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영 - 「대한민국 상류사회」
일관계로 알고 지내던 사람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삼풍백화점 참사 얘기가 화제로 올랐다가
그 분이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강남의 모 백화점 얘기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옮겨졌다.
그 분은 백화점 내의 모든 업무를 두루 섭렵한 유통업계의 배테랑이어서
일반 소비자인 내가 재미있어할 만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주로 백화점에 오는 고객들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는데
그 말을 계기로 간단하게 저녁만 먹으려던 자리가 소주를 몇병이나 비우는 것으로 바뀌었다.
애기를 하다보니 그 분은 평소에는 무감각해져서 못느꼈던 분노가 솟았고
나는 나대로 거짓말같은 현실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졸부들도 적지않게 몰려사는 강남에 있는 백화점에서는
하루에도 몇번씩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곳의 소비행태는 일반 서민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와 허영이 난무하는 것을 잘 아는 편인 나로서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곳에서 최고의 사치 행태를 볼 수 있는 곳은 추측대로 여성의류매장과 고급 액세서리 매장인데
졸부의 부인들이나 복부인으로 보이는 여자들의 돈자랑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들의 돈 쓰임새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무식하여
말 그대로 猝富貴不祥(졸부귀불상-갑자기 얻은 부귀는 오히려 상서롭지 못함)인 지경이라고 한다.
그 곳 백화점 카드 중에 끝 번호가 X로 끝나는 카드는
사용금액이 무한대인 카드로 상습적으로 한 달에 수천만원어치를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그나마 카드로 구입하기 때문에 그 씀씀이가 알려지는 것인데
진짜배기들은 '카드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조차 기분나빠하며 피한다는 것이다.
어느 백화점이든 1층에 판매여사원들이 카드 발급 신청을 받기도 하고 카드 발급을 권유하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카드회원 가입을 한 건씩 할 때마다 그녀들에게 몇백원의 수수료가 보너스처럼 지급되기 때문에
적은 월급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매장에 오는 손님이면 누구에게든 열심히 판촉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한 여직원이 부유해 보이는 중년부인에게 카드 발금을 권유하였다가 민망할 정도로 면박을 당한 일화는 유명하다고.
그 여직원은 카드발급을 권하며 친절하게 카드를 사용하면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무료 주차권이 나온다든지 회원에 한해서 5% 더 할인을 해준다는 등의 설명을 하고 있는 여직원에게
대뜸 그 부인은 그까짓 것 갖고 카드를 만들라고 하느냐며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러느냐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현금이 차고 넘치는 그들은 카드같은 것이 무엇때문에 필요한지 모르는 사람들이며,
설사 안다고 해도 카드로 수백. 수천만원짜리 물건을 사면서 '할부로 사는 이유를 정말 모르는 사람들'인 것이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30대 후반의 어떤 여자는
매달 꼬박꼬박 1천 5백만 - 2천만원의 카드 대금을 결제하는데 보안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그녀 역시 땅을 많이 갖고 있어 건물 임대료같은 것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같다고 하였다.
가끔 신문이나 TV등에서 과소비를 부추기는 상품을 소개하며
비판의 눈길을 보내거나 사치를 조장하는 터무니없이 비싼 외제 물건들을 고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럴 때 그 물건을 파는 백화점측에선 '망했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그러나 반응은 정반대로, 전날 매스컴을 통해서 기사가 나간 물건은 없어서 못팔 정도로 불티나게 나간다는 것이다.
매스컴의 고발기사가 역으로 크나큰 홍보효과를 주게 되는 격으로
돈을 쌓아 놓고도 새로운 고급물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사는 사람들에겐 길잡이 역활을 하는 셈이다.
한 예로 한번은 58만원짜리 브래지어와 30만원짜리 수입팬티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기사가 나간 후,
다음날 그 비싼 속옷들을 사려고 몰려온 여자들로 인해 때아닌 대목을 봤다고 한다.
또 한번은 양복의 세일 가격이 1백40만원이나 된다는 비난 기사가 실렸는데
그로인해 재고로 남은 양복까지 싹 다 팔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고 몰려온 여자들은 그 물건들을 살 때 만큼은 꼭 현금으로 사는데,
그 이유는 혹시라도 매스컴에서 비판한 물건을 카드로 샀다가 신분이 노출되거나 추적당하여
또 다른 비난을 받을까 싶어 조심하는 것이라 한다.
