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 월터스 - 「아름답게 사는 기술」
우울한 기자회견
1993년 11월에 한 신학생 출신의 남자가 버다닌 추기경을 성추행 협의로 고소한 일이 있었다.
시련은 6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마침내 고소인이 자기 스스로 증언의 허위를 고백했다.
이어서 반년이 지나 그러한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추기경은 췌장암 선고를 받고 대수술을 치렀다.
그때가 1995년 6월이었다.
수술 후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뒤에 버나딘 추기경은 병이 호전되었음을 통보받았다.
이제 1996년 8월 30일, 그는 또 한 차례의 기자 회견을 열었다.
추기경과 몇몇 그의 측근들이 기자 회견장에 들어섰다.
버나딘 추기경이 연설대 쪽으로 걸어왔다.
어느덧 회견장의 웅성거림이 멎고 추기경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이번 주 수요일에 로욜라 의료 센터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암이 재발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번 암은 간 부위에 생겼습니다.
저에게는 일 년 미만의 시한부 삶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때 한 기자가 외쳤다.
"왜 지금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는 것입니까?" 그러자 추기경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여러분은 제 가족의 일부이기 때문이죠." 추기경이 자리를 떠날 때 기자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조셉 버나딘 추기경은 그 후 두 달 반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교회 안에서 별처럼 빛나던 한 생애가 막을 내렸다.
믿음과 의존
일부 진화론 생물학자들은 우리 인간이 믿음의 선천적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유인원류의 새끼들은 태어난 지 몇 년 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새끼들이 어른들을 믿고 그들의 지시와 명령에 주의를 모아 순종하는 능력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절대 필요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믿음 유전자'를 가진 원시 시대 유인원류 새끼들은 그것이 결여된 새끼들보다 도 오래 생존했으며,
어른이 된 유인원들이 그 유전자를 자신의 자손들에게 물려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먼 후손들인 우리 인간에게는 대개 그들만큼 혹독하고 위협적인 생존 조건에 맞설 능력은 없지만,
부모와 다른 권위 있는 어른들을 믿는 능력은 여전히 잔재해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있는 자발적 믿음의 성향은 청년기와 성년기를 거쳐 성장하면서 점점 약해진다.
여러분은 뒤로 쓰러지는 놀이, 곧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팔에 안기는 놀이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은 이 놀이를 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특히 뒤에서 붙들어 안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 성인인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신을 놓아주기가 무척 힘들다.
심지어 뒤에서 안아 주기로 한 사람이 배우자나 가까운 친구일 경우도 그렇다.
자신의 운명을 다른이들의 손에 내어 맡긴다고 생각하면 맥이 빠질 정도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우리 자신을 기꺼이 혹은 힘 있게 보호해 줄 거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생물학자들의 말이 옳다면, 성인들은 믿음의 능력을 잃는다기보다 억압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밝혀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믿음은 의존을 수반한다.
내가 다른 이를 믿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자립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우리는 나이가 듦에 따라 자연히 부모에게 의존하려는 욕구로부터 멀어져 가며 자립하려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의존적인 존재에서 통제하려는 존제로 옮겨 간다.
우선 자기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 하고, 더 나아가 자녀들을 비롯하여 다른 이들의 삶을 통제하려 한다.
이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자기 내세음은 성숙한 발달의 한 표지이며, 자기 삶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욕구는 건강한 성인이 되는 데에 꼭 필요하다.
만약 그러한 최소한의 통제도 없다면, 그것은 심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건강한 삶이 결핍된 표지로 드러난다.
문제는 우리 중 상당수가 통재하려는 과도한 욕구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통제욕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지만 간혹 집착으로 흐르기까지 한다.
사실 우리 중 대부분은 대장 노릇을 하려는 독재자도 아니고 통제 중독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대부분은 의존을 유약함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기로 의존적이라 함은 수치스러운 것이고 사실상 자기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위험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를 배반할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의 근시안적인 전략이다.
우리에게 죽을 때가 오면, 우리가 체득하고 영위해 온 자립, 독립, 통제와 같은 문화적 가치들은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아이였을 때와 똑겉은 의존 상황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인이 된 이후 줄곧 의존을 거부해 왔고 믿음이라는 우리의 선천적 능력을 더 이상 기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마지막 몇 주 혹은 몇 달의 시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헨리 나웬이 지혜롭게 언급했듯이,
"제 2의 유아기로 접어들어 한 아이가 되는 것은 좋은 죽음을 맞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 그렇다면 제 2의 유아기는 어떤 특성을 지녔을까?
.... 그것은 새로운 의존이다" 그리고 의존성은 믿음을 요구한다.
나웬의 관점에 의하면, 죽음은 우리 존재의 온전한 의존성을 뚜렷이상기시켜 준다.
사실 삶의 한순간도 우리는 이러한 신적인 존재 근거로부터 독립해 있지 못했다.
우리가 건강하던 시절에 온 힘을 다해 열성적으로 추구해 온 통제와 자립은 결국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건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삶의 분주함 속에서는 이러한 의존적 현실을 잊기가 쉽다.
하지만 치명적인 병이 찾아와 자신을 줄곧 지탱해 주던 윧체적 힘이 쇠진해지면,
우리 육신의 연약함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의존성을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의존성은 힘없는 아이가 부모에게 온전히 의존하는 것과도 같다.
이때 우리 각자는 의존을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그를 거스를 것인지 하나의 최종적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 중 다수에게 이러한 시간은 자신을 낮추게 하는 시간으로, 어쩌면 수치스러움을 주는 삶의 시간으로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따라서 평소 우리가 선뜻 도움을 요청하고 받아들일 만큼 다른 이들을 믿는 데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삶의 마지막에 가서도 그렇게 하기가 힘겨울 것이다.
※ 이 글은 <아름답게 사는 기술>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케리 월터스 - 아름답게 사는 기술
역자 - 김성웅
생활성서사 - 20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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