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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가의 서재 - 이종찬 광복회장

by 탄천사랑 2024. 6. 28.

·「월간국회도서관 2024. 06 vol.521 」

 

 

 

책,육체에 깃든결코 패배하지 않는영혼

이종찬 광복회장
독립운동가였던 조부에게서는 실천하며 사는 삶을 배웠다. 빅토르 위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같은 거장의 책을 통해서는 끊임없이 묻고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삶을 배웠다. 파란의 세월을 거쳐 삶은 언제나 길이 정해지지 않은 교차로에서의 선택이었고, 인간은 파멸하는 약한 존재이면서 절대 패배하지 않는 강인한 영혼임을 배웠다고 회상하는 이종찬 광복회장. 그에게 책은 육체에 깃든 영혼이자 나를 만들고 알아준 동반자였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고스란히 함께 하는 80년 삶
인생에 파란(波瀾)을 반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파란은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하고, 살아갈 길을 고심하게 한다. 두려움을 버리고 용기를 내게 한다. 고비마다 힘이 되어 한 뼘씩 자라게 한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군인, 정치가, 국정원장으로 파란 많은 세월을 겪었다.
 
그의 80년 삶은 대한민국의 시간과 고스란히 함께 한다. 현대사의 산증인 이종찬 회장은 1936년중국 상하이에서 출생했다. 1945년 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해 이후로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임관해 장교로 복무하고 5.16 군사정변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다. 

당시 정권을 보위하는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이들에게 존중의 태도를 보인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 안기부장에 임명되자 안기부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해 1999년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기록물의 의미를 일깨우며 그동안 모아온 의정활동 기록을 국회도서관에 기증했고, 지난해에는 동북아의 지속적 불안 요소 제거를 위해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때 인용했던 말이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쓰인 유명한 문구 ‘용서한다, 그러나 결코 잊지는 않는다(forgive but never forget)’였는데 
“그 말을 일본에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그의 조부는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의 직계 후손이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항일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다. 이 회장은 지난해 6월 제23대 대한민국 광복회장으로 취임했다. 조부인 이회영과 작은 할아버지인 이시영이 역사책에 기록된 독립운동가인 만큼 광복회를 이끌어가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종로구의 자택 1층에서 할아버지 이회영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을 운영하는 한편,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장학사업과 대학생들의 사회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고 좌우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나라의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광복회의 존재 의미를 바로 세우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좌표가 되어준 책 속의 인연, 헤밍웨이와 말로
-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많은 주옥같은 문장들을 새로 발견하는 느낌입니다. 

  특히 상어와 사투를 벌이며 노인이 뱃전에서 되뇌는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살아가는 내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인간의 본질을 이보다 더 정확히 꿰뚫어 보는 말은 없으니까요.-

식언이비(食言而肥)라는 말이 있다. 말을 먹고 살찐다는 뜻이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도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며 영혼을 살찌웠다. 

“제일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중학교 때 읽은 레미제라블입니다. 
 프랑스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빅토르 위고의 걸작이지요. 
 총을 통해서만 진보할 수 있다는 앙졸라의 확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장 발장의 행동을 통해 보여준 소설의 감동을 오랫동안 품고 지냈습니다. 
 이후 철이 들고 육사에 다니면서부터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었지요.” 

청년인 그가 특히 좋아했던 책은 27세의 헤밍웨이가 완성한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였다. 소설은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삶의 좌표를 상실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던 이들, 그러니까 ‘길 잃은 세대’를 다룬 작품이다. 전쟁의 거대한 참상을 거치면서 전통적 질서와 가치는 붕괴되고, 그 폐허 위로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될 때까지 방향을 잃은 세대들이 사회를 배회하게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근원적 물음은 서서히 부, 명예 같은 개인의 욕구와 사회가 제시하는 질서와 가치들의 교차점에서 그 해답을 찾게 된다. 

“헤밍웨이는 행동주의자였습니다. 
 말하자면 미국인이지만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했으니까요.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 점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가 인생의 교차점에서 방향을 찾게 해준 책이라면 작가의 스페인 내전 참전의 경험이 투영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인간성, 전쟁의 무의미함, 평화의 가치에 대해 깊이 고찰하게 한 책이었다. 행동주의에 대한 관심은 곧 행동문학의 거두 앙드레 말로의 세계로 옮겨갔다. 그의 대표작 『인간의 조건』은 1927년 상하이 쿠데타를 시작으로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탄압을 그린 소설로, 다섯 명의 인물을 통해 서로 다른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죽음의 한 가운데서 각기 다른 선택을 하는 이들의 삶은 모두 비극이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 속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저마다 생의 의미를 갖는다. 

“앙드레 말로는 굉장히 심취해서 읽었습니다. 
 이만큼 심취한 작가와 책도 없을 거예요. 
 앙드레 말로에 관한 모든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서 모아뒀을 정도니까요.”

