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브 하란 -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방송 10초 전, 9초, 8초, .... 3초, 2초, 1초, 타이틀. 그거야! 이제 방송이 시작됐소!'
리즈는 가만히 앉아서 메트로의 눈부신 타이틀이 펼쳐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수백만 번도 더 보았지만 여전히 마음에 드는 타이틀이었다.
그것은 카메라의 눈 모양을 한 투명 인간이 런던 거리를 걸어가면서 빈부의 생활,
문화와 범죄, 정책이나 파티를 지켜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나라 안 도처에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평가를 할 터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정지 화면이 내일이면 ≪TV위크(TV Week)≫지의 표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특종감이오, 리즈!
쉴새없이 전화가 울려대고 있다구!" 그녀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콘래드가 속삭였다.
"국내 일간지에서 온 기자들이 모두 당신을 만나려구 야단들이에요."
매트로의 홍보 직원인 신디가 끼어들며 말했다.
"특집 부록과 여성지에서도 물론이고 말이에요. 이제 당신은 정신없이 바쁘게 됐어요!"
리즈는 의사에게서 아주 나쁜 소식을 듣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발진 프로그램에 마지막 손질을 한 지난 며칠은 악몽과도 같았다.
그녀는 옥스포드 시절보다 훨씬 더 자주 템즈강 위로 떠오르는 새벽을 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만큼 젊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폐기 처분되기 직전의 자동차 같았다.
하지만 사진기자들을 위해,
서둘려 구입한 노란 아라벨라 폴렌 슈트를 입고 강을 배경으로 우아하게 포즈를 취해 주면서,
그녀는 이 옷이 비록 자신을 멋 부리는 멍청이가 된 기분으로 만들긴 했지만
메트로 내에서 뉴스거리가 될 거라고 여겼다.
그 슈트는 그녀가 일 년치 의상비를 몽땅 합한 것보다 더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이었다.
신디가 샴페인 잔을 건네 주자 그녀는 미소를 짓고 기분을 전환했다.
사진기자들이 마감판에 넣을 사진을 들고 뛰어나가자
이번에는 신디가 인터뷰 목록을 들고 다가들었다.
"뛰는 말처럼 정력적인 기분이 돼야 할 거예요!.
오늘은 일간지와 네 건, 내일은 잡지와 두세 건의 인터뷰가 약속됐어요."
"여기 스케줄이 있어요." 신디가 타이핑한 종이를 내밀었다.
"두 시에 <데일리 메일>, 세 시 삼십 분에는 <가디언>, 다섯 시에 <투데이>,
그리고 ITN에서 뉴스를 위해 한 말씀해달래요." 그러더니 신디는 좀 낭패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 이런, <데일리 월드>에서 스테피 월슨 기자도 당신을 인터뷰하려고 해요"
그녀는 용기를 북돋우려는 듯 리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그녀가 다루는 분야는 아니지만, 4백만 독자를 위해서는 거절하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스테피를 잘 아세요?"
"이름만 알고 있어. 심술궂은 마녀라고 부르지, 아마?"
"그래요.
그녀는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라면 자기 앞길에 시체로 산을 만드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요.
아무튼 내일 저녁 당신의 집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어요.
제가 함께 있어 드릴까요?"
"염려할 건 없어." 리즈는 짐짓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그 정도는 해낼 수 있다구."
"그러길 바라요." 신디의 어조는 불안에 잠겨 있었다.
"그래야 할 거예요."
그런 다음 신디는 리즈에게 인터뷰 리스트를 넘겨주면서,
이번 주 <가제트>지에 실린 기사를 리즈가 알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기시는,
<데일리 월드>가 <데일리 뉴스>를 타블로이드판 제 1인자의 지위에서 밀어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
다음날 저녁 스테피 월슨이 집에 올 때까지
리즈는 네 건의 인터뷰를 마쳐서 녹초가 된 데다 신경은 있는 데로 곤두서 있었다.
하루에 네 차례씩이나 똑똑한 척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집에서 그런 여자와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니, 후회막심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는 인터뷰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기로 유명한 작자가 아닌가.
그녀는 자기 집이 공격이라도 받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리즈는 자기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을
스테피가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문을 열고 그녀를 집안에 들여놓았다.
스테피는 맞춤복을 입은 리즈를 한 번 보고는 얼굴 가득 멋진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심으로 결정지었다.
....
그녀의 시선이 코르크 판에 머물렀다.
아하! 그곳에는 모든 직장 주부들의 십계명이 핀으로 꽂혀 있었다.
유모 순번표, 쇼핑 목록, 음악 레슨과 댄스 레슨,
테니슨 레슨을 위해 아이들을 데려가고 데려올 시간표 등등.
맙소사,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다니!
그녀는 3개월 후의 식단표까지 미리 짜 놓고 아이들과 점심 먹는 시간을 예약해 놓으며
격주마다 화요일 밤에는 남편과 섹스! 라고 기록해 놓을지도 몰랐다.
리즈는 스테피의 시선이 코르크 판에 가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스스로를 저주했다.
그녀는 저 목록들을 떼어낼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것을 보면 누구라도 그녀의 생활이 군대나 다름없다고 여길 터였다.
사실 그렇기도 했지만, 하지만 그녀는 스테피 월슨에게 그런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데일리 월드>의 심술궂은 마녀가 저걸로 어떤 사실을 만들어낼 것인가?
"좋아요, 리즈." 그녀는 동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
"텔레비전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이 되신 소감은 어떤가요?"
좋아, 부드럽게 시작하자는 거겠지,하고 리즈는 생각했다.
자, 나의 강령을 잊지말자.
엄마가 된다는 것은 미덕이다.
....
