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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나무/말없는 친구(상)

by 탄천사랑 2022. 6. 27.

(단편집)베르나르 베르베르 - 「나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내 생각도 뭉게뭉게 솟아난다.  나는 너를 잊어 본 적이 없다.  
너는 내 기억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간직되어 있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 여자가 저마다 검은 가죽을 입힌 바이올린 케이스를 손에 들고 건물 앞에 모였다. 
한 여자는 갈색 머리,  또 한 여자는 금발,  나머지 한 여자는 적갈색 머리다.

계제가 계제인지라 그녀들은 옆이 트인 검은 새틴 드레스 차림에 굽 높은 벨벳 구두를 신고 있었다.
적갈색 머리 샤롤로트가 바이올린 케이스에 올려놓은 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긴장돼.  
 너무 떨면 안 되는데"   갈색 머리 아나이스는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나도 너무 긴장돼,  
 이러다 우리 실패하면 어떡하지?"

금발의 마리 냐타샤는 손바닥에 땀이 나서 
바이올린 케이스의 손잡이에 손자국이 나기 시작했음에도 애써 자신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  
 들어가야 해"
"연습한 대로 잘해야 할 텐데, 
 네가 뭔가를 깜빡할 지 모르니까 그렇 때는 내가 얼른 알려 줘."
"너는 연습할 때 아주 잘했어.
 실수 한 번 안 했고 불협화음을 낸 적도 없어.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실패할 리가 없어."   

세 여자는 서로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꼭 시험장에 들어가는 기분이야.  
 시험이라면 딱 질색인데."   

아나이스가 중얼거리자 샤를로트가 농담으로 되받았다.

"특히 이번 일처럼 실패할 경우 오랫동안 재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겠지?"
"그렇다고 이 일을 포기할 수는 없어.
 우리가 해낼 수 있는지 알고 싶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마리 나타샤가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아나이스는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을 흥얼거렸다.
세 여자는 단호하게 보석 상점  <반 다이크 앤드 카르펠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몇 분 후,  
상점 안에 즉흥 아리아들이 울려 퍼졌다. 
'잡아요! 
 저 강도를 잡아요!'라는 테마를 바탕으로 한 아리아들에 건물의 경보 사이렌이 반주를 넣었다.
 

언젠가는 내가 사라질 날이 올 것이고,  나와 함께 나의 모든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이따금 나는 내가 많이 지쳐 있음을 느낀다.


세 여자는 검은 늑대 가면을 벗었다.

"우리 해냈어,  
 애들아! 
 세상에!  
 우리가 해낸 거야.  
 성공했다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들은 가면을 일제히 공중으로 던지면서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로소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그녀들은 득점을 하고 난 농구 선수들처럼 손바닥을 마주치고,   
기쁨에 겨워 서로 얼싸안았다.

그녀들은 이제 자기들이 일을 벌인 곳으로부터 멀리 달아나 숲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다.
그녀들의  <레인저 로버> 4륜 구동차는 비록 낡기는 했지만 
일반 승용차로 따라오는 추적자들을 쉽게 따돌렸다.

"자아 이제 우리의 전리품을 볼까?"

샤를로트의 말에 아나이스는 들고 있던 섀미 가죽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한 무더기의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다. 

"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녀들은 한동안 넋을 잃고 보석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무섭지 않았니?
 나는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몰라."
"아슬아슬했어.
 네가 마지막 다이아몬드를 우리에게 넘겨주자말자 그 남자가 경보기를 울렸거든.
 생각나니."

일을 벌인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무용담이 오고 가고 있었다.
큰 전투를 치르고 온 군인들의 대화 같았다.

"자아,  
 이제 분배를 해야지?"

세 여자는 저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고 보석 감정용 루페와 족집게와 작은 섀미 가죽 주머니들을 꺼냈다.
아나이스가 한 손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가 빼냈다.

"샤를로트에게 12캐럿짜리 하나,  
 마리 나타샤에게도 하나,  
 나한테도 하나."

다이아몬드를 나누는 아나이스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녀들은 자기 몫의 다이아몬드를 받을 때마다 
탄성을 연발하며 요모조모 살펴보고는 자기 주머니 속에 넣었다.  

12캐럿짜리와 16캐럿짜리의 분배가 끝나고 18캐럿짜리를 나누어 가질 차례가 되었다.
한결같이 희귀하고 더없이 순수한 보석들이었다.