세월이 무색한 오래된 스크랩북은 그의 애정을 가늠하게 했다. 소중한 보물로 간직한 ‘앙드레 말로’ 컬렉션을 펼치자 1996년 말로의 20주기를 맞아 프랑스 정부가 그의 유해를 팡테옹에 이장했다는 신문 기사가 눈에 띄었다. 팡테옹 안장으로 위인의 반열에 올라선 앙드레 말로는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신들의 변모』, 『덧없는 인간과 문학』 등을 집필했다. 정도(政道)에서 멀리 비켜선 후에도 인간주의의 한계에 대한 고민과 공부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패배하지 않는 정신을 만나는 항해 『노인과 바다』
편안함을 얻은 정신은 새로운 공부를 생각하지 않는다. 생기를 잃는 지름길이다. 구태의연한 사고는 유행이 지나거나 낡아빠진 옷과 다름없다. 정신도 영혼도 헌 것을 버리고 호기심과 담대함으로 도전해야 한다. 그것만이 생기있게 사는 유일무이한 방법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세계로 가는 길목을 잡아라』 등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그는 2015년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서인 회고록 『숲은 고요하지 않다』를 펴냈다. 산다는 것의 정체를, 삶의 본질을 조금은 더 깨닫고 난 후였다. 그리고 다시 헤밍웨이를 읽기 시작했다. 묵묵히 시련을 견디는 강인한 노인의 초상을 그린 『노인과 바다』를 말이다. 

“『노인과 바다』는 좌절을 모르는 불굴의 인간 정신에 대한 찬양이자 
 고독한 단독자로 존재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헌사입니다. 
 젊었을 때도 좋아했지만 나이 들어 읽으니 더 좋아지더군요.” 

헤밍웨이에게 어떤 자세로 죽음을 맞느냐 하는 문제는 평생의 관심사이자 문학의 주제였다. 그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 문제를 포함해 모든 정치·사회적 현안을 배격한 채 고독하지만 의연한 인물을 소설에 구현하고자 했다. 스토아적 극기에 비견되기도 하는 소설 속 노인의 모습이 점차 만나기 힘든 자질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오랜 시련에 단련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위엄을 지닌 노인의 이야기는 크나큰 위안을 준다. 이종찬 회장이 느즈막하게 고전적 휴머니즘의 정수 『노인과 바다』에 매료된 이유다. 

“복기하면 할수록 더 많은 주옥같은 문장들을 새로 발견하는 느낌입니다. 
 특히 상어와 사투를 벌이며 노인이 뱃전에서 되뇌는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살아가는 내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인간의 본질을 이보다 더 정확히 꿰뚫어 보는 말은 없으니까요"


배움에 실천이 따를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 펼쳐져
오는 8월 15일이면 광복회가 79주년을 맞는다. 80주년을 1년 앞두고 광복회에서는 <청년 헤리티지 아카데미>를 열었다. 오늘날 영화와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서만 험난한 항일투쟁과 독립의 여정을 접했을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다. 독립유공자 후손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제1기 청년 헤리티지 아카데미>에서는 총 4개월 동안 한국근대사, 독립운동사, 대한민국 정체성 등을 교육한다. 

“광복회는 독립운동을 하며 직접 총 들고 싸웠던 분들이 만든 단체입니다. 
 대부분은 돌아가시고 지금 남은 분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입니다. 
 2세 시대를 열긴 했지만 평균 연령이 75세일 정도로 노화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국가 원로단체로서 
 고유의 정신을 그대로 보존하는 동시에 활동의 주축을 좀 젊게 만들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광복회가 비록 독립운동가의 후손들부터 시작했지만 차츰 시민교육을 통해 범위를 넓혀가고자 합니다. 
 젊은 세대가 ‘아직은 배워야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배움과 실천이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 회장은 배워야 할 때인 동시에 행동하고 앎을 실천해야 할 때라고 거듭 강조했다. 

“안중근 의사는 만 31세에 거사를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에 서서 동양평화론을 얘기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상해 의거를 할 때 그의 나이 만 24세였습니다. 
 꽃다운 청년은 ‘잘못이 있다면 우리나라를 너희가 지배하려는 것이 잘못’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디 가서 축사, 개회사를 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 세대를 꽃송이 취급하지 말라고, 가르침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그들의 젊음과 에너지에 맞는 역할을 줘야 합니다. 
 안중근, 윤봉길 의사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모쪼록 <청년 헤리티지 아카데미>를 통해 
 수강생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며 국가와 공동체에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 

해야 할 일과 바라는 일을 웅변하는 이 회장의 말에는 힘이 넘쳤다. 눈빛은 이룰 때까지 꺾이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남들처럼 사는 대신 처음처럼 사는 것을 택한 사람. 그는 그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노인과 바다』의 결코 패배하지 않는 정신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노인과 바다』 中에서

이종찬 광복회장이 꼽은 ‘내 곁의 책
레미제라블 - 빅토르 위고 | 민음사
인간의 조건 - 앙드레 말로 | 지식을만드는지식
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 민음사


글 - 임지영, 사진 최충식
출처 - 월간국회도서관 2024. 06 vol.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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