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국회도서관 2024. 9 / VOL.523」
내 삶에 들어온 책
평범한 인생 - 카렐 차페크 / 열린책들 2021. 12. 10.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 혼자가 아닌 우리의 『평범한 인생』
얼마 전 버킷리스트를 추가했다. 내용은 체코 프라하 10구역에 있는 비노흐라디(viinohrady) 여행이다. 버킷리스트를 수정한 이유는 소설 『평범한 인생』 때문이다. 비노흐라디는 평범한 제목에 비범한 내용을 담은 소설의 작가, 카렐 차페크 집이 남아있는 동네다. 에세이 『정원가의 열두 달』에 반해 카렐 차페크의 팬이 되었는데, 위대한 소설 『평범한 인생』이 팬심에 불을 당겼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작가의 흔적을 쫓아 당장이라도 체코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렁였다.
평범한 인생, 기록해도 될까?
나의 인생 책인 『평범한 인생』은 아침드라마 같은 소설이다. 반전의 묘미가 있다. 전반부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술술 넘기다가 보면 어느 순간 이야기가 파격적으로 전환된다. 잔잔한 바다에 태풍이 몰아치는 듯한 변화다. 소설은 상상하지 못한 내용으로 마무리 된다. 작은 씨앗이 우주로 퍼져 나가는 기분이랄까. 초반에 읽다가(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중간에 멈추면 안 된다. 평탄기와 혼란기를 거친 후,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읽어야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평범한 인생』은 철도 공무원이었던 주인공의 인생 이야기다. 심장병이 악화돼 죽을 날이 멀지 않자,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기록을 남긴다. 누가 봐도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 ‘이런 평범한 삶에 대해 쓸 거리가 있을까?’(16p)라며 주인공은 기록하기를 잠시 주저한다. 그러나 스스로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기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유독 밑줄 많은 인생 책
평소에 책을 읽을 때 형형색색 줄을 긋는 편이다. 『평범한 인생』에는 유독 밑줄을 많이 그었는데, 이 부분에도 형광펜을 굵게 칠했다. 어르신 대상 자서전 쓰기 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참여자들이 많이 꺼낸 이야기가 “내 인생 별거 없는데, 뭐 하러 써요.”였다. 그 때마다 “어르신, 사람 얼굴이 다 다르죠? 비슷해 보여도 다 다른 이야기를 품고 계실 거예요. 어렸을 때 행복했던 때부터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요?”라고 요청 드린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지 상상하지 못했다
잔잔하게 흐르는 전반부
주인공은 소목장이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시골에서 조용히 책에 파묻혀 보낸 유년기, 열심히 공부했던 청소년기, 철학을 공부하던 대학시절, 시에 빠져 방황하다 철도청에 입사한 일, 결혼하고 승진을 거듭해 자신의 역을 만든 시절까지 차례로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누가 보아도 ‘부럽네, 잘 살았군.’이라고 할 만한 성공한 인생이다. 주인공도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이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가끔 나는 놀랐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이것이 인생이다.
하루에 기차 두 대가 오가고, 끊긴 선로에는 풀이 덮이고,
그 바로 뒤에는 병풍 같은 우주가 나타나는 것이.’(82p)
팝콘처럼 튀어 나오는 내 안의 수많은 자아
평범한 철도 공무원 이야기로 끝날 것 같은 소설은 20장(전체 34장)을 넘어가면서, 확 달라진다. 주인공은 자신의 일생에 대한 글쓰기를 마친 후, 거의 3주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지낸다. 그러다 자신이 기록한 글을 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뭐라고? 온전한 진실이라고?’(129p)
이때부터 주인공 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하나씩 올라온다. 무의식에 꼭꼭 눌러 놓은 자아를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식이다.
‘이봐, 대체 왜 역장의 딸에게 접근했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 하지만 나는 그녀가 역장의 딸이라서 그녀에게 접근했지.
처가 덕에 출세한다는 거 있잖아?
부잣집 딸이나 상관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동화 속 공주에게 구애하는> 셈 아닌가?
그렇게 해서 자신의 주가를 올리는 거 말이야.
그건 거짓말이야!
꿈에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하지만 난 했어.
게다가 아주 생생하게.’
다른 두 사람의 대화처럼 들리지만, 한 사람의 대화다. 주인공 내면의 자아가 서로 의견이 옳다고 티격태격 중이다. 여러 자아는 각자의 입장을 소리 높여 주장한다.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의 목소리가 올라오다가 우울증에 힘들어하는 환자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러다 시를 사랑하는 문학소년, 타락한 인간, 아내를 증오하는 남자, 자연인으로 살고 싶어 하는 자아 등 8가지 자아가 출현한다. 이야기 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소설인데 심리학책을 읽는 기분
소설을 읽다 보니, 주인공과 내 모습이 겹쳐졌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라는 ‘가시나무’의 노랫말도 떠올랐다. 어느 한순간, 하나의 자아만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매일 아침 눈 뜰 때만 해도 그렇다. 빨리 일어나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자아와 게으름 부리고 싶은 자아가 충돌한다. 주인공은 8개의 자아를 언급했지만, 내 안을 들여다보니 수십 개의 자아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뭔가 이상했다. 소설을 보고 있는데 프로이트나 칼 융의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세대를 통해 불어나는 사람들의 총합
주인공은 결국 ‘진짜 나’는 하나가 아니며, 수많은 자아 모두가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평범하고 단순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자아가 살고 있었다. 자아의 다양한 모습 중 때에 따라 앞장서는 자아가 등장해, 인생을 이끌어갔다.
