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최인호-영혼의 새벽/제 9 장 성야(聖夜)

by 탄천사랑 2022. 3. 10.

최인호 - 「영혼의 새벽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성당 안은 한 줌의 빛도 새어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모든 신자들은 침묵하고 서 있었다.
어둠이 사람들에게서 소리를 앗아간 것일까.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지 않고 정적 속에 서 있었다.
아내는 어둠 속에서 그의 옆구리를 가만히 찔렸다.
그는 아내가 내미는 초를 받아들었다. 부활초였다.


이 부활초는 이제 잠시 후면 시작될 '빛의 예식' 중에 신부가 들고 입장하는
부활 촛불로 인해 점화된 후 불활을 찬성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될 것이다.
어둠을 이기고 세상의 빛이 된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축복의 의미로 성야(聖夜)를 밝히게 될 것이다.
--


이윽고 성당 밖에서부터 침묵 가운데 무슨 소리가 일어났다.
부활을 상징하는 백색의 제의를 입은 신부가 불을 축성한 후 부활초에 불을 댕기고

서서히 성당 안으로 입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돌연 빛이 스며들었다.
성당 입구 쪽으로부터였다.
부활초를 앞세우고 입장하여 들어오는 빛의 행렬이 시작된 후 어둠을 찢고 빛이 부챗살을 펴들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소리쳐 외치는 신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스도의 빛" 신부의 목소리에 화답하여 전 신자들이 합창하여 외쳤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키 큰 부활초에는 십자가 모양이 새겨져 있었고 알파와 오메가의 글자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  이는 희랍 문자의 첫 글자이자 마지막 글자인 것이다.
'요한묵시록'은 그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의 행적대로 갚아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 -"


부활초에 새겨진 알파와 오메가의 표시는
예수 스스로 말하였던 처음과 마지막 또한 시작이며 끝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문양인 것이다.
---


아내는 1년 동안 이 부활초를 사용할 것이다.
목주 기도를 거의 하루도 빼어놓지 않은 아내는 기도할 때마다 이 부활초를 사용하고 있었다.
결혼기념일 같은 때에도 아내는 항상 이 부활초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내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때에도

혼자 있을 때면 이 부활초에 불을 밝히고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기를 좋아하였다.
때문에 두터운 부활초는 1년 뒤 새로운 부활절이 가까이오면 몽당초로 짧아져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이 새로운 부활초로 새로운 1년을 맞이할 것이다.
---


그렇다. 예수는 분명히 살아났다.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하였다.
오늘이 바로 예수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그 거룩한 밤인 성야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앙 제단 위에 자신의 모습을 드려낸 청동 십자가상을 우러러보면서 생각하였다.
과연 예수는 부활하였는가.
여전히 예수는 저 십자가상 위에서 처참하게 못 박혀 죽어 있지 아니한가.


그는 불을 붙인 부활초를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광명'을 상징하기 위해서 밝힌 부활초의 촛불.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의 광명이 내 마음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일끼.
---


그렇다면 예수는 무죄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직전 예수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유언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는 자신이 우리에게 그토록 열심히 가르친 대로
자신이 해야 할 용서를 하느님 아버지에게 미루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자가에 매어달린 청동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머리 속으로 번득이는 영감이 떠올랐다.


예수가 우리들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고 말한 것은

이웃을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인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하고 기원하였던 것은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임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여라.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
예수는 우리에게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이다.
하느님에겐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없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모두 창조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똑같이 햇빛을 주신다.
또한 하느님에게는 옳은 사람도 옳지 못한 사람도 없다.
역시 하느님은 옳은 사람도 옳지 못한 사람도 자신이 직접 창조한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이렇듯 용서는 오직 하느님의 몫인 것이다.
인간은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며, 이웃에게서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겨난 이후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고 사랑받는 존재이므로,
이것이 바로 종교의 모순을 밝혀주는 중요한 열쇠인 것이다.
무신론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신을 조롱한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왜 이 세상이 이처럼 타락과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가 반문한다.
그러나 그 해답은 간단하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옳은 사람도 옳지 못한 사람도 여전히 사랑하고 용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여전히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있는 청동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하였다.

