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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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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소유냐 삶이냐/제2장 일상 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4 독서

by 탄천사랑 2009. 8. 6.

 

 

 

소유냐 삶이냐 - 에리히 프롬 / 홍신문화사 2011. 01. 25.

제2장 일상 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 4. 독서
대화에 있어서 진리인 것은 독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독서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대화이다(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물론 독서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대화와 마찬가지로 내가 누구의 작품을 읽는가
(또는 누구와 이야기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성이 없는 값싼 소설을 읽는 것은 일종의 백일몽이다. 
그것은 생산적인 반응을 가져올 수 없다. 

즉 문장을 텔레비전의 쇼처럼, 
아니면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는 감자튀김처럼 습관적으로 삼킬 뿐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발자크의 소설은 내적 참여와 함께 생산적으로, 즉 존재양식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대부분의 일상적 독서시간은 소비의 양식, 즉 소유 양식으로 읽는 일로 허송되고 있다.
독자들은 호기심에만 이끌려 주인공의 생사, 
혹은 여주인공이 유혹당했는가 저항했는가 등의 줄거리에 관심을 기울이며 또 결과를 알고 싶어 한다.

소설은 그들을 흥분시키는 일종의 전희前戱 역할을 한다.
즉 행복한 또는 불행한 전말에 의해 그들의 경험은 절정에 달한다.
결말을 알았을 때, 
그들은 마치 자신의 경험에서 그 결말을 찾아낸 것처럼 현실적으로 전체 스토리를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고양시키지는 못한다.
즉 그들은 소설 속의 인물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자신의 통찰력을 심화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지식조차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독서의 양식은 그 대상이 철학 책이나 역사책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철학 책이나 역사책을 읽는 방식은 교육에 의해서 형성, 아니, 더 적절하게 말하면 변형된다. 
학교는 저마다의 학생에게 어느 정도의 '문화적 재산'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학교교육이 끝날 때에는 학생들은 적어도 그 최소량을 '가지고'있다는 것을 보증해 준다. 
그들은 저자의 주요 사상을 외울 수 있게 하는 독서교육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을 '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원까지의 다양한 교육수준 사이의 차이는 주로 획득한 문화적 재산의 양에 있으며, 
이것은 학생들이 이후의 생애에서 소유하기를 바라는 물질적 재산의 양과 대충 일치하는 것이다. 
이른바 우수한 학생이란 여러 철학자들이 각기 말한 것을 가장 정확하게 외울 수 있는 학생들이다. 

그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박물관 안내인과 비슷하다.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특정 지식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철학자에게 질문하고 그들과 말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철학자 자신의 모순과, 
그가 어떤 문제는 무시하고 있거나 쟁점을 회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당시에는 새로웠던 것과, 그 시대의 '상식'이었으므로 
저자가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의 차이를 구별하기 위한 법도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또한 저자가 단지 그의 머리로만 말할 때와 
머리와 가슴이 함께 말할 때를 구별할 수 있도록 듣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저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내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 
이 밖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는, 
이따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책조차도 
전혀 가치가 없거나 극히 제한된 가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또한 그들은 저자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쓴 모든 사실에 관하여 
이따금 저자보다 더 잘 이해할지도 모른다.

 


※ 이 글은 <소유냐 삶이냐>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9.08.06.  210807-075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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