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다카시 - 청춘표류」
70미터 아래에 바다가 펼처진 절벽에 매달려 자일에만 몸을 의지한채 몇 시간이나 기다리는 거예요.
야생을 야생 그대로/동물 사진작가 미야자키 마나부
일본 남알프스 산으로 둘려싸인 계곡에서 오로지 새와 동물만을 카메라에 담는다.
서른네 살의 미야자키 마나부는 두번에 걸쳐 큰 병을 알았고 몇번이나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결국 어렸을 떄 경험으로 이 일을 하고 있죠.
어렸을 떄에는 카메라는 없었지만 항상 이렇게 살아왔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동물 사진작가인 미야자키 마나부는 손쉽게 2,30미터의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타기라면 아이 때부터 누구에게도 안 졌어요."
관찰할 때 기록을 하나요?
"아니요, 전혀 안 써요.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기만 해요.
기록을 하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계속 지켜보기만 해요.
결국 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일하러 나갈 때 쌍안경이 없으면 카메라가 있다 해도
집에 다시 가서 쌍안경을 가지고 와야 해요.
하지만 쌍안경이 있고 카메라가 없으면 되돌아가지 않아요.
쌍안경만 있어도 볼 수는 있으니까요.
젊은 사람들 가운데 동물 사진작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모두 찍으려고만 하지 찍기 전에 보려고 하지 않거든요.
그건 안 돼요.
찍기 전에 철저하게 지켜봐야 해요."
그의 책 <독수리와 매>는 15년에 걸쳐 일본을 종단하고 얻어낸 산물이다.
철저하게 관찰한 후에 촬영을 했다.
촬영을 위해 이제까지 방문한 장소를 묻자
"안 간 곳을 세는 게 빠르겠네요"
하며 몇몇 장소를 손가락으로 꼽아 보았을 뿐이었다.
촬영 여행을 따날 때에는 캠프 도구를 차에 싣고 항상 아영을 한다.
"돈이 없으니까요.
여관에 묵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밥은 제가 해먹고 목욕탕에 갈 때만 돈을 써요.
돈이 있으면 필름이나 장비에 쏟아붓고, 다른 쪽에서는 가능한 한 절약을 하죠."
더구나 독수리나 매를 좇을 때는
생식현장에 최대한 접근해야 하므로 숙박업소에 머무를 시간이 없다.
"개독수리 어미와 새끼를 촬영한 건
군마 현 산속이었는데 엄청난 기암절벽에 둥지가 있었어요.
그 옆에 아주 조그만 발판 같이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그곳에서 둥지를 관찰할 수 있겠더라고요.
절벽 위에서 자일을 늘여뜨려 매달려서 발판에 내렸지요.
작은 텐트를 치고 일주일간 버텼어요.
1평 정도도 안되는 곳이었는데
밑으로는 70미터나 되는 절벽이 있어서 떨어지면 죽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자는 동안에도 내내 자일을 몸에 감고 있었어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물과 화장실이었죠.
물은 아주 조금씩 썼어요.
세수도 안하고 식기도 안 씻고 펫트병 하나로 일주일을 버텼어요.
화장실은 어쩔 수가 없어서 비닐봉지를 이용했고요.
그 정도 발판이라도 있으면 낫지요.
다른 지방에서 매를 촬영했을 때인데, 역시 70미터 절벽 가운데로 아래는 바다였어요.
거기에서는 간신히 앉을 수 있는 공간밖에 없었어요.
마찬가지로 자알로 몸을 묶고
빵과 캔 주스 두 개로 여덟 시간 동안 기다리며 촬영을 했어요.
나무 위에 둥지를 짓는 경우에는
저도 가까운 나무에 올라가서 둥지 속이 보이는 위치에 발판을 만들고
몇 시간이나 기다리는 거예요.
발판이라고 해봤자 겨우 엉덩이를 걸칠 정도죠.
어떤 때는 그런 곳에서 몸을 묶은 채 잠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미야자키가 이런 고생을 거듭하면서 촬영한 몇만 장 사진 가운데에서
겨우 100장 남짓만 골라 만든 것이 <독수리와 매>사진집이다.
이 사진집 뒤에는 미발표된 몇만 장의 네가필림 이외에도
몇만 시간의 관찰로 얻은 독수리나 매의 생태에 관한 방대한 지식이 있다.
성적은 꼴찌에 얼치기 대장
그 지식의 대부분은 미야자키 씨 말고는 어느 누구도 모르잖아요.
그대로 두면 너무 아깝지 않나요?
책으로 써서 남겨두는 것이 어떤가요?
"아니요.
저는 사진작가라서 제가 얻은 생태지식을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제가 본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렇게 고생은 하고 있지만요."
<독수리와 매>에서는 모든 종류를 한 권에 담아냈다.
그렇지만 다음번에는 한 종류씩 천천히 보여줄 생각이다.
다섯 종류의 독수리와 매를 한 종류에 2년씩 10년에 걸쳐 다섯권의 사진집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라고 한다.
미야자키가 찍은 것은 독수리와 매뿐만이 아니다.
이제까지 나온 <일본 영양> <부엉이> <짐승이 다니는 길> 같은 사진집은
모두 발표할 때마다 큰 호평을 받았다.
