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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외국작가

크리스티앙 게 폴리캥 - 눈의 무게 38.

by 탄천사랑 2021. 1. 23.

 

 

 

 

눈의 무게 - 크리스티앙 게 폴리캥 / 엘리 2020. 11 0.6.

38.
창밖은 빈틈없는 설경이다.
눈이 풍경을 장악하고, 산을 으스러뜨린다.
나무들은 휘었거나, 굽었거나, 아래를 본다.
구부러지기를 거부하는 것은 키 큰 가문비나무들뿐이다.
그것들은 꼿꼿이 그리고 검게, 버틴다.
가문비나무들이 서 있는 곳에서 마을이 끝나고 숲이 시작된다.

창문 앞에서, 새들이 분주히 오가고, 서로 다투며 뭔가를 쪼아 먹는다.
때로 그중 한 마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적막한 집안을 살핀다.

바깥 창틀에, 껍질을 벗긴 가느다란 가지 하나가 수평으로 고정되어 있다.
청우계 대신이다. 
끝이 위를 향하면 날이 맑고 건조할 징조다.
아래를 향하면 눈이 내릴 징조다.
가지가 수평으로 누운 걸로 보아 앞으로 며칠 날씨가 어떨지는 짐작할 수 없다.

아마 제법 늦은 시각일 것이다.
하늘은 얼룩 한 점 없는 진한 잿빛이다.
해가 어디쯤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눈송이 몇 개가 주츰대며 허공을 떠돈다.
집에서 백여 걸음 떨어진 곳, 숲 속 빈터의 눈 속에 마티아스가 긴 막대를 꽂는다.
돛대처럼 보이지만, 돛도 깃발도 달리지 않았다.

물방울이 코니스에 맺히더니 고드름을 타고 떨어진다.
해가 나오면 고드름이 칼날처럼 번쩍인다.
때로 그중 한 개가 부러지고, 떨어져 눈 속에 박힌다.
무한한 공간을 찌르는 비수처럼.

그러나 눈은 꿈쩍하지 않는다.
머지않아 나의 창턱까지 눈이 쌓이리라.
마침내 창문까지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겨울이다.
낮은 짧고 춥다.
눈이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거대한 공간이 몸을 움츠린다.

코니스 - 처마에 맞닿은 벽면에 띠 모양으로 돌출한 부분.

 


출판사서평
광범위한 정전으로 삶이 멈춰버린 숲가의 마을, 정전과 폭설로 발이 묶여 도시로 돌아가지 못한 채 외딴집에 머물고 있는 노인은 어느 날 자동차 사고를 당한 청년을 돌봐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생사를 오가는 청년을 돌봐주는 대가로 배급품을 나눠주고 봄에 도시로 향할 원정대에도 넣어주겠다고 제안하고, 노인은 마지못해 승낙한다. 도시에 두고 온 아픈 아내만을 생각하는 노인 마티아스와, 오랜 세월 끝에 아버지를 보러 왔지만 임종을 놓친 청년 ‘나’는 그렇게 “출구 없는 미궁”처럼 펼쳐지는 겨울의 굶주린 배 속으로 함께 들어서게 된다. 끊임없이 쌓이는 눈, 반복되는 일과로 이어가는 삶, 제각기 다른 목적으로 두 사람을 찾아오는 마을 사람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미궁 속 괴물처럼 겨울은 두 사람을 가두고 쫓고 삼킨다. 끝을 알 수 없는 겨울의 두께 아랫사람들은 떠나거나 남고, 배급은 불안정해지고, 원정대는 은밀히 준비되고, 긴장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아득한 겨울을, 서로를, 두 사람은 견뎌낼 수 있을까.


※ 이 글은 <눈의 무게>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1.01.23.  20210120_15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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