"어떤 사내가 나한테 이런 보석을 선물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을 거야."
"이 정도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편하게 살 수 있어."
"난 이것들 팔지 않을 거야.
 이것들을 세팅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걸이가 되겠지?"
"난 말이다.
 반은 세팅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가서 생각할 거야."

아나이스는 갈라 나누기를 계속했다.

"이건 샤를로트 거고, 
 이건 마리 나타샤 것, 
 이건 내 것,
"잠깐만, 
 너한테 하나 더 간 거 아니니?"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세 여자는 저마다 다른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뭐라고?"
"너한테 한 개가 더 간 것 같다고 다시 헤아려 봐."

마리 나타샤의 말에 아나이스는 자신의 가죽 주머니 속을 들어다보며 계수를 헤아렸다.

"아 그래.
 네 말이 맞다.
 미안해.
 내가 실수를 했어."

잠시 팽팽했던 분위기가 다시 누그러졌다.

"설마 내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실수란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
  
주위에서 들리던 여치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해거름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새들이 부리에 벌레를 물고 새끼들이 기다리는 둥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아까보다 한결 거뭇해진 구름 덩어리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아나이스를 처음 만난 건 그 아이가 일곱 살쯤 되었을 때였다.  아나이스는 아주 귀여운 아이였어.  
커다란 초록색 눈과 분홍색 입술에 생기가 넘쳤지.
아이는 노란 포플린 원피스를 입고 비단 리본이 달린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었어.
아이는 내 앞에 멈춰 서더니 귀엽고 깜찍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어.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너는 특별해.  우리 말동무 할까?'  사실이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


어디선가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세 여자는 <레인지 로버>의 전조등 불빛을 받으며 분배를 끝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다됐어. 
 이제 집에 돌아가서 쉬자."   

다른 두 여자와 달리 샤를로트는 그다지 신이 난 기색이 아니었다.

"문제가 하나 있어. 
 이 다이아몬드들은 도난품 목록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보석 가계에 팔려고 가져가면 쉽게 들통이 날 거야."
"그럼 어떻게 하지?"
"장물아비를 찾아야지."
"장물아비가 우리를 신고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어?"
"일껏 고생했는데 남는 게 하나도 없으면 안 되지."  

아나이스가 주먹 쥔 한 손으로 다른 쪽 손바닥을 때리며 말했다.

"방법이 있을거야. 
 예전에 보석 전문가와 데이트를 했었는데 도난당한 보석은 1년동안 특별 리스트에 올라 있데
 그 기간이 지나면 팔아넘기기가 쉬워진다는 거야."   

세 여자는 서로 눈길을 주고 받았다. 

"그럼 그동안에는 어떻게 하지?
 침대 매트리스 밑에 감출까?"
"집에 보관하면 자꾸 팔고 싶은 유혹이 생길 거야.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 감춰 두는 게 나아.
 여기 이 숲 속의 빈터 어딘가에 숨겨 놓고 1년 뒤에 다시 만나서 함께 보물을 되찾기로 해."

두 친구는 잠시 망설였다.
샤를로트가 먼저 손바닥이 위로 가게 해서 손을 내밀었다.

"난 오케이야."  다른 두 사람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었다.
"나도 오케이야."
"좋아"
"모두가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우리는 <검은 암늑대들>이야.  
 이 이름 어떻게 생각해.
 우리는 늑대 가면을 쓰고 숨을 때도 숲 속에 숨잖아?"

그녀들은 손을 맞잡은 채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암늑대들아.  
 이 다이아몬드를 어디에다 묻지?" 
"땅을 팔 필요는 없어.  
 조르주한테 맡기면 되니까."
"조르주?"  

세 여자는 일제히 조르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나이스를 두 번째로 만났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
<오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할아버지는 너랑 무척 비슷하셨어.  
 말씀은 별로 안 하셨지만 모든 걸 환히 꿰뚫어 보는 분이셨어. 나는 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했어.  
 늘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나를 이해해 주셨지. 
 내가 할아버지 이름을 따서 너를 조르주라고 불러도 괜찮겠니?>


"조르주에게 맡긴다고?"
"조르주가 유일한 해결책이야."
 
아니이스의 단호한 주장에 샤를로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마리 나타샤는 어꺠를 으쓱 추켜올렸다.

