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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비문학(역사.사회.문학.

뺑 오 쇼콜라 Pain au chocolat

by 탄천사랑 2010. 4. 20.

·「이병진 - 맛있는 빵집」




달콤한 추억, 스트라스부르의 뺑 오 쇼콜라
35년 전, 군 복무를 마친 나는 복학을 몇 달 앞두고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기대만으로 나선 여행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식상해졌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기차에서 내렸다.
동이 채 뜨지도 않은 새벽녘, 프랑스 동부의 국경도시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가 눈앞에 펼쳐졌다.

불편한 객차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급하게 내린 탓에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헝클어졌고, 얼굴과 발은 퉁퉁 부었다.
이런 형편없는 몰골보다 나를 더 처량하게 만든 것은 속절없는 배 고품이었다.

역 주변에서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하지만 그 새벽에 나의 허기를 면하게 해줄 곳은 없었다.
지도를 펴들고 구시가지 중심부의 대성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행하는 동안 넘치도록 보아온 대성당을 또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혹시 여행 안내서에 나와 있지 않은 노점이라도 찾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스트라스부르에서 맛 본 뺑 오 쇼콜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한 곳이 진짜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였을 때의 암담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공복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작은 희망마저 체념으로 바뀌는 순간,
어딘가에서 희미하지만 향긋한 냄새가 퍼져왔다.
희미한 냄새를 따라 발길이 다다른 곳은 막 문을 연 빵집이었다.

대성당 인근에 위치한 그 빵집에서는 갓 구운 빵들을 매대에 진열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고를 것도 없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크루아상 한 개와 
베개처럼 생긴 이름 모를 빵 하나를 골라 값을 치르자마자 에스프레소와 함께 곧바로 입에 넣었다.

한입 베어 문 베개 모양 빵에서 따뜻함과 고소함이 느껴지나 싶더니 
곧이어 쌉싸래하면서 달콤한 향이 입 안 가득 채워졌다.
한 입 베어 먹고 난 빵의 단면을 살펴보니 크루아상과 같이 겉은 바삭바삭하게 잘 구워져 있고,
속은 얇고 부드러운 수 십, 수 백 겹의 층이 촘촘히 부풀어 올라 있었다.

방금 구워서인지 버터의 진한 향은 빵을 삼킨 후에도 한참 동안 입 안에 남아 있었고, 
초콜릿도 입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구석구석까지 그 진한 향과 맛이 골고루 퍼져 나갔다.

'프랑스 사람들은 빵도 예술적으로 만드는구먼'



프랑스 빵 전문점
얼마 전, 프랑스인 주인과 셰프가 빵과 과자, 
요리를 통해 프랑스 문화를 알려주는 곳이 서울 청담동에 생겼다고 해서 찾아갔다.
그런데 보통의 제과점 진열대와는 좀 다르다.
이곳에서는 여느 제과점처럼 손님이 직접 빵을 담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진열대 바깥쪽에서 원하는 빵을 고르면 안쪽의 매장 직원이 빵을 담아준다.
판매 방식도 프랑스식인가 보다.
진열대가 시작되는 곳부터 끝까지 천천히 둘러봤다.

바게트 Baguette,  바따르 Batatd, 뺑 드 깡빠뉴 Pain de Campagne, 플뤼뜨 Flute, 에삐 Epi등의 하드 계열 빵과 
크루아상 croissant, 데니쉬 페이스트리 Danish Pastry, 슈께뜨 chouquette, 에끌레어 Echairs, 등 
정통 프랑스 빵과 과자만으로 진열대가 가득 채워져 있다.
다른 제과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빵들이 대부분이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던 중 눈에 익은 빵 하나가 보인다.
이불을 개놓은 듯 도톰하게 접힌 모양,
그 양쪽 끝에 녹아내린 초콜릿, 내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감동했던 그 빵,
뺑 오 쇼콜라 Pain au chocolat 였다.



뺑 오 쇼콜라 Pain au chocolat
요즘에는 비교적 많은 제과점에서 볼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뺑 오 쇼콜라를 만드는 제과점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우연히 찾은 제과점에 뺑 오 쇼콜라가 있으면 반드시 사 먹었다.
하지만, 매번 먹을 때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느낀 그 맛과 향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그때만큼 배가 고프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빵이 따뜻하지 않아서?
 여행지에서는 감상적이 되잖아. 
 나의 오감이 뺑 오 쇼콜라를 실제 맛보다 더 맛있다고 과대평가했을지도 몰라'

원인이 어떻게 됐든 내가 지금까지 먹어왔던 제품들은 처음만 못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매번 뺑 오 쇼콜라를 맛본 후 실망만 하게 되자 어느 때부터 뺑 오 쇼콜라를 먹지 않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뺑 오 쇼콜라를 맛본 지 꽤나 오래된 것 같아 갑자기 먹고 싶어졌다.
프랑스 빵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이라는 기대감이 나의 호기심과 무의식을 자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큰 기대를 가지고 고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먹어보지 못해 그냥 그 맛을 상기시켜보고 싶은 것뿐이었다.

<기욤>에서 뺑 오 쇼콜라와 몇 가지 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별로 출출하지는 않았지만 식어 있는 뺑 오 쇼콜라를 오븐에 넣고 데우기 시작한다.
빵을 따뜻하게 데우면 버터의 풍미도 살아날지 모르고,
초콜릿도 살짝 녹아 빵과 잘 어우러지겠지? 
감상적인 분위기가 전혀 조성되지 않는 부엌에서 따끈따끈 해진 뺑 오 쇼콜라를 한 입 먹었다.
다시 데워서 그런지 약간 눅눅해지긴 했지만,
겉은 여전히 파삭파삭했고, 속은 앏은 겹들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예상대로 버터의 풍미도 넉넉히 느껴졌고, 

부드럽게 녹아내린 초콜릿도 입 안에서 빵과 골고루 섞여 적당한 단맛과 향을 전한다.
어디 흠잡을 곳이 없다. 달콤하면서도 우아한 빵이다.

뺑 오 쇼콜라를 조금씩 떼어 먹으면서 15년 전에 먹은 빵과 비교하는 대신 배낭여행의 기억들을 더듬어 본다.
허기에 지친 나의 배를 채워주던, 삼키기가 미안할 정도로 맛있었던 그 빵.
스트라스부르로 날아가 지금도 그 빵이 그렇게 맛있을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 이 글은 <맛있는 빵집>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병진 - 맛있는 빵집
달 - 2010. 01. 11. 

[t-10.04.20.  20210403-17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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