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윈 쿨러, 린다 로웬탈 - 열망」
[210702-175310]
"한 가지를 배웠으면 그때부터 더 깊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수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내가 학교에 다녀와서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배운 지식으로 열을 올릴 때면 늘 그러셨다.
저녁을 먹으면서 동생들에게 내 생각을 늘어놓으며 잘난 체하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이의를 제게하셨다.
그러면 나도 어감없이 대꾸했다.
"엄마도 다 아시는 건 아니잖아요.
제 애길 들으면 배우는 게 있을 걸요."
하지만 그러고 나면 어머니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매섭게 나를 쏘아보았고,
나는 곧 그 눈길에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뭐라고 하시던?
좀 더 알아볼 문제는 없을까? 아마 더 있을 거야."
나는 곧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아버지 서재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갔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어머니에게 말해줄 새로운 통찰을, 마침내 어머니를 쓰러뜨릴 해답을 가지고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열띤 토론을 새로 한 판 벌이기 위한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은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을 낳는다는
유대인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어머니는 몸소 실천하신 것이다.
진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단, 우리가 끊임없이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에 있을 때에만 그렇다.
어머니는 이 교훈을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도 가르치셨다.
내가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과 싸울 때면 어머니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잘못을 했는지,
누가 먼저 때렸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고 하면
'그럼, 넌? 너는 전혀 잘못이 없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어떤 한 가지 괌점이 유일한 시각일 수 없다는 것,
모두의 말에 나름의 진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훤히 알고 계셨다.
내가 옳다고 확신할 때마다 어머니는 반드시 이 점을 환기시키셨다.
그것은 상대방의 기분과 생각도 살피라는 신호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일단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나면 이기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현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자기 확신으로부터 한 발 물러서 있게 하려고 노력해왔다.
더 깊은 깨달음에 이르고 도덕적인 시야를 넓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어떤 두 사람의 상황이 같을 수 없으므로 모든 답은 근원적으로 잠정적이라는 것을 현자들은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오늘과 다른 도덕적 딜레마가 있을 것이고,
그 다음날은 또 다른 딜레마가 있을 것이다.
인생의 큰 의문들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답이 있을 수 없다.
더 심오한 질문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참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면이 있다.
진실을 구한다는 것은 어느 순간 손을 터는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점점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다시 깨닫는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유대교의 가르침은 신을 믿되 회의론자가 되라고 권한다.
많은 사람들은 회의주의가 쓸모없고 희망 없고 냉소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회의주의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게 만들어 진실을 깨닫도록 해준다.
이렇듯 진실을 간직하는 동시에 진실을 추구할 때,
우리는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평생 배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대하기에 더 재미있고 도 편한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무슨 일에나 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묶이지 않으면 진실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조언을 해왔는데
내가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해진 답을 듣고 싶어 했다.
인생에서 언젠가는 모든 것이 앞뒤가 맞아 떨어지기를 바랐다.
우리는 편안한 착륙지를 원하고,
다 이루었다는 만족을 바라고,
내가 누구며 어떤 사람이었던가에 대한 진실을 알기 원한다.
겉으로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이고
유언하다고 자랑하면서도 속으로는 자명하다고 여기는 신념들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
상황이 힘들 때,
장애를 만났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생각들 말이다.
하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는
진실을 발견하는 일 못지않게 끓임없이 진실을 구하는 태도 또한 중요하다.
어차피 각자에게는 140억년(오늘날의 과학으로 우주의 나이라고 추정하는 시간)의 진화과정 가운데
단 몇 십년이 주어질 뿐이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어떻게 혹시라도 무한에, 세상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진리에 다가갈 수 있겠는가.
아니면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라도 이를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주제는 크든 작든 단 한 가지도 없다.
만약 자신이 최종적인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조금 덜 살아 있고 조금 덜 깨어 있으며 세계는 더 작아져 있을 것이다.
'순간의 믿음'과 '순간의 의심'
유대교의 가르침을 담은 고전인 탈무드는 1500년 이상 연구대상이 되었다.
놀랄 일도 아니다.
탈무드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400년간의 논쟁이 기록되어 있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역설과 통찰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탈무드는 진실과 진실이 부딪쳐 서로의 소리를 울려펴지게 한다.
독지들은 스스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탈무드에서 가장 격력한 논쟁들 중 하나는 고대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힐랠과 샴마이 사이의 논쟁이다.
이 둘은 각기 학파를 이루었고 접근법도 서로 달랐으며 오늘날의 상호 경쟁적인 두뇌집단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브루킹스 연구소와 헤리티지 재단,
시카고 경제학파와 런던 경제학파, 프로이트 학파와 융 학파의 경우처럼 말이다.
힐랠 학파와 샴마이 학파 학생들은 사회 정책부터 일상생활을 망라하는 주재들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했다.
두 학파는 주기적으로 서로 정반대의 결론을 내놓았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진실들을 말이다.
그때부터 흥미진진한 광경(힐랠과 샴마가 벌이는 대토론)이 전개되었다.
경제 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커플들이 사랑에 실패하는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시간을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대해 허약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결론들은 주제와 무게를 생각하면 분명한 결론이 필요하고 또 그래야 마땅할 것 같다.
하지만 탈무드는 정답이나 따라야 할 규칙 목록을 단순히 제시하기보다는
이 위대한 철학 학파들 사이의 논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의 치고 받는 시합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 생각해볼 만한 반론들을 직접 들이댄다.
많은 경우 결론에 이르면 마지막 결정은 힐랠의 뜻을 따랐지만,
그것은 힐랠이 객관적으로 옳기 때문은 아니었다.
양쪽 가르침에 대해 탈무드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과 저것 모두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왜 판정은 힐랠을 따랐는가?
힐랠이 발견 과정에서 지킨 윤리, 모색 과정에서 보여준 정신적인 태도,
그리고 그의 연구 방법 때문이었다.
힐랠 학파는 항상 샴마이의 관점을 연구하면서 그것과 싸웠고,
자신들의 의견에 앞서 상대방의 의견을 가르쳤다.
상대방의 부분적인 진실을 이해하고 존중했으며,
자신들의 관점을 알리고 넓히는 과정에서 가장 포괄적인 답에 이르기 위해 샴마이의 통찰을 이용했다.
말하자면, 모든 진실이 우리가 더 넓은 현실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든 진실이 삶에 대한 더 깊은 진실을 약속한다.
힐랠은 샴마이를 희생시키고 이긴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이겼다.
나는 누군가와 의견이 맞지 않을 때마다 힐랠과 샴마이를 생각한다.
내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다른 진실들과 섞이도록 놓아두고,
내 시야를 상대방의 렌즈를 통해 조정하려 애쓴다.
의견이 분분한 이슈를 놓고 학생들과 토론할 때면,
나는 그들에게 자신이 반대하는 입장에서 먼저 논해보라고 말한다.
한 학생이 페미니즘의 견해를 강력히 고수한다면
나는 그에게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주장해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학생에게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논해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런 연습을 거친 학생들은 최종 에세이에서 눈부신 발전을 보인다.
두 개의 생각이 부딪치는 것은 하나가 참이고 다른 하나가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다.
각각이 현실에서 다른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자인 닐스 보어는 이렇게 가르쳤다.
"사실과 반대는 거짓이다.
하지만 심오한 진실의 반대는 또 하나의 심오한 진실인 경우가 많다." (p26)
※ 이 글은 <열망>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어윈 쿨러 , 린다 로웬탈 - 열망
역자 - 문영혜
지식의숲 - 2007.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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