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변화시킨 오두막 집 짓기 <마이클 폴란의 주말 집 짓기>
손재주 하나 없는 작가는 2년 반 동안 주말을 꼬박 바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뉴잉글랜드의 집 뒷숲에 자리잡은 오두막, 집을 설계하고 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세상 모든 건물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방문에 자물쇠를 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생각할 수 있는 권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 쓴 말이다.
남자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욕망하는 식물><잡식동물의 딜레마> 등을 쓴 미국의 저명한 작가 마이클 폴란 UC버클리대 교수는
마흔이 되기 몇 해 전, 이러한 욕구가 불쑥 찾아왔다.
중년의 권태기가 찾아왔고, 아이가 태어난다는 압박감에도 시달렸고, 집에서 벗어날 탈출구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유보다도 단지 만드는 사람, 즉 ‘호모 파베르’의 세계에 몸담아 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폴란에 따르면 건축이란
“꿈이 그림이라는 형태로 구현되고,
또 나무와 돌과 유리로 옮겨가 마침내 현실 속에 뚜렷한 실체로 자리잡는 경이로운 일”이다.
때는 1990년대였다.
인터넷이 실생활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사이버 공간의 무한한 가능성이
벽돌과 시멘트로 쌓아 올린 구닥다리 현실 공간에 비해 대단하게 느껴지는 시대적 배경 속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는 몸을 도구 삼아 집을 짓는 행위를 통해,
디지털화에 맞서 자연을 옹호하는 목소리에 힘을 싣는 일에 동참했다.
첫 관문은 집터 정하기.
18세기 영국의 정원 문학을 쓴 문호 알렉산더 포프,
호레이스 월풀 등에게 지혜를 빌려 정원이 보이는 곳에 터를 정하기로 했다.
그것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자연이 창틀 속에 담기는 것을 의미했다.
다음은 종이에 옮기기.
손바닥만한 방에도 따질 건 많았다.
책상과 데이베드, 책장, 벽난로, 앉을 공간, 그리고 포치를 담고 싶었다.
황금비율의 구조를 위해 정해진 크기는 4×2.5m.
‘주술적인’ 비율법에 따라 사이즈를 정해 설계도면을 그렸지만, 건축 허가를 받다 퇴짜를 맞았다.
허가를 받고는 몸살이 나면서 1t의 콘트리트를 손으로 휘저어 토대를 만들고,
나무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골조를 세웠다.
비록 2˚가 틀어지긴 했지만, 상상한 그대로가 눈앞에 펼쳐진 나만의 집의 형태가 갖추어져 갔다.
11월의 어느 쌀쌀한 날 모든 작업이 끝났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가면서,
직접 손으로 꿈꾸던 형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다.
지나온 과정만큼, 이 건물은 앞으로 그를 변화시킬 공간이기도 했다.
그는 집을 배의 ‘조타실’이라고 여겼다.
꿈의 여정을 떠나도록 이끌어주는 조타실.
그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전까지 십 년간 오두막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두 권의 책을 썼으며,
연못과 정원이 내다보이는 물푸레나무 책상에 앉아 다음 책을 공상했다.
그 집은 사유와 공상, 글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결국 윈스턴 처칠의 격언 ‘인간은 건물을 만들고,
건물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문외한의 좌충우돌 집 짓기는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남게 됐다.
모든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고,
유머를 더해진 이 책은 상상력이 가지처럼 뻗어나가는 사유의 전개가 일품인 논픽션이다.
출처 - 매일경재 Citylife 제534호
[t-16.06.26. 20210616_19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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