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유리 나기빈 -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
오늘 아침 나는 B군 (센 유동군의 중위이자 화가이기도 하다) 을 만나기 위해 발레리앙 산으로 깄다.
그는 마침 위병 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보루의 갱문(坑門) 앞에서 파리나 전젱,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에 대해 얘기를 하며 마치 보초를 서는 초병처럼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었다.
유동군의 군복 밑에 풋내기 화가의 모습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하던 말을 그치고 앞쪽을 바라보며 내 팔을 잡았다.
"아, 마치 도미에의 그림같이 아름답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사냥개처럼 빛나는 작은 잿빛 눈으로 발레리앙 산의 등성이에 나타난 두 노인의 모습을 손가락질 했다.
과연 멋진 도미에의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남자는 긴 갈색의 프록코트 차림이었다.
푸르스름한 비로드가 마치 나무에 붙은 이끼같이 보였다.
여위고 작은 체구, 붉은 얼굴, 좁은 이마에 눈은 둥그랬다.
그런데다가 매부리코에 한껏 점잔을 뺀 듯한 그 아둔해 보이는 얼굴은 영락없이 주름투성이 새 같았다.
그리고 그는 주둥이가 삐죽 나와 있는 꽃무늬 보자기를 들었고,
한쪽 겨드랑이 밑에는 통조림을 끌어안고 있었다.
파리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다섯 달 동안의 포위를 연상하게 되는 바로 그 통조림 깡통이었다.
여자 쪽은, 처음엔 너무 크다 싶은 보니트와 마치 그녀의 불행을 대변하는 듯
그녀를 위아래로 꼭 감싸고 있는 낡은 숄만 눈에 띄었다.
그리고 보니트의 색바랜 주름 장식 사이로 끝이 뾰쭉한 코와 부스스한 잿빛 머라카락이 간간이 엿보였다.
언덕 위에 오르더니, 한숨 돌리려는 듯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사실 11월의 안개에 싸인 언덕은 별로 덥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서둘러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자 쪽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갱문 쪽을 향해 걸어와서 무슨 말인가 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듯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금줄이 쳐진 군복에 기가 죽었는지, 보초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제3대대 제6중대 소속의 파리유동대원인 아들을 만나고 싶다고 간청하는
그녀의 겁먹은 듯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여기 잠깐 계십시요. 곧 불러드리겠습니다." 보초가 말했다.
그녀는 후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기쁨에 들뜬 눈으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거기서 조금 떨어진 비탈길 쪽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그들은 거기서 한참 기다렸다.
이 발레리앙 산은 말할 수 없이 커서
광장이나 경사진 둑, 보루, 그리고 크고 작은 병사(兵舍)들이 여기저기 틀어박혀 있었다.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지형,
곧 구름 속으로 소용돌이처럼 맴도는 라퓨터 섬과 같이
땅과 하늘 사이에 걸쳐져 있는 이 산에서 제6중대의 유동대원을 찾는다고 생각해보라.
보루는 지금 시간에는 북소리와 나팔소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병사, 덜그럭거리는 수통 소리로 경황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보초 교대, 잡동사니 일, 식료품 배부,
피투성이가 된 채 의용군에게 총의 개머리판으로 쿡쿡 찔려 가며 끌려나오는 스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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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원을 위해 장군을 찾는 낭테르의 농민들, 말을 타고 달리는 급사, 추위에 떠는 사람들, 땀 흘리는 동물,
이런 모든 것들이 광장을 오가다 서로 부딪치기도 하며
동방의 대상(隊商)들이 여관의 나지막한 문으로 들어가듯 갱문으로 몰려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며 어머니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내 아들 일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녀는 5분 간격으로 일어나,
입구 쪽으로 가만가만 다가가서 벽면에 몸을 붙인 채 앞뜰 쪽으로 겁먹은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아들을 웃음 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았으므로, 결코 무엇을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편은 아내보다 훨씬 더 소심했기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아내가 서럽고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와 앉을 때마다,
그 정도도 참지 못하느냐고 호통을 치거나 짐짓 모든 사정을 안다는듯
우둔해 보이는 태도로 근무상의 난점을 애써 설명하곤 했다.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소하면서도 조용한 집안의 말다툼,
또 거리를 지나갈 때 바로 옆에서 흔히 벌어지는 이런 종류의 무언극에 나는 늘 큰 흥미를 느끼곤 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이 두 남녀의 어색함과 선량함이었다.
천사(天使)역을 연기하는 두 배우는 영혼과도 같이,
티없고 표정이 풍부한 그들의 무언극과 사랑스러운 가정 드라마 연기에서 나는 가슴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는 생각한다.
'트로쉬 장군이라는 그 양반, 너무 규칙만 까다롭게 내세워서 문제야.
벌써 석 달째나 우리 아이를 만나지 못했어. 가서 안아주고 싶은데.'
소심한 성격에 생활에 찌들린 남편은
허가를 얻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절차를 생각하고 은근히 불안해져서 아내를 설득하려 한다.
"당신은 왜 그 발레리앙 산이 얼마나 먼지 생각 못하지?
차도 타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데,
그리고 성곽이란 데는 여자들이 드나들 수 없게 되어 있어."
"나는 들어갈 수 있어요." 아내는 말한다.
아내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못하는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요새 성곽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관청이나 참모 본부로 뛰어가 보기도 하고, 담당 관리도 찿아본다,
겁이 나서 식음땀을 흘리기도 하고, 추워서 벌벌 떨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무언가애 부딪히고 문을 잘못 찾아들어가기도 하고.