그의 인식은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있다는 데까지 뻗어나간다.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 먼 선조들이 여러 형태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어, 과거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우리 각자는 세대에서 세대를 통해 불어나는 사람들의 총합인지 모른다’라고 기록한다.
영역은 더 넓어진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내가 관계 맺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내가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삶의 가능성까지, 무수한 가능성의 집합이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이다.
네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건 내 속에도 있는 거야.’(239p)라는 문장은 죽비로 내리치는 듯했다.
내가 아니라 우리였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답을 못 찾고 헤맸는데, 주인공이 답을 던져줬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결코 단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복잡한 자아와 수많은 관계가 모여 나라는 우주를 만든다고.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의 삶을 이해할수록’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삶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여러 자아가 싸우는 부분에서는 심리학 책을 읽는 기분이 들었는데, 끝으로 갈수록 철학 책을 보는듯했다. 주인공은 인생이 평범해 보일지라도, 한 사람의 삶은 수많은 자아를 품고 있고 과거와 이어져 있으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고 깨닫고 후반부에 이렇게 적는다.
‘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 평범한 삶의 흐름이 갑자기 내게 전혀 다르게,
한없이 위대하고 신비스럽게 보인다.
그건 내가 아니라 우리였다.
(중략)
다른 사람들이 있음으로써 이 세상은 얼마나 늘어나는가!
세상이 이렇게 커다란 공간이고, 이렇게 찬란한 곳인지 누가 알았으랴!’
체코의 국민 작가, 카렐 차페크
‘평범한 인생’의 작가 카렐 차페크는 체코의 국민 작가다. 밀란 쿤데라와 프란츠 카프카에 비해 국내 인지도는 낮지만, 작품은 필독을 권하고 싶을 정도로 훌륭하다. 누구라도 카렐 차페크의 글을 접하고 나면, 세밀한 표현, 사고의 깊이, 놀라운 서사에 감탄하게 된다.
차페크는 우리가 사용하는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쓴 작가다. 1920년 희곡 『R.U.R.(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로봇’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롱뇽과의 전쟁』으로 SF 소설의 대부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희곡과 소설, 비평, 에세이 등 장르를 넘나들며 눈부신 활약을 보여줬다.
정원 애호가의 책을 읽는 기쁨
그는 정원 가꾸기를 특별히 좋아했는데 에세이 『정원가의 열두 달』에서 “진정한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며 “정원가는 꽃향기에 취한 나비가 아니라 기름지고 시큼한 흙냄새를 음미하는 지렁이”라고 묘사했다. 『평범한 인생』 곳곳에도 그의 정원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뜨거운 애정을 찾아볼 수 있다.
‘역은 매우 깔끔했고,
창문은 모두 피튜니아 꽃으로 장식되었으며,
어디에나 로벨리아와 한란이 담긴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역에 딸린 정원은 라일락과 재스민과 장미로 가득했고,
통제소와 신호실 옆 화단에는 물망초와 금잔화가 만발했다.’(87p)
주인공이 역 주변을 묘사하는 문장을 보면, 향기가 느껴지는 꽃 이름이 가득이다. 『평범한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도 나무가 등장한다.
의사는 몸을 돌려 시들어 버린 꽃을 꺾어 내는 것 같았다.
‘그분의 정원에 있던 산딸기나무를 갈아 심어 주었죠.
그분이 세상을 뜬 후에도 모든 게 정상으로 남아 있도록 말입니다’ 의사가 중얼거렸다. (244p)
한 사람의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후세에 이어질 수밖에 없다. 혼자만의 것도 아니다. 더 많은 이의 삶을 이해할수록 내 삶도 넓어진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를 사랑할수록 내 사랑은 커진다. 『평범한 인생』을 만난 후, 책을 더 자주 펼치고 미소를 더 자주 짓는다
글 - 채지형 여행작가·책방 잔잔하게 대표
출처 - 월간국회도서관 2024. 9 / VOL.523
'문화 정보 > 독서정보(기고.대담.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서가의 서재 - 이종찬 광복회장 (0) | 2024.06.28 |
---|---|
내 삶에 들어온 책 - 좋은 독자로 성장하기 위한 읽는 태도 (0) | 2024.06.26 |
내 삶에 들어온 책 - 내가 만난 남해바다 바다를 읽어 주는 화가 김재신 (0) | 2024.06.12 |
행복해지고 싶으면 이 책을 보라 (0) | 2024.05.20 |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에서 배우는 곁에 있을 때의 소중함 (0) | 2023.07.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