이런 미야자키가 학교에서는 열등생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딱지가 오히려 자극했다.
"선생님께에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학교에서는 쓸모없는 놈이라는 취급을 받았습니다.
기분 나쁘니까 저도 점점 더 반항하고 팽팽하게 맞섰죠.
동급생 가운데 그런 녀석들이 셋 있었는데, 모두 중학교 졸업하고 취직했어요.
우리가 원해서 취직을 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먼저 그만두라고 하셨죠.
저는 농업고등학교 축산과 정도는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시험을 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우리 세 사람한테 원서 제출일을 일부러 안 가르쳐준 거예요.
정말 화가 났죠.
사립 고등학교도 있었지만 돈이 많이 드니까,
공립 고등학교에 원서를 못 내면 완전히 끝난 거죠.
정말 그때는 낙담했어요.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요.
취직할 자리를 알아보는 것도요.
사람을 체로 쳐서 걸러낸 다음 너희 세 사람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딱지를 붙여버린 것 같아서 너무 비참하고 억울했어요.
그런데 이 사건이 오히려 자극제가 되었는지
우리 모두 노력해서 둘은 자기 사업을 하면서 사람을 부리고 있어요.
20대에 자기 집도 마련하고요."
그렇지만 졸업한 직후에 1년간은 좌절감에 휘청거리며 놀러만 다녔어요.
낮에는 낚시, 밤에는 중학교 때 문제아로 불리던 친구들과 어울려 놀려다녔어요.
그런데 언제까지나 놀 수만은 없겠더라고요.
친척들도 한마디씩 하고 해서 다음으로 찾은 직장이
신슈 정기기계라고 하는 고급 카메라 부품공장이었어요.
그 전에는 카메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카메라를 본 순간 그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었어요.
렌즈의 광체를 보고 있노라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매 눈의 광체와 비슷한 것 같아요.
한 대 사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당시에는 카메라 보급률이 낮아서 회사에서는 사장님밖에 카메라가 없었어요.
제 월급이 만 엔이었는데 카메라는 3,4만 엔이었으니
보통 사람들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고가품이었어요.
그런데 무리를 해서 열 달 할부로 사버렸어요.
그날부터 일요일만 되면 산에 나가 동물하고 새를 쫓아다니는 생활을 시작했죠.
저 바보가 또 산을 헤메고 다니네
"문제는 돈은 없는데 필름 값이 비싸서 셔터 한 번에 70엔 정도가 들어간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셔터 한 번을 누를 때에도 굉장히 신중했죠.
남는 시간, 돈은 모두 카메라에 쏟아부었어요.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는데 동창들이 모두 고등학생이라서 가끔 차를 타고 가다
'저 바보가 여우니 너구리 찾아 또 산을 헤메고 다니네' 하며 놀려 자존심이 많이 상했어요."
미야자키는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밤하늘을 나는 날다람쥐 사진을 찍어서
<아사히카메라> 월간 콘테스트에 응모해 5위에 입선한다.
이를 계기로 자신감이 붙어 더욱 열심히 카메라애 빠져들었다.
그 즈음에 환상의 야생동물이라 여겨졌던 일본 영양을 찍고 싶었어요.
해서 그 지방의 산악회에 들어가 등산기술을 배워 토요일이 되면 텐트를 짊어지고
일요일 밤까지 중앙알프스산을 계속 걸어다니기만 했어요.
그렇게 반년을 보내던 어느날,
갈색 점 하나가 조금 움직인 것처럼 느껴져 쌍안경으로 보니 영양이었어요.
자연 속에서는 이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수 차례 그곳을 지나다녔는데 어떻게 알아보는지 몰라서 발견할 수 없었던 거죠.
그 다음부터는 산에 갈 때마다 쉽게 눈에 띄더라고요.
암흑의 스무 살을 보내다.
그 사이에 두 차례의 큰 병을 앓았고 다니던 회사도그만두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의지하며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카메라를 챙겨 산을 올랐다.
막연하게 '동물사진 작가'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때었다.
정규직으로 입사할 만큼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했고
스물다섯 되던 해 결혼을 하고서도 그 생활은 5년간이나 이어졌다.
아내와 함께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해 사진 찍기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동물사진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된 두 사건이 일어났다.
매년 전국에서 화제가 된 사진을 아마와 프로를 불문하고 세명을 선정해
<아사히카메라 연감>에 실어주는데 거기에 입선된 것이다.
또 하나는 오사카의 한 출판사에서 시진 그림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은 사건이었다.
그때 함께 했던 동화작가가 이런 말씀을 해주었어요.
"자네가 하는 일은 많은 사람에게 금세 인정받지는 못할 걸세.
하지만 자네를 주목하고, 인정하고, 기대를 거는 사람이 일본에 한두 명은 있을 걸세.
자네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인정해주는 한두 사람을 위해 열심히 하게나."
결국 두 번에 걸친 병마는 미여자키의 인생을 동물사진이라는 외길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미야자키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작업도 앞으로 5년, 10년은 걸릴 작업들뿐이다.
20대 청춘에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던 이 남자가
지금은 아주 긴 안목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p130)
다치바나 다카시 - 청춘표류
역자 - 박연정
예문 - 2005.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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