사무소 앞에 줄을 서서 두 시간이나 기다린 다음에야 그것이 잘못 선 줄임을 깨닫는 일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는 가까스로 허가증을 얻어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튼날은 날이 채 밝기 전에 일어나 램프를 켠다.
남편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굳은 빵을 잘라 먹지만, 아내는 전혀 배고픈 줄을 모른다.
아들에게 가서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가엾은 유동군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맛있는 것을 먹이기 위해,
포위된 도시에서는 귀한 초콜릿, 잼, 개봉하지 않은 포도주,
혹심한 가뭄에 대비해서 깊이 숨겨두었던 그 8프랑씩이나 하는 통조림까지 닥치는 대로 보자기에 쌌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집을 나선다.
그들이 성벽에 이르렀을 때, 문이 마침 열려 있었다.
허가증을 보여야 한다.
아내는 가슴을 졸인다.
규정대로 따랐으니 그렇게까지 가슴 졸일 까닭이 없는데도!
"통과시키도록 !" 당직인 부관이 말한다. 비로소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저 장교 나리는 정말 공손하시네요."
그녀는 자고새처럼 종종걸음으로 앞서 간다.
남편은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그러나 그녀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얺는다.
먼 지평선의 안개 속에서 발레리앙 산이 그녀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걸으세요....., 우리얘가 바로 저기 있었요."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새로운 불안이 솟구친다.
"만일 만나지 못하게 되면 ? 그애가 나오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나는 갑자기 그녀가 온몸을 가늘게 떨면서 늙은 남편의 팔을 붙잡고 바짝 긴장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 순간, 갱문의 둥근 지붕 밑에서 들러오는 아들의 발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애야 !"
아들이 나타난 순간, 보루의 정면이 눈부시게 빛났다.
배냥을 매고 총을 든 훤칠한 키의 늠름한 젊은이가 당당한 기세로 서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남자답고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니?"
이윽고 베냥과 거기에 달려 있는 모포와 총이 모두 어머니의 그 챙 넓은 큰 보니트 속에 파묻혔다.
이어서 아버지의 포옹이 있었지만, 그것은 별로 길지 않았다.
챙 넓은 보니트 쪽이 자꾸만 아들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지칠 줄도 모르고....,
"어디 아픈 데는 없니 ?
옷은 든든히 입고 있겠지 ?
속옷은 넉넉 하니 ?"
그리고 나는 어머니가 그 큰 보니트의 넓은 챙 밑에서 천천히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쉴새없이 키스를 퍼붓고 눈물을 흘리다가는 방긋 웃고,
사랑이 흘러넘치는 눈으로 아들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뜯어 보았다.
그녀는 석 달 동안 쌓였던 모성애를 일시에 쏱이붓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매우 감격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 쪽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해하십시오...., 여자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여리니까요.'라고 말하는 듯이.
'물론 이해하고말고요 !'
이렇게 기쁘고 아름다운 순간, 그들의 머리 위에서 난데없는 나팔소리가 들렸다.
"부르는 거예요....., 그만 가봐야 합니다." 아들이 말했다.
"뭐라구 ?
함께 식사도 하지 않고 간다는 거냐 ?"
"할 수 없어요.
전 저 요새 위에서 스물네 시간 동안 보초를 서야 하거든요."
"맙소사 !"
그 불쌍한 어머니가 소리쳤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 말도 못했다.
잠시 동안 그들 세 사람은 몹시 낙담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럼 모처럼 가져온 것이니까, 이 통조림이라도 가지고 가거라."
힘들어 가지고 온 음식이 다 소용없이 되자,
아버지는 우스꽝스럽도록 비통한 표정으로 서글프게 말했다.
그런데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이별의 정 때문에 당황해서인지 그 몹쓸 통조림이 눈에 띄지 않았다.
통조림을 찾느라 더듬거리는 손길은 참으로 딱해 보였다.
그야말로 하찮은 일을 크나큰 고통과 뒤섞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통조림, 통조림이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하고
소리치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듣는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윽고 통조림이 발견되고, 마지막 긴 포옹이 있은 후에 아들은 요새를 향해 달려갔다.
생각해 보라 !
그들은 이 식사를 위해 멀리서 찿아왔다.
어머니는 성대한 축하 잔치를 벌일 생각에 밤새도록 잠도 제대로 자지못했다.
이런 식으로 식사도 같이 못하도록,
얼핏 보였다고 생각한 낙원의 한귀퉁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닫혀버리고 마는 것만큼
슬픈 일이 세상에 다시 또 있겠는가 ?
두 사람은 한 자리에 멍하니 서서, 아들이 뛰어간 정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지난 다음에야 남편이 몸을 털고 돌아서더니, 두어 차례 기운차게 기침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단호한 목소리로 힘있게 말했다.
"자, 그만 갑시다 !"
그런 다음,
그는 우리 쪽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아내의 팔을 잡았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길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아버지는 화가 난 듯했다.
그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는 듯 보따리를 흔들었다.
어머니는 차분해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두 팔을 몸에 붙인채 남편의 옆에서 다소곳이 걸었다.
하지만 나는 그 좁은 어깨위에 덮인 숄이 가끔 경련하듯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p83)
※ 이 글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유리 나기빈 -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짧고 쉽게 읽히는 세계 명단편^콩트 모음)
역자 - 이인환
성심도서 - 1991. 11. 01.
'내가만난글 > 단편글(수필.단편.공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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