2.000평방킬로미터이고 영역의 둘레는 200킬로미터 정도다.
하지만 그 영역의 최대 크기는 아무도 모른다.
하바로프스크 지역의 한 왕대는 2.000킬로미터 떨어진 바이칼 호수에서 발견되었으며,
또 다른 왕대는 2.500킬로미터 떨어진 시베리아의 중심부 야쿠트(Yakut)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나는 이렇게 멀리 움직이는 호랑이를 광개토호랑이라고 부른다.
광개토호랑이들의 영역 크기는 섣불리 말할 수가 없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도 거리끼지 않는 호연지기 때문일까?
왕대들만의 특징이다. (p59)
※ 이 글은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박수용 -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김영사 - 2011.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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