"그 일은 상당히 벅찬 일일 테지요
아이를 갖는다는 건 끝없는 타협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토끼 두 마리를 쫓는다는 데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이따금 리즈는 자신이 있는 대로 당겨진 고무줄 같아서
언제라도 끊어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긴 했지만,
스테피 월슨에게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터무니없는 얘기에요." 리즈는 힘차게 말했다.
....
스테피는 호기심어린 얼굴로 그런 리즈를 지켜보고 있었다.
성공의 대가. 그녀는 그 속에서 풍기는 피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정말 리즈 그녀의 상처는
내면 깊숙이 묻혀서 플리트 거리의 이 염탐꾼의 시선에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걸까?
.... "난 직장에 들어서면 백 퍼센트 온전히 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단지 가정생활의 문을 닫고 잊기만 하면 되니까요"
거짓말, 거짓말이다. 이것은 좋지 않다.
그녀를 가로막자면 화제를 바꿔야 한다. 남녀차별론을 언급해 보자.
"일단 일을 손에 잡으면 난 일에 전념할 수 있어요.
일이 끝난 뒤에 술을 마시는 일도 없죠.
매일 밤 열 시까지 사무실에 있어야 한다는 건 남자들만의 낡아빠진 생각이에요.
남자들은 술을 마시고 허풍을 떠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겠어요?"
하지만 교활한 스테피는 미끼를 물지 않았다.
....
리즈는 잠깐 어떻게 얘기를 이어가야 할지 생각하느라 말을 멈추었다.
일단 시작하자 할말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는 고통과 죄의식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난 지난 석 달 동안 아이들의 잠자리를 돌봐 주지 못했어요.
그게 진실이죠.
운이 좋으면 아침에 삼십 분 정도 아이들을 볼 수 있지만,
그 뒤엔 제이미의 팔을 떼어내고 직장으로 뛰어가야 했지요."
"난 하루에 열네 시간씩 일을 했어요. 그리고도 곧잘 일을 들고 퇴근하죠.
그런 다음엔 밤을 새우곤 했어요.
사실, 난 지칠 대로 지친 데다 끔찍할 정도로 죄의식을 느끼고 있어요.
이따금 난 아이들을 두고 현관문을 닫을 때마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어요."
그녀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사실 난 이런 자리를 잡은 것이 내 평생 최대의 실수가 아닌가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스테피는 뚫어져라 리즈를 쳐다보았다.
클로디아가 이 말을 들으면 오줌을 싸겠군.
"그럼 그 자리가 너무 힘겹다고 여겨진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스테피는 리즈가 내놓을 대답에 처음으로 흥미가 동했다.
리즈는 빈 술잔을 손가락으로 만지락거렸다.
"그렇다면 아마 그 자리를 내놓아야 할 테지요."
"그 전설적인 콘래드 막스란 분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스테피는 콘래드에 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클로디아는 침실에서의 일까지 낱낱이 얘기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모르고 있어요." 리즈는 문득 불안에 사로잡혔다.
"아직은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의 남편도 이 일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스테피는 노트를 접은 다음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리즈가 방금 말한 것을 한 마디라도 뉘우치고 취소하려 하기 전에 먼저 카폰으로 달려가야 했다.
....
낮에 이렇게 쉬러 들어온 그를 본 건 근래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 두 사람 모두에게 섹스는 필요할 터였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던 것이다.
방송이 시작할 때까지만 기다려 줘요.
하고 그녀는 매일 밤마다 웅얼거리면서 골아떨어지곤 했던 것이다.
잠깐 동안 그녀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얘기를 하자고 우겨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런 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과 싸우고 있을 때 문득 어머니가 결혼 생활의 금과옥조로 말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섹스는 결혼 생활을 부드럽게 돌아가게 해주는 엔진 오일과도 같단다.'
그녀는 데이빗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침실에 들어가 보니 데이빗은 벌써 알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샴페인 잔을 두 개 들고 다가왔다.
삼페인을 삼키면서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이 한 일을 얘기하려고 해 보았다.
"지금은 안돼"
하고 그가 속삭였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니, 그대로 있어."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거칠게 슈트의 스커트를 밀어 올릴 때
그녀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그의 흥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가 그녀를 안은 채 몸을 굴리는 바람에
그녀는 그의 위가 아니라 옆으로 비스듬히 눕게 되었다.
여전히 인터뷰를 할 때의 옷차림 그대로 스커트만 허리 위로 밀려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흥분해 있었다.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녀는 문득 어째서 그가 그렇게 흥분하는 것인지를 알았다.
그를 흥분케 한 것은 그녀의 성공이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아내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 그녀는 그의 소박한 감상에, 성공의 열매에 대한 단순한 믿음에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바로 이러한 성공이 그의 활력의 원천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닌지,
자산들의 성공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는 것,
그녀 역시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와 아이들이 치르는 대가를,
그녀는 그의 몸이 절정으로 전율할 때 그의 잘생긴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만일 자신이 스테피 월슨에게 이야기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들 사이에는 커다란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게 될 것임을 알았다.
이제 그가 <월드>를 집어 들고 사실을 알게 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품은 의혹과 두려움에 대해 얘기 해야 한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옆으로 내려왔다.
"여보." 그녀는 그의 매끄러운 등을 어루만지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난 당신이 생각하듯이 이 모든 일에 행복하지 않아요.
실상 지난 며칠 동안 난 이 모든 성공의 제스처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좀 전에 스테프 월슨에게도 그렇게 말했죠.
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데이빗, 당신이 이해해줘야 해요.
데이빗?" 그녀는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두 눈은 감겨 있었고 가볍게 코를 고는 소리가 났다.
그는 깊고 흡족한 잠에 빠졌던 것이다. (p79)
※ 이 글은 <세상은 내게 모든 것을 가지라 한다>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역자 - 한기찬
둥지 - 1992.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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