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겸노 - 문방사우」
[210702-174828]
사랑舍廊과 문방文房
우리 선조들은 고고한 지조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생활이 소박하고 풍위가 있으면서도 멋을 지니고 살아왔다.
시와 서화書畵를 즐기는 우리나라 선비들의 기픔 있는 풍류는
대국이었던 중국에서도 부러워하고 칭찬했을 정도이다.
이런 선배들의 멋이 가장 상징적으로 표출된 곳이 사랑舍廊이다.
사랑은 아녀자들의 주거 생활 공간인 안채와는 전혀 다른 선비들만의 생활 공간이었다.
선비들은 이곳에서 벗과 더불어 시를 옮고 서화書畵를 논하고 담소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공간을 문방 즉, 선비들의 방이라고 일컬었다
문방의 구상
<중문사전中文辭典>에 보면 문방이란 '위전장문한지처야謂典掌文翰之處也'라고 했다.
이는 문한文翰을 다루는 곳, 즉 문사文士들의 방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묵향 그윽한 문사들의 문방은 누구나 한번쯤 구상해 보고 싶은 정서적인 공간일 것이다.
그러면 가상으로 공중 누각 같은 서재를 구상해 보자.
30여 년 전,
서화 중간 상인으로부터 외짝 족자 한 폭을 얻은 일이 있다.
비록 외짝이지만 낙관落款이 찍힌 이 족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일분옥 이분죽 삼분수 一分屋 二分竹 三分水'
매우 깨끗하고 탈속脫俗한 문향文香을 풍기는 우수한 작품으로
'숙헌 장도 서어전 벽경단叔憲 張度 書於傳 壁經堂' 이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중국 인명사전에 장도張度 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 글씨의 작자作者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아홉 자에 포함된 뜻이 무엇인지 읽기는 쉬우나 뜻은 난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홉 자를 굳이 인용하는 것이 좀 억지인지는 몰라도,
이 글이 필시 장도가 자신의 서재인 벽경당의 풍경을 상징한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곧 서실은 삼간초당三間草堂이고 뜰의 죽림竹林은 초당 두 배 정도의 넓이이고
그 앞의 호수는 초당 세 배쯤의 공간이라면 거대한 별장에 비할 수는 없지만
고고한 선비의 이상적인 서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상의 서재를 설계해 보면,
우선 남향으로 초가삼간을 짓는다.
예부터 음덕陰德을 많이 쌓아야 남향집에 살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집은 남향이라야 겨울에 볕이 잘 들어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다.
서재 주위에는 사철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지고 그 사이사이에
기암괴석이 솟아 있는 아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서재를 에워싸고 있으면 더없이 좋다.
초당 옆으로 사시절 마르지 않는 냇물이 술렁술렁 흐르고
뜰에는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향기롭고,
한 마장 떨어진 곳에는 호수가 있어 친구들과 낚시대를 둘러메고
거니는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문방을 지은 다음에는 근사한 서재의 이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언제였던가?
고故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 유산 민경갑酉山 閔慶甲,
고 소향 이상로素鄕 李相魯 등 몇 사람이
필자의 인왕산방仁旺山房 에서 하루를 소일하다가 겸여는 '취석산방醉石山房' 으로,
연민淵民은 '산기서루山氣書樓' 로 필자의 서재 이름을 휘호한 일이 있는데,
필자는 인왕산방, 수성동水聲洞 주인 등으로 쓴다.
여기서 선인들의 서재명 몇 가지를 들어 보자.
추사 김정희의 서재명으로는
'삼십육구초당三十六鷗草堂'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艸堂'
'십수매화서옥十樹梅花書屋' '경권다로실經巻茶爐室'
'육경일금재六經一琴齋' 등이 있다.
난으로 유명한 민영익閔泳翊의 '천심죽재千尋竹齋' 윤보 김기백 화뱍의 '운보의 집'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화백의 '노시산방老枾山房'
그 밖에 '고경당古經堂' '연경재硏經齋' '옥경산방玉磬山房'을 비롯하여
송나라 미불米芾이 쓴 '백석청등산방白石靑藤山房'을 새긴 나무 현판을 본 적도 있다.
문방사우란
문방에 없어서는 안 될 종이, 붓, 먹, 벼루 4가지를 문방 사우(四友라고 하며
혹은 문방사후文房四候, 사보四寶,四譜, 라고도 한다.
문방사후는 사우를 의인화擬人化하여
각각 벼슬 이름을 붙여 준 것으로 매우 재미있는 발상이다.
호치후 저지백 (好畤侯 楮知白 종이(紙
관성후 모원예 (管城侯 毛元銳 붓(筆
송자후 이현광 (松滋侯 易玄光 먹(墨
즉묵후 석허중 (即墨侯 石虛中 벼루(硯
또 사보四譜라는 말은 송나라의 소이간蘇易簡이 필보筆譜 2권.
연보硯譜, 묵보墨譜, 지보紙譜, 라는 4가지 책을 지은데서 유래되었으며,
사보四寶는
휘주부徽州府와 흡현歙縣에 지, 필, 묵, 연의 문방사우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사보당四寶堂 이라는 가게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우를 지, 필, 묵, 연의 순으로 부르는 데 반해,
중국에서는 지, 묵, 필, 연 또는 연, 지, 필, 묵으로 부른다. (p9)
※ 이 글은 <문방사우>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겸노 - 문방사우
대원사 - 2001. 03. 30.
'내가만난글 > 비문학(역사.사회.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어윈 쿨러, 린다 로웬탈-열망/겸허와 진실. (0) | 2009.07.18 |
---|---|
·이겸노-문방사우/명연名硯 이야기 (0) | 2009.07.11 |
카피 한 줄의 힘 - 후회 없는 광고인이 되기 위해서 (0) | 2008.12.07 |
비상구 없는 일본의 에로스 - 흔들리는 일본의 가정 (0) | 2008.04.20 |
운우지정(雲雨之情) (0) | 2007.12.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