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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스님-꽃비/요정 왕국에서 온 아이(하)

by 탄천사랑 2022. 4. 1.

원성 - 「꽃비」

 


"코코, 어서 뭐라고 얘기를 좀 해봐!
  나의 귓가에는 네 가느다란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채송화 요정은 가슴을 졸이며 화분 주위를 맴돌았다.

 

"나, 행복했어. 너와 함께 있었던 시간....,
  늘 외톨이였었는데.....,
  그런 내게 너는 나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어. 고마워, 고마워!"
"안돼, 정신차려! 이렇게 너를 그냥 보낼 수는 없어.
  제발 부탁이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나는 너를 볼 수도 없는데 마지막으로 가는 너를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어."
"울고 있구나.  울지마!  울지마!"


창밖에선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속으로 코코의 목소리는 점차 사라져갔다.
---


"어떻게 되었습니까?"


향나무 신은 대청마루 기둥에 기대어 우울하게 앉아 있는 도레미 할머니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너무나 오래간만에 비가 오네요.
  메마른 대지 위를 적시는 비 덕분에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지요.
  자연의 이치는 오묘한 것,
  태어나면 죽어가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가고,
  원인과 결과는 분명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이 비가 내 마음을 아는 것만 같군요."


도래미 할머니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는 처마에서 즐기차게 떨어지는 빗물이 흙을 파가고 있었디.
향나무 신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시는 코코를 볼 수 없게 되었군요."
"아닙니다. 코코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힐 수 있는 일은 내년을 위해 채송화 씨앗을 심는 것이로군요."


멈출 것 같지 않던 기세로 쏟아 붓던 빗줄기는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누그러들더니 새벽녘이 되자 그쳤다.
동이 떠 오르자 비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짙푸른 창공을 펼쳐보였다.
도레미 할머니의 뜨락에 여명이 밝아왔다.


꽃의 요정들은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펴고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꽃들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요정들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바라보던 도레미 할머니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꽃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기억하나요.
아침이면 누구보다 일찍 꽃잎을 펼치고
깨알 같은 눈동자에 하늘을 담았던 소녀를
눈부신 햇빛보다 밝은 미소를 지으며
기쁨과 웃음을 선사했던 꽃의 요정을


아시나요.
유연히 우리 곁에 나타난 눈 맑은 소년에게
아름다운 사랑을 가슴에 품었던 요정 이야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소녀의 가슴 속엔 영원한 꽃을 피웠죠.


보았어요.
소년에게 던져진 신의 저주는 차가운 얼음
그것을 녹여버린 요정의 사랑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간 순결한 마음
소년을 위해 몸을 던진 채송화 요정


노래해요.
새 아침이 되어도 소녀의 미소는 볼 수 없지만,
우리 가슴에 사랑을 심어주고 떠나갔노라고
비가 그치고 하늘 위에 펼쳐진 무지개 빛깔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하겠노라고.


할머니는 입가로 미소를 머금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요정들은 도레미 할머니 곁으로 다가와 눈시울을 적셨다.
찬란한 햇살은 코코의 창을 통해 방안으로 쏱아져 들어왔다.


깊은 잠에 들어 굳게 감겼던 코코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며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코코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손을 바라보얐다.


"내가 아직....,"

 

눈이 시릴 정도로 따가운 햇볕이 창문을 두드렸다.
코코는 문득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가지가 껶여 시들어 있는 채송화가 있었다.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채송화 요정!
  채송화 요정!  뭐라고 대답을 좀 해봐!"   코코는 화분을 들고 흔들었다.


그러나 가지가 꺾어 있는 채송화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망연히 채송화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코코의 귓가에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창문 밖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였다.
코코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코코의 눈앞에 펼쳐졌다.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윽한 향기를 퍼트리면서 수천 수만 개의 꽃잎들이 하늘 가득 너울너울 춤을 추며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려다보니
문득, 창가 선반 위에 작은 꽃잎 하나가 조약돌 아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약돌을 들어 꽃잎을 펼쳐 보니 거기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너를 떠나서 미안해.
  너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 너무 행복했었어.
  고마워, 코코!"


코코는 채송화 화분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코코의 두 눈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떨어져 시들어진 꽃잎을 적셨다.


"채송화 요정!  채송화 요정!"


푸르른 하늘 위에는 일곱 빛깔 무지개가 창가에 닿아 하늘을 향하여 다리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 요정들이 날아다니며 꽃잎을 뿌리고 있었다.
가슴을 적시는 자연의 눈물 꽃비.


꽃비는 그렇게 코코의 마음을 흠벅 적시고 있었지만
코코의 귓가에는 채송화 요정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p217)

 

- 끝 -
이 글은 <꽃비>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원성 - 꽃비
마음의숲 - 2006.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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