"정말 조르주에게 우리 보물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래. 
 조르주는 인내심이 많고 말이 없어.  
 완벽한 공범이지. 
 우리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안 그러니,  조르주?" 

마리 나타샤는 옆으로 흘려내린 긴 금발을 쓸어 올리고 조르주를 아래위로 흩어보았다.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한낱----."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피식 웃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안 될 것도 없겠다."

그녀들은 결국 보물을 조르주에게 맡겼다.  
아나이스가 조르주 쪽으로 돌아서서 말했다.

"고마워, 
 우리를 이해해 줘서."  그런 다음 조르주에게 입을 맞추었다.


세 번째 만났을 때,  아나이스는 나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엄마 아빠가 나보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래.  언젠가 내가 너를 꿈에서 보았다고 말했더니,  
  엄마가 뭐라고 하셨는지 아니?  그건 정상이 아니라는 거야.  
  너를 꿈에서 보는 게 왜 이상하다는 거지?  너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겠니?>


몇 주일 후.
세 여자는 다시 숲 속의 빈터에 앉아 있었다.
발가락들 사이에 작은 솜뭉치를 끼운채 발톱에 진회색 페디큐어를 칠하는 중이었다.
때는 여름이고 날씨가 더웠기 때문에 그녀들은 굽이 있는 샌들을 신기로 했다.

"우리는 아마 외모에 신경을 쓰는 최초의 강도들일 거야."

그녀들은 향수를 뿌리고 드레스를 매만지고 
늑대 가면과 권총을 바이올린 케이스에 넣은 다음 자동차에 올라탔다. 

시간이 조금 지나 <샤르티에> 보석 상점에서 아나이스가 소리쳤다.

"모두 엎드려!"   

마리 나타샤는 천장을 향해 총을 한 방 쏘았다.
처음 할 때보다 일이 한결 수월했다.
그녀들은 상점의 널찍한 홀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충분한 간격을 두고 
세모꼴로 저마다의 위치를 잡은 다음, 
권총을 단단히 검어쥐고 다리를 약간 벌려 안정된 자세를 취했다.

"어이! 
 뒤를 조심해!"

아나이스는 남자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돌진하였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그녀가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남자가 경보기의 버튼을 누른 것이다.

"그만 하고 달아나자!  
 곧 경찰이 들이닥칠 거야!"


나는 그 애가 무슨 까닭으로 나에게 칼을 대고 싶어 했는지 알지 못한다. 
햇살이 찬란하던 어느 날 아침,  아나이스가 내게 말했어.
<조르주,  우리의 결속을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
아이는 칼을 꺼내 들고 자못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로 바짝 다가들었어. 
그러고는 내 살을 베었지. 무척 아팠어. 나는 그 칼자국이 평생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어.  아나이스는 결코 나쁘게 행동하는 아이가 아니었거든.


마리 나타샤가 이를 악물고 운전을 하는 동안 샤를로트와 아나이스는 차창 밖으로 총을 쏘아 댔다.

"더 빨리 달려.  
 이러다가 잡히겠어."
"타이어를 겨낭해."  추격해 오던 자동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잘했어!'
 저기 다른 차들이 오고 있어!"
"이런! 
 함정에 빠진 것 같은데.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겠어."

마리 나타샤는 지그재그로 차를 몰다가 갑자기 오른쪽 샛길로 접어들었다.
어떻게든 경찰관들을 따돌려야 했다.
그 길에서 또 다른 길로 빠져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가속 페달에서 발을 뗄 수 있었다.
낡은 <레인지 로버>가 숲 속에 멈춰 섰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휴, 
 하마터면 잡힐 뻔했어."

암늑대들은 차에서 내려 주위를 한 번 쓱 들러보고 나서 다이아몬드가 든 가방을 열었다.
그들은 가방을 가운데에 놓고 둘러앉았다.

"이제 조르주가 보관하게 될 재산이 상당하겠는걸."  
"여림잡아 3, 40만 유로는 족히 될 거아.
 아직 손을 댈 수 없다는 게 유감이지만 말이야."  그러자 아나이스가 말했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아직은 때가 아냐.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녘에 엄마 집에서 무도회가 열려. 
 우리 거기 가서 기분 좀 풀까?
 마침 우리 옷차림도 파티에 어울리는 복장이잖아?"
"남자들도 많이 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들이 오지."


