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 - 「꽃비」
먼 하늘 저편 뭉게구름 위에 요정들만이 사는 요정 왕국이 있었다.
아침마다 하늘 위로 일곱 빛깔 무지개가 펼쳐지고
저녁이면 보랏빛 오로라가 라벤더 향기를 뿜어내며 하늘 위로 커튼을 드리우는 그곳은 천상의 낙원이었다.
사시사철 푸르디푸른 숲에는 지구 상의 모든 종류의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숲 속에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한 새들이 햇살의 따스함을 노래하였다.
크고 작은 오솔길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숲의 중앙에는 거울처럼 맑은 호수가 있었는데,
어찌나 투명하게 깨끗한지 제각기 색깔을 발하는 작은 조약돌들을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물속에서 황금빛 비늘을 살랑거리며 헤엄을 치고 다니는 황금 잉어의 군무를 보고 있노라면
물 위에 떠오른 찬란한 햇살로 여겨질 정도로 눈이 부셨다.
요정 왕국의 땅 위에는 계절을 잊은 듯 항상 수천수만 가지의 헤아릴 수 없는 꽃들이 피어났는데,
비눗방울처럼 방울방울 쏟아져 내려오는 포근한 햇빛에 꽃들은 저마다 꽃잎을 활짝 열고
요정들의 축복을 받으며 싱그러운 아침을 맞이하였다.
숨을 들이키면 머릿속까지 싸해지는 상큼한 공기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살갗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정겨운 산들바람이 요정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덕 위에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노을이 드리워질 때면
요정들은 그 날의 즐겁고 재미있었던 얘기들을 나누며 행복하고 평화로운 하루의 일상을 접으며 살고 있었다.
요정 왕국에는 더없이 순수한 마음을 가진 착한 요정 왕자가 살고 있었다.
요정 왕자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은빛 새들이 노래하는 숲과 오솔길을 지나 구름 언덕을 올라
크고 맑은 눈을 깜짝거리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요정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불편한 것은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그들의 바램을 들어주는 것도 요정 왕자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요정 왕자는 모든 요정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결코 자만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충실한 하인과도 같이 요정들의 어려움과 부탁을 들어주며,
그들을 도와주는 데 한결같은 자상함을 잃지 않았다.
요정 왕자의 자비로운 마음은 거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극심한 오염과 공해로 찌들어가는 지상에 살고 있는 요정들까지도 늘 마음속으로 염려하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요정 왕국으로 돌아오기를 소원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혼탁해져 가는 인간 세상을 바라보며
지상에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요정 왕국처럼 깨끗해지기를 꿈꾸고 빌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요정들과 사람들은 매우 사이가 좋았었다.
요정들과 사람들은 달빛을 가지고 서로를 위한 시를 읊었고,
흐르는 시냇물소리와 바람의 속삭임을 음악으로 만들어 서로의 귓가에 노래해 주기도 하였다.
꽃과 나비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였다.
서로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 주고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함께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물론 지혜로운 요정들이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데이지, 은방울, 청사초롱, 물망초, 아네모네, 에델바이스…….
요정들 사이에서 불리어지던 예쁜 꽃의 이름들에서부터
오리온자리, 쌍둥이자리, 카시오페이아, 북두칠성, 제우스 등 밤하늘에 별자리를 보는 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요정들만이 알고 있었던 별자리의 신화도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어둡고 추워할 때 불을 만들어 쓰는 법도 가르쳐 주었고
음악이나 시를 쓸 때 머릿속으로 영감을 얻는 법 그리고 마음으로도 말을 할 수 있는 법들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요정들의 지혜를 인간들에게 전해 주었다.
사람들도 요정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요정들이 살 수 있는 꽃과 들녘, 나무와 숲, 연못과 강물 등과 같은 자연적 환경을 제공해 주었고,
사람들 역시 먹고살 만큼만 자연 속에서 얻어갔기 때문에 요정들과 더불어 풍족하게 살 수가 있었다.
본래 맑고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요정들과 함께 여가를 즐겼고
아주 작고 기쁜 일들에도 서로 축복해 주고 기뻐하였다.
매달 보름달이 뜰 때면 사람들은 요정들을 위하여 곡식과 과일을 장만하여 요정의 축제를 열어주어서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요정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사이좋게 자연을 공유하며 살아가던 요정들과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흘러가는 세월 따라 차츰차츰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어요?" 햇빛이 떠오르는 언덕에서 요정 왕자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언제부터일까?" 요정 왕은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에게 불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부터 그렇지 않았나요?"
요정 왕을 바라보며 묻는 요정 왕자의 눈가에 노을빛이 물들어갔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변하게 됐고 요정들과 멀어지게 되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란다.
애벌레가 아름다운 한 마리 나비로 변하고 작은 씨앗이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듯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요정 왕은 요정 왕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가볍게 다독거렸다.
"세상을 살면서 몸이 성장하듯이 마음과 영혼도 함께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뒷걸음 치고 있는 것 같구나!"
요정 왕자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요정 왕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발전하고 성장했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높은 것들을 세우고 빠른 것들을 만들지만 그것은 성장이 아니야.
빨리 가게 되면서부터 시간을 잃게 되었고, 넓은 땅을 차지하면서부터 자신이 설 땅을 잃었어.
많이 가지려고 하면서부터 정말로 소중한 것들을 잃었지.
사람들은!"
요정 왕의 말이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요정 왕자는 무언가를 알아낸 것처럼 다소 흥분된 어조로 되물었다.
"그래요!
불이 없을 때는 그냥 그대로 어둠을 보았고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기도 했는데
불을 켜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어둠을 두려워하고 환해지면서부터 도리어 시력을 잃었어요.
무엇보다도 우리 요정들을 보는 눈이 없어졌다고요.
불 때문인 것 같아요.
그렇지요?" 요정 왕자가 맑은 눈빛을 반짝거리며 아버지를 바라보니 요정 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란다.
딱딱한 것, 만져지는 것, 큰 것, 많은 것, 자신들만의 것,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쫓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의 눈에 요정들이 보이지 않게 된 거야.
요정들뿐만이 아니란다.
이제는 점점 자신들이 원하는 것, 아니면 그 어느 곳도 보이지 않기 시작했어
우정, 사랑, 믿음, 은혜, 용기, 진실...., "
그렇게 말하는 요정 왕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람들이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그들의 이상한 성장과 발전 앞에 얼마나 많은 요정들이 무모하게 죽어갔던가.
수많은 요정들의 눈물과 슬픔을 요정 왕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통곡이 지금도 요정 왕국의 별실 맨 끝 방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요정 왕국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왕국의 별실 맨 끝 방에는 언제나 삼엄하게 요정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곳은 철저한 경비 속에서도 언제나 귀빈들의 특실처럼
금빛으로 치장하고 요정 왕국의 그 어느 곳보다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요정 왕자는 언제나 그곳이 궁금했다.
아버지에게는 감히 물어볼 엄두가 안 났고,
새어머니인 왕비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르는 것이 더 좋겠다며 단호하게 말씀을 하셨다.
그럴수록 요정 왕자는 호기심이 부풀어 갔다. (p16)
※ 이 글은 <꽃비>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원성 - 꽃비
마음의숲 - 2006.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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