사람들이 '세상 돈이 다 어디로 갔을까'라며 한숨지을 때 다른 한쪽에선 그 많은 돈을 어디다 쓸지 몰라서
새로운 상품이나 고가 사치품이 있다 하면 벌때처럼 몰려들어 아귀같이 욕심을 채우고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 덕에 수입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마냥 신이 난다.
수입 브랜드에 대해 잘 모르는 소비자에게 어중간한 등급의 물건을 수입하여
최고급품이라고 광고를 하여 막대한 이득을 남기는 것이다.
백화점 개점시간인 오전 10시30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매일 와서 이것저것 쇼핑을 하는 여자들도 여럿 있다고 한다.
매장에서 직접 관리자로 있으면서 고객들을 상대하던 그 분은
그런 식으로 돈을 물쓰듯 쓰는 여자일수록 예의는 반비례하여 조금만 대접이 마땅치 않거나
기분에 안맞는다 싶으면 거의 비슷한 내용의 말을 하며 자신 주변의 권력이나 부유함을 과시한다고 한다.
그들의 주된 레퍼토리는 정계에 아는 사람 이름을 들먹이며 족보를 파는 것이다.
"여기 사장이 ***지? 나, 그 사람하고 잘 알아."
"내 말 한마디면 너희들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
판매사원들은 이런 식의 말을 녹음기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름을 파는 정-재-계인사들은 5-6공 세력들쪽에 주로 몰려 있다고 한다.
어떤 여자들은 물건을 가리킬 때 발로 툭툭 치며 물어 보가도 하고
몰상식한 행동에 모른 척 상대를 안하면 예의 족보팔기가 어김없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백화점 문 닫으려고 이러냐. 정계의 누구누구랑 잘 안다'는 식으로 거드름을 피우면
판매여사원들은 속이야 어떻더라도 할 수 없이 굽신거려야 할 것이다.
주방용품 매장에는 앤슬리, 로얄 알버트, 로얄 달튼, 웨지우드 등의 영국제 홈세트나
독일제 후첸로이터같은 고가품들이 한 세트에 보통 6백~7백만원의 가격을 뽐내며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식샐활 문화에 적합하지도 않는 그런 그릇들을 브랜드별로 한 세트씩 다 사며
수천만원을 현금으로 지불하는 여자들도 있다고 한다.
또 같이 사러 온 여자들끼리 '누구네 집에는 뭐가 있더라'하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 부류들 사이에서는 그런 홈세트를 종류별로 구비하고 있어야 체면이 서는 모양이다.
어떤 여자는 홈세트를 사놓고는 집에 있는 기존의 장식장이 안어울릴 것같다며
수천만원짜리 이테리제 장식장을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하여 바꾸는 호사를 부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대접을 못받아 안달이 난 그녀들은 등장부터 화려하다.
차를 몰고와서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 정문 앞에서 차 키를 그대로 꽂아둔 체 내려
몇 발자국도 안 걷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간다.
VlP 손님인 그녀들을 알아보는 40~50대 주차요원들은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는데,
물건을 살 때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만큼 큰손인 그녀들이 그들에게 주는 팁은 고작 1~2천원이라는 것이다.
호텔처럼 대리주차가 가능한 곳이 아닌 곳에서
그나마 그런 여자들 덕에 부수입이 없는 아저씨들이 조금의 돈이라도 챙길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몇백만원어치씩 사는 여자들이
돈 몇푼 벌려고 굽신거리는 나이 많은 아저씨들에겐 단 돈 천원도 주기가 아까운 건 무슨 심사일까?
그런 류의 여자들은 평상시 쇼핑을 할 때는 돈 잘 쓰는 귀부인이지만
조금만 대접이 못마땅하거나 물건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갑자기 태도를 돌변,
판매사원이 말대꾸라도 할라치면 본색이 완전히 드러난다고 한다.
차마 입에 담지 목할 욕설을 퍼부으며 펄펄 날뛰는 그녀들의 모습이 그것이라고. (p56)
※ 이 글은 <대한민국 상류사회>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입니다.
이석영 - 대한민국 상류사회
베스트셀러 - 1997.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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