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민 - 오페라 읽어 주는 남자」
오페라 속에 담겨 있는 인생의 진실을 발견하다
피아노는 그냥 뚱땅거리기만 해도 좋았다.
피노키오처럼 짧은 다리를 걸치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으면
음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귀에 들리고,
노래를 입 속으로 흥얼거리게 되었다.
다섯 살, 어린 내 곁에는 피아노와 노래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 덕분에 웬만한 곡들을 줄줄이 칠 수 있었지만,
아무리 음악이 좋아도 음악이 생활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시니컬한 것에서 괜한 멋을 느끼는 예민한 사춘기에는 영어(English poems)에 빠져들어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을 읽다가 가슴이 울렁거려 가늘 수 없는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가끔 '나는 딴다라과야'라고 농담하기도 했지만,
농담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
음악에서 시로 자연스럽게 넘어왔으니.
좋아하는 영시를 공부하겠다고,
또 영어를 전공하면 별로 손해 보는 인생이 되지는 않겠다 싶어서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무대'를 내 인생에 끌어들이게 된 첫 계기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
대학교에서 나는 연극을 처음 만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페라는 그냥 내게 듣고 즐기는 음악이었지 무대의 의미를 가지지는 않았다.
군생활이 끝날 무렵 남자로서 어떤 책임감,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오죽하면 경영학 공부를 시작했을까
어쨌든 나는 평범한 남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학교 3학년 때 영문과 연극반에 발을 디딘 것이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한 불씨가 되었다.
여름방학 동안이라는 짦은 기간이었지만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창조적'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베케트의 연극 <엔드게임>에서 주인공을 하였는데,
그 연극이 끝나고 몇 달 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멍한 상태는 아마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의 열병을 닮아 있었을 것이다.
경역학이고 뭐고 다 던져버린 채 난 정신없이 연극 속으로 달려가 버렸다.
인생을 바꾼 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Les Uns et les Autres>를 꼽는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북소리가 둥둥 울리기 시작하고,
끝내는 발톱이 부러지도록 춤을 추고 싶게 만드는 정열적인 음악.
그 음악을 배경으로 파리 데뷔전을 치르고 있는 한 남자 무용수의 열정적인 몸동작과
강렬하게 비추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음악이 있는 무대.
바로 그거였다.
삶의 고뇌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르인 연극을 하면서도 내내 뭔가 결핍을 느꼈던 것은 음악 때문이었다.
무대는 무대지만 일반 연극에 음악이 함께 있는 무대가 내가 진정 원하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는 음악과 무대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짜릿한 경험을 주었고,
이 경험이 내가 오페라를 선택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곧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생각과 달리 처음엔 크게 심취하지 못했다.
음악 이론을 선택한 탓이었겠지만,
논문을 제출하기 며칠을 앞두고 급기야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지도교수의 방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그 당시 우여곡절, 휘황찬란한 방황 속에서의 여러 가지 경험이
지금 여기 '오페라를 읽어주는 남자'로 서있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음악 이론을 공부하면서 월간 <객석>에서 주는 젊은 평론가 상도 받았고,
그를 바탕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눈을 조금은 독특하게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론 공부는 내게 너무 외로웠다.
내가 사랑하고 빠져들었던 무대 2시간 내내 고함을 내지르면서 공연했던
부조리극 <엔드게임>에서 모든 정열을 불태웠던 그 희열을 언제 또 맛볼 수 있을지,
온갖 회의와 방황 속에서 연극의 주변만 맴돌고 있었다.
무대에서 소외된 나는 있을 수 없었고,
몇 년의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오페라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음악에서 시를 거치고,
연극과 음악 이론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마침내 무대에서 살아있는 나를 만나기 위한 유학을 단행했다.
미국에서 오페라&뮤지컬 연출법을 공부하고
우리나라 최초라는 '오페라 연출박사(DMA) 학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가장 큰 괴리감을 느낀 것은 오페라는 서양문화라는 일반인의 선입견이었다.
오페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고, 극적인 드라마가 있다.
노래와 드라마가 하나로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깊이와 강도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흡입력이 있다.
여기에 세트와 의상, 조명이 어우러지면서 무대는 감동의 도가니가 된다.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오페라의 매력을 전달할 수는 없을까.
오페라 하면 맨 먼저 노란 가발을 뒤집어쓰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서
과장된 몸짓으로 무대를 오가며 목청을 돋구어 노래하는 뚱뚱한 소프라노 가수를 연상한다.
왜 그것만 볼까.
그것은 오페라의 본질이 아니다.
오페라를 살아 있는 감동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음악과 연극의 다양한 표현 방법을 총동원해서 보여주는 삶의 진실성에 있다.
무대 위의 주인공이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는 바로 우리들의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오페라가 서양 사람들의 호사스런 귀족 취미라고 여기는 선입견은 오페라의 핵심을 보는 눈을 흐리게 만든다.
오페라에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온갖 사연들이 다 들어있다.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삶의 단편들을 발견해 내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카타르시스다.
시대가 변해도 인생의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눈 앞에서 공연되는 오페라가 전달하고자 하는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지 느껴진다면
어려운 용어와 대가들의 이름은 몰라도 된다.
대가들의 이름과 온갖 이론, 형식들은 오히려 오페라 감상의 방해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오페라를 어렵게 느끼지 않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것이 무슨 오페라 책이냐고 오해받을 정도로 오페라의 사실적 요소는 많이 재거했다.
한 편의 소설처럼 술술 읽히게끔,
각 작품마다 전달하는 메시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할 때면
작곡 방식 - 용어 - 작곡자 - 가수 등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배재했다.
독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삶의 원리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오페라 읽어주는 남자로서의 내 임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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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무엇보다 심금을 울리는 주제는 '사랑'일 것이다.
여자는 환갑이 넘어도 웨딩마치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는 말도 있듯이
사랑이 없는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삭막하다.
사랑은 늙으나 젊으나,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가리지 않는다.
평생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나 혼자 간직하고 싶은 그 애틋한 감정,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함께 나누고 싶은 감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오페라의 많은 주제들 중에서도 굳이 '사랑'을 택했다.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독자들이 좀 더 쉽게 오페라를 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자,
사랑을 잃은 자,
사랑을 버린 자, 사랑을 시험한 자 모두가 오페라 속에서 인물로 살아있다.
그 속에서 자신은 어떤 유형의 사랑을 하는지 짚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모두 오페라와 부쩍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보다 정확한 표현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보이고, 또 보이는 만큼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한 번 발을 들어놓으면 아편처럼 중독성이 강한 오페라를 일단 알면 '보이게' 되고,
또 그러면 인생이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다.
2001년 12월
김학민
※ 이 글은 <오페라 읽어 주는 남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학민 - 오페라 읽어주는 남자(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2)
명진출판사 - 200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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