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미 외 - 부부로 산다는 것」
끊임없이 서로를 재발견하는 열정
26
희생 속에서 자아를 찾는 것
"무슨 여자가 그렇게 곰처럼 무디냐?"
싱크대 내부를 정리하고 막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물을 마시던 그가 부딪히면서 들고 잇던 컵을 떨어뜨렸다.
서둘러 물을 닦아내는 그녀에게, 그는 매몰찬 한 마디를 던지고 가버렸다.
그녀는 뭐라고 한 마디 퍼부어 주려다가 꾹 눌려 참았다.
급했다.
컵 깨지는 소리에 달려온 아이들이 조각을 밟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남편이 타인처럼 느껴졌다.
아니, 남편과 살아온 지난 세월을 모조리 보상받고 싶어졌다.
도대체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
그녀 역시 불만이 없어 입 다물고 산 것은 아니었다.
현재 우리나라 가임 여셩의 평균 출산율이 1.4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세 명을 낳았다.
딸 둘을 키워 초등학교에 입학시켜 놓았더니,
자기 아들 하나만 낳아주면 평생 상전으로 모시겠다기에 소원 성취시켜 준 것이었다.
그러면 뭐 하나.
기저귀를 한 번 갈아주기를 하나, 우유 한 번 먹여 주길 하나,
심지어 목욕까지 그녀의 몫이었다.
겨우 말귀 알아들을 만큼 키워났더니 자기가 다 키운 것처럼 목에 힘주고 다닌다.
툭하면 편을 갈라 '사나이 답게'를 외친다.
그녀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큰애들 숙제 봐주랴, 막둥이 돌보랴, 거기다 집안 살림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데도 아들 얼굴에 작은 생채기라도 생기는 날에는 난리가 났다.
"애를 키우는 게 아니라 사육을 한다. 사육을 해"
그는 호들갑을 떨어댔다.
얼마 전에는 그가 퇴근해서 들어오다가,
아들이 누나들 갖고 노는 소꿉놀이 기구를 만지작 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저 녀석이 여자 애들 사이에서 노니까 성격이 여성스러워지는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저 녀석을 위해서 우리 아들 하나만 더 낳자"
그녀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이 사람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그는 그녀가 펄펄 뛰자 슬며시 꼬리를 내리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들 녀석을 꼬드긴다.
"아들아. 혼자 노니까 심심하지?
너도 남동생 하나 있었으면 좋겠지. 그치?"
아이가 뭘 알겠는가? 그냥 '응' 할 뿐이다.
'곰처럼 무디다'라는 그의 한 마디가 그녀의 폐부를 찌른다.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처음부터 곰이었겠어?
당신처럼 철없는 남편 만나 자식 낳고 뒤치다꺼리하느라고 이렇게 된 거지.
세수는 했는지, 밥은 먹었는지,
거울 한 번 볼 시간 없이 그렇게 십여 년을 살아왔는데.'
억장이 무너지면서 눈물이 흘렸다.
'나라고 왜 하고 싶은 일이 없겠어?
우아하게 음악 들으면서 커피도 마시고 싶고, 친구 만나 남편 흉도 보고 싶고,
서점에 가서 책도 고르고 싶어'
그러나 그녀가 없으면 생활이 안 되니, 그녀는 '나'를 버리고 산 것이었다.
지난 일들이 속상해 훌쩍거리고 있는 그녀의 곁에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다.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폭언을 했는지 모른 채, 코까지 골며 잠이 든 남편.
자기가 던진 돌에 아내가 맞았는데도,
그 상처 한번 보듬어주지 못하는 저 무딘 남편,
악의가 있어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아픈 상처 하나를 가슴에 안은 채, 또, 그렇게 바쁜 일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결혼은 두 사람의 상호출자입니다.
두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철저하게 분담 되어야 합니다.
일방적인 희생은 그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희생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한쪽의 희생이 얼마나 아픈 것이며 고결한 것이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희생하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희생을 줄이기만 하면 됩니다.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먼저 변해야 합니다.
※ 이 글은 <부부로 산다는 것>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09.23. 20230906-1755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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