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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유아 어린이/쉼터

까트린 이야기 - 2 (4)

by 탄천사랑 2008. 2. 25.

·「빠트릭 모디아노 - 까트린 이야기」




나 역시 '찰거머리'의 등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내 숙제를 자기가 부르는 대로 받아쓰게 하고 싶어 했다.
덕분에 이따금 좋은 점수를 받긴 했지만, 선생님에게 <주제에서 벗어났음>이라는 지적을 받곤 했다.

그것을 보고 아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불러 준 것이 네가 느끼기에 <주제를 벗어났다> 싶으면, 그걸 찢어 버리렴.
 그러고 나서 너 혼자 다시 하는 거야"

그 사람이 없을 때, 아빠는 곧잘 그의 흉내를 내었다.
"쌍반점 찍고 따옴표 열고 반점 찍고 쌍점 찍고 괄호 열고 줄 바꿔서 괄호 닫고 따옴표 닫고...."

아빠가 카스트 라드 씨의 남프랑스 말투까지 흉내를 내는 통에 나는 배꼽을 쥐고 깔깔거렸다.
그러면 아빠는 또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학생, 좀 진지한 태도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U자 위에 크레마(분음 부호) 찍는 거 잊지 말아요......, 
 그리고 안경을 다시 쓰도록 해요. 그래야 세상이 있는 그대로 보일 테니까......"

어느 날 오후, 아빠랑 학교에서 돌아온 참이었는데,
카스트 라드 씨가 내게 성적 통지 표를 보여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입에 문 궐련 물부리를 잘근거리면서 내 성적 통지 표를 보고 나더니,
그는 그 내숭스럽고 우악한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학생, 나 대단히 실망했어요. 
 나는 이보다 더 좋은 성적이 나오리라고 기대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맞춤법에서만큼은 말이에요.
 이 성적 통지 표를 읽으면서 내가 확인한 것은..."

하지만 나는 버릇없이 안경을 벗고,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아빠가 나서서 그를 만류하였다.
"그만해요. 카스트 라드. 
 당신. 사람을 어지간히 피곤하게 만드는군요. 이 아이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둬요."
"좋아요.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요"

카스트 라드 씨는 상반신을 거드름스럽게 젖히며 일어서서 사무실 문까지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아주 꼿꼿하고 당당한 자세로,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롤러 스케이트를 탄 사람처럼 그가 사라졌다.
아빠와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안경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훗날 미국에 와서 그때를 돌이켜보니,
오뜨빌 거리의 가게도 카스트 라드 씨도 아스라하게만 느껴져서, 
마침내는 그 가게와 그 사람이 정말로 존재했었는지를 의심할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산보를 하던 중에 
나는 아빠에게 카스트 라드 씨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가 부르는 대로 편지를 받아쓰고 그의 훈계를 직 우긋하게 듣고만 있을 만큼 그 사람이 
아빠의 사업과 우리의 가정 생활에 그토록 큰 힘을 행사하도록 허락한 까닭이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아빠는 내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단다.
 내가 아주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 카스트 라드가 나를 구해 주었거든"

아빠는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결코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나는 몹시 화가 난 카스트 라드 씨가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조르주, 당신 말이에요.
 법망에 걸린 당신을 구해준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빠가 카스트 라드 씨를 사귄 것은, 
그 사람이 변두리 어떤 중학교에 난 국어 교사 자리를 포기한 직후의 일이었다.
아빠는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존경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카스트 라드 씨는 바로 아빠의 그런 점을 이용하였다.
그는 예전에 몇 권의 시집을 낸 바 있는 사람이었다.
그 시집들 중의 한 권이 지금 여기 뉴욕의 내 아파트 서가에 꽂혀 있다.

아마도 우리가 프랑스를 떠나올 때, 아빠가 과거의 자취를 간직할 양으로 여행 가방 속에 쑤셔 넣었던 것이리라.
그 책의 재목은 <애가>이고 펴낸 곳은 파리 10구 아끄뒤끄 거리 저자 자신의 집으로 되어 있다.
책 뒤표지에는 저자의 약력이 이렇게 적혀 있다.

- 레몽 카스트 라드. 랑그도 끄 지방 백일장 입상.
  보르드 시 뮈세 문학상 수상. 가스가 뉴-북아프리카 문학 연맹 문학상 수상.


※ 이 글은 <까트린 이야기>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빠트릭 모디아노 - 까트린 이야기
역자 - 이세욱
열린책들 - 1996. 07. 20.

[t-08.02.25.  20230208-1559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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