 

인간은 과연 인간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일까.
용서는 오직 하느님의 몫이므로 인간은 감히 원수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해서 용서할 수 없는 인간에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말로 용서야말로 불가능한 일임을 암시하고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하는 유언을 함으로써 용서야말로
하느님의 권한임을 분명히 못 박았던 예수는 어째서 인간들에게 '원수를 사랑하여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순간 머리를 흔들며 전율하였다.
인간은 원수를 용서할 수 있다.
원수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똑같이 비를 맞고 똑같이 햇빛을 받는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용서인 것이다.
인간의 용서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존재이자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의 용서는 행위가 아니라 발견(發見)인 것이다.
그 어떤 원수도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임을 발견하는 바로 그 길만이
우리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의 시작인 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의 용서는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너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영철 역시.
그는 머리속으로 무엇인가 용암처럼 뜨거운 열기가 분출되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인 것이다.
하느님은 신영철을 사랑하고, 신영철에게 똑같은 비를 내려주시고, 똑같은 햇빛을 내리쬐어주신다.
신영철은 내게 있어 원수일지라도 하느님으로부터는 이미 용서받은 자인 것이다.


순간 그의 머리 속으로 끓어오르던 뜨거운 열기가 촉촉한 물기가 되어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뜨거운 눈물이었다.
눈물이 그의 눈에서 굴러떨어지고 그의 얼굴은 젖어들고 있었다.


눈물은 계속 그의 두 눈에서 흘려내렸다.
이제는 손등으로 흘려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그래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신영철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자신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할지라도 내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은 이미 나를 용서하고 계신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말한 것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하느님의 용서를 인정하라'는 뜻인 것이다.

 

그때였다 .
무엇인가 가슴에 맺혀 있던 바윗덩어리와 같은 분노의 감정들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용해되어
녹아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그는 받았다.
그 바위덩어리들은 수없이 많은 세월 동안 그의 가슴 속에서 지층을 이루고 시시각각 밀려드는
분노의 강물 속에 침전된 퇴적물들이 쌓여서 마침내 딱딱한 암벽을 이루었던 화석들이었다.
그 화석들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증오와 원망으로 퇴적되었던 암반들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졌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예수의 시체가 묻혔던 동굴의 입구를 가렸던 큰 돌이 단숨에 굴러내리듯
그의 마음 속에 깃들었던 캄캄한 동굴의 입구가 단숨에 열리고 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감히 그는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눈부신 광명이었다.


점안(點眼)
하나의 불상을 만들고 나서 그 눈에 점을 찍어 눈동자를 만들어야만 그 불상이 완성되듯
그가 만든 예수라는 불상에는 예수의 눈동자가 존재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오늘 비로소 예수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이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가를 그는 보았던 것이다.


그때였다.
그는 순간 세 번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패배를 맛본 후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떠나갔던 악마가 그리스도에게 던진 최후의 유혹이 어쩌면
'무죄한 너를 죽이는 저 어리석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악마의 마지막 유혹이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최후의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게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릴 만큼

번민과 근심에 빠져서 하느님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받은 잔 속에 들어 있는 피.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는 하느님의 준엄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으셨던 예수가 보인 제 3의 침묵은 수백 킬로미터에 걸친 죽음의 행진을 하면서도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향한 마리 마들렌 수녀의 침묵은 결국 그리스도조차도 인간은 모두 용서받은 존재라는
진리를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보인 제 3의 침묵은 오직 용서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은 곧 사랑이라는 진리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함인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신영철은 그를 보자 미소를 떠올리면서 악수를 청하였다.

그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신영철은 그에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저도 부활을 축화합니다.
  인사하시지요.
  이쪽은 제 아내입니다.
  여보, 이분은 사목회장님이신 신영철 가브리엘님."
"안녕하세요."  아내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였다.


이번에는 신영철이 자신이 들고 있던 달걀 바구니를 아내에게 내밀었다.
아내가 달걀 바구니를 받아들기를 기다려 그들은 헤어졌다.
바쁘게 사람들 무리를 벗어나 성당 앞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말고

그는 아내가 든 바구니에서 달걀 하나를 빼어들었다.
그는 달걀 껍질을 벗겼다.


"뭘 하려는 거예요?"
'먹으려고." 그는 달걀 껍질을 벗기면서 대답하였다.
"왜요. 배가 고프세요?"
"아니."
"그럼 뭐가 그리 급하세요."
"부활절 달걀은 두고 보는 게 아니라 먹으라는 달걀이야."

 

마침내 껍질을 다 벗기고 나서 그는 단숨에 달걀을 한입 베어 물었다.

 

"천천히 드세요. 목이 멜 텐데
  성질도 원,
  급하기도 하여라."


아내의 말처럼 목이 멜 정도로 삶은 달걀을 입 안에 한가득 집어넣고 나서
그것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그는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p202)

 

- 끝 -

 

 


최인호 - 영혼의 새벽
문학과지성사 - 2002. 07. 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