아나이스, 오 나의 귀어운 아나이스. 네가 처음으로 남자 친구를 데려와서 내게 소개했던 일이 생각나.
내가 알기로는 그가 너의 첫 애인이었어.  그의 이름은 알렉상드르 피에르였지.


요한 슈트라우스의 빈 왈츠.
세 여자는 남자들과 함께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 음식을 차려 놓은 식탁으로 돌아와 
얼음과 레몬을 조금 넣은 빨간 마티니를 홀짝거렸다.

"사내들을 요리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야."
"그래서 난 다이아몬드를 더 좋아하지.
 매릴린 먼로처럼 말아야.
 다이야몬드는 얻기가 어렵고 나름 실망시키지는 법이 없지."

웃음소리가 높아지자, 손님들의 눈길이 모두 그녀들에게로 쏠렸다.
아나이스의 어머니가 뚱뚱하고 머리가 약간 벗겨진 남자를 대동하고 다가왔다.
아나이스가 속삭였다.

"숨는 게 좋겠어.
 엄마가 와."  하지만 어머니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나이스. 
 너 외삼촌한테 인사도 안 하니?"   아나이스는 순순히 남자의 빰에 입을 맞추었다.
"안녕하세요.  
 외삼촌.  
 애들아, 어머니와 이지도르 외삼촌을 소개할께.
 여기는 내 친구들이예요. 
 그런데 여전히 <르게퇴르 모데른>에서 과학기자로 일하고 계신가요?
 우주 정복, 인간의 기원, 뇌의 메커니즘, 
 뭐 그런 건가요?"
"그런 거하고는 거리가 멀어.
 요즈음에는 식물의 의사소통에 관심을 갖고 있지."
"식물이요?"
"재미있네요. 그 얘기 좀 해주세요."
"​아프리카에서 어떤 목동들에게 한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어. 
 염소들을 아카시아 울타리 안에 가둬 놓으면 염소들이 자꾸 병에 걸리는 거야. 
 나중에 이유를 알아보니까 염소들이 한 나무의 잎을 뜯어먹기 시작하면, 
 이 나무가 즉시 냄새 신호를 보내. 
 그러면 다른 나무들은 자기들의 수액을 변화시켜 독성을 띠게 한다는 거지."

이지도르는 꽃병에서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식물들은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받기도 해.
 이 꽃은 지금 항긋한 냄새를 발산하고 있어.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들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 꽃이 하드록을 듣는다면 다른 냄새를 발하게 될 거야"
"식물이 그렇게 음악에 민감하단 말이예요?"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자극에 민감하지"

마리 나타샤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나이스는 외삼촌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휴식 중인 현악 4중주단의 바이올린을 가져다가 귀에 거슬리는 음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귀를 막았다.
마리 나타샤가 꽃을 살피고 있다가 말했다.

"이지도르 삼촌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이 꽃은 수술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요."  마리 나타샤는 빈정거리는 표정을 지였다.
"주로 그런 종류의 것에 관해서 기사를 쓰시나 보죠?"  이지도르는 참을성 있게 말을 이었다.
"독자들에게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지." 
"하지만 식물이 음악을 듣는다는 건 말이 안 돼요.
 혹시 머리가 이상해지게 만드는 식물을 조금 피우신 거 아니에요?"

아나이스는 친구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언쟁이 더 심해지기 전에 외삼촌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데려갔다.

"이리 와요, 
 외삼촌. 
 저랑 왈츠 한번 춰요. 
 그런데 지난번처럼 제 발을 밟으면 안 돼요. 
 알았죠?"

 

나는 이제 많은 세월을 살았다.  마흔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지상에서 내가 이루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한평생을 살면서 단 한 가지라도 뭔가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마리 나타샤였다.
그녀는 작은 주머니들을 되찾아 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녀의 손에서 다이아몬드들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들을 자기 배냥에 쑤셔 넣었다.

 

안돼!  너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  가져가더라도 네 것만 가져가.  남의 것을 가져가는 것은 옳지 않아.   
그 안에는 아나이스 것도 들어 있어.

 


마리 나타샤는 작별 인사라도 하듯 조르주를 슬쩍 돌아 보았다.

 


나쁜 계집애.

 


"그거 내려놓고 두 팔을 올려!"  

마리 나타샤는 머뭇거리면서 옆쪽을 훌깃거리다가 아나이스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다이아몬드를 있던 자리에 도로 갖다 놔." 

