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 월터스 - 「아름답게 사는 기술」
놓아주기, 있는 그대로 두기, 내어 맡기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 정도를 알아보는 '뒤로 쓰러지기 놀이'를 기억하는가?
이 놀이 체험은
믿음의 초기 단계와 관련한 내어 줌이나 놓아줌의 체험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탁월한 비유이다.
놓아준다는 것은 삶의 불확실함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인정하고,
이로써 통제하려는 욕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나는 절망에 빠지는 대신,
어려움과 두려움을 감내하고서라도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믿기를 결심하게 된다.
죽어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가장 철저히 놓아주는 체험을 한다.
죽음의 과정이 시작되면, 우리가 그동안 움켜쥐었던 삶은 우리 손아귀를 벗어난다.
사람들,
아름다운 풍경, 내리는 눈,
갓 끓여 내린 커피 향, 책,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이 모든 것과 반드시 이별해야 할 때가 오면,
이제껏 정상적으로 흘러갔던 상태가 우리에게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평소에 놓아주는 데에 길들여 있지 않는 한,
막상 죽어 가는 과정이 실제로 시작되면,
모든 것을 놓아주어야 하는 데서 오는 충격이 압도적으로 켜서 그것에 대응해 나가기가 힘들다.
인생에서 믿음을 실천하는 가운데, 특히 통제하고 움켜쥐고 매달리려는 욕구를 놓는 연습을 통해,
우리는 결국에는 놓아주어야 할 삶의 운명에 맞설 더 나은 심리적 - 영성적 조건에 머무를 것이다.
이로써 나는 그들을 내 욕구에 끼워 맞춰 개조하느라 애쓰기보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은 '가만두는 것'이나 '간섭을 삼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것은 일종의 수동적 자세나 운명론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한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훨씬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무언가로서 다른 이가 존재하도록 허용해 주는 것,
존재하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 또는 존재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이란 죽음을 있는 그대로,
곧 모든 이에게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삶의 종결로써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두는 가운데,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합당하게 죽음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을 취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이 소중하기는 해도
결국 앞서 살다간 다른 어느 누구의 삶보다 더 많은 특권을 받은 것이 아님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은 이미 다른 이들도 겪은 것이다.
결국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공포와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삶을 떠나는 게 아쉽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더 이상 삶과의 이별을 부자연스럽거나
사악한 것으로 여긴 채 그것과 처절하게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내어 맡기기는 믿음의 세 번째 단계이다.
'내어 맡기기'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데베쿳'은
유다교 신비가들이 인간의 신적 존재 근거에 대한 철처한 충실함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던 말이다.
이 말은 겁에 질린 아이가 어머니 손을 꼭 움켜쥐듯,
두려운 나머지 하느님을 붙드는 행위를 뜻하는 게 아니다.
특별히 죽음이 주는 당혹스러운 고통 한가운데서 하느님께 내어 맡긴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에는 다 그 목적이 있고,
죽음도 우발적이거나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긍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일단 통재하려고 애쓰는 것을 멈출 때야
비로소 자연스헙게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의존성을 께닫고,
이로써 그 의존 관계에 자신을 개방할 수 있다.
다른 모든 덕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믿음은 대비와 균형의 문제로 귀결된다.
무억을 포기하고 무엇을 껴안아야 할지 아는 것, 그것이 믿음의 열쇠이다.
중년기의 회심
아무리 철저한 회심이라 해도 평생 길러 온 습관들을 하룻밤 사이에 바꾸기란 아주 어렵다.
버나딘 주교 역시 회심 후로도 자신의 집착을 놓아주고
다른 이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둘 수 있을 만큼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데 힘겨워했다.
그는 중년기에 기록한 영적 일기에서 자주 이러한 투쟁에 대해 써 내려갔다.
“나는 주님께서 들어오시게 문을 열어 그분께서 내 영혼을 온전히 차지하시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좀처럼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어느 정도만 그분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게 허용한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분께서 나를 차지하실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더 없이 큰 외로움
버나딘 추기경은 몰려오는 두려움과 회의감을 억압하지도 않았고 그 감정들에 휩쓸리지도 않았다.
한밤중에 파고드는 두려움과 이따금 찾아오는 회의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하느님께 믿음을 두었고,
그러한 믿음에 힘입어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해결사가 아니시더라도,
로완 윌리엄스가 말한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새로운 가능성들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 수 있었다.
버나딘 추기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믿음은
“ (치유와 같은) 무언가가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 어린 보살핌 속에 살고자 하는 자세이다. ……
믿음은 어떠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해 준다.”고 했다.
이러한 믿음에 힘입어 버나딘 추기경은
어둠이 밀려오고 모든 것이 절망스럽게 다가오는 힘겨운 순간들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는 수술을 마친 후 같은 해 9월, 사제들의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따금 헛수고를 무릅쓰고서라도 작아지려고 애씁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내 안에서 커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록 내 인생이 온통 굽은 길로 가득하지만
나는 주님께서 그 길을 똑바로 펴시도록 그분께 내어 맡기려 합니다."
극의 결말
우리는 죽음을 적으로 바라볼 수도, 아니면 친구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적으로 바라보면, 죽음은 불안과 두려움을 낳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죽음을 부정하는 상태로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친구로 바라보면, 우리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으로서 나는 죽음을 친구로,
지상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가는 중간 휴식처로 바라봅니다.
버나딘 추기경의 유산
버나딘 추기경이 보여 준 삶과 죽음의 방식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소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선물로 남겼다.
이러한 모든 자세는 착한 삶의 조건이 된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자세들을 밑거름으로 삼아 때가 되면
찾아오는죽음을 품위와 인내와 선한 의지를 갖고 맞이할 수 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믿음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죽음을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버나딘 추기경이 깨달은 바와 같이,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지막) 여정에 우리와 동반하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p83)
※ 이 글은 <아름답게 사는 기술>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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