마리 나타샤는 다이아몬드를 조르주에게 돌려주고 두 팔을 올린 채 돌아섰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나를 그냥 놓아주지는 않겠지?  
 내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잘 알 테니까 말이야."
"아나이스 너도 손들어!"   

등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나이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총 내려놔."   

아나이스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계속 마리 니타샤를 겨누고 있었다.  
샤를로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너희 둘이 진실한 친구라고 생각했어.  
 그랬는데 이제 너희를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어"

 


두렵다.  조심해.  아나이스.  둘 다 독사 같은 애들이야.

 


마리 나타샤가 잽싸게 몸을 숙이더니 자기 발목 언저리에서 작은 권총을 빼어 들었다.
그러더니 다른 두 사람이 미처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홱 돌아서서 샤를로트를 겨누었다.

"이로써 우리가 대등해졌군."  

세 여자는 정삼각형을 이룬 채 서로를 겨누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어떻게 할래?
 카드를 꺼내서 다이아몬드를 걸고 포커라도 칠까?"
"우리가 단결하는 게 우리 자신에게 이로워."  아나이스가 말했다.

 


아니이스 말이 맞아.  너희 두 사람은 아나이스 말을 들어야 해.

 


아나이스가 제안했다.

"우리 바보처럼 굴지 말고 총을 얌전히 내려놓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가능할까?  
 이미 뭔가가 깨졌어.  
 신뢰가 깨졌다고."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말똥가리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가면서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총을 내려놓고 말로 하자."

세 여자는 천천히 무릎을 끓으면서 권총을 자기들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저마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다른 두 사람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마리 나타샤가 권총을 다시 집어 들더니 옆으로 한 바퀴를 구르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아나이스의 팔을 살짝 스쳤다.
아나이스도 얼른 권총을 집어들고 쏘았지만 총알이 빗나갔다.
그 사이에 샤를로트는 마리 나타샤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세 여자는 뿔뿔이 흩어져서 저마다 숨을 곳을 찾아 덤풀 속으로 들어갔다.
총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한 덤풀에서 비명이 솟았다.
아나이스는 비명이 난 곳으로 기어갔다.   
샤롤로트가 죽어 있었다.

마리 나타샤는 그 틈을 타서 아나이스를 겨누었다.  
하지만 탄창이 비어 있었다.
그녀가 탄환을 다시 장전하려고 할 때 
아나이스가 머리를 숙이고 돌진하여 그녀의 무릎을 잡고 쓰러뜨렸다.

두여자는 덤불 속에서 뒹굴었다. 
그건 두 사람이 가로 누운 자세로 격렬하게 사지를 흔들어 대는 기이한 춤이었다.
그녀들은 서로 때리고 물어뜯고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도록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돌연 마리 나타샤의 손에서 칼날이 번득였다. (p273)

 

조심해, 아나이스!

 


아나이스는 발길질로 상대의 접근을 막다가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상대를 쓰러뜨렸다.
상대는 넘어지면서 그녀를 잡고  매달렸다.
그 순간 아나이스의 눈에 경악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리 나타샤의 눈에는 벌써 회한의 빛이 어려 있었다.

아나이스는 고개를 떨구며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고는 두 손으로 상처를 감싼 채 털썩 무릎을 끓었다.

"미안해. 
 너와 나 둘 중의 하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마리 나타샤는 뒷걸음질을 치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달음박질을 쳤다.

 


안돼!

 


아나이스는 주먹을 꼭 쥔 채 조르주 쪽으로 기어갔다.
그러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중열거렸다.

"조르주...  날 도와줘."  

그녀는 꼭 쥔 주먹을 조르주 쪽으로 내밀고는 무언가 손 안에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이걸 보관하고 있다가 내 원수를 갚아 줘."   

그런 다음 아나이스는 자기 재킷을 뒤져 휴대 전화를 꺼냈다.

"여보세요...
 경찰이죠...?
 여긴 퐁텐블로 숲인데 4번 오솔길로 --- "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털썩 무너져 내렸다.


아나이스!!!
네가 없으면 내 삶은 아무 의미가 없어!
나에게 남은 건 복수뿐이야.
그래, 할 수만 있다면 네 원수를 갚아 주겠어.
※ 이 글은 단편 <나무>에 실린 전문을 필사한 것임.



베르나르 베르베르 -  나무
역자 - 이세욱 
열린책들 - 2003.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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