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미 외 - 부부로 산다는 것」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기쁨
017.
화가 치밀 때마다 아이 눈치를 보는 것.
큰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텔레비전을 새로 장만했다.
조그만 텔레비전을 널찍한 거실에 두 자니 아무리 봐도 옹색했다.
그래서 거금을 들어 최신형 디지털 텔레비전을 장만했다.
가장 기뻐한 것은 아이들이었다.
커다란 화면에서는 주인공이 말을 타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최신형 텔레비전은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리모컨에 뭐가 그리 기능이 많은지, 설명서를 들여다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위성방송까지 시청하게 되자 설상가상이었다.
그녀가 설명서를 보면서 기능을 정리했다.
다양한 프로그램은 물론, 동시 화면과 각종 관리 기능을 리모컨에 입력해 놓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리모컨에 자꾸 손을 대다 보니 입력했던 기능들이 없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기를 몇 차례, 어느 날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는 당시 빅뉴스가 많았던 때라 9시 뉴스를 보기 위해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그녀는 리모컨 기능을 다시 살리겠다면서 하나하나 입력을 하는 중이었다.
"다 된 거야?"
"아니, 기다려봐."
"이제 다 된 거지?"
"아니, 조금만 더."
뉴스가 시작한 지 5분이 지났지만, 텔레비전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뭔가를 입력했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채널이 계속 바뀌었고,
아예 화면이 사라지기도 했다.
"좀 보자, 다 끝나겠다. 입력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아냐, 이제 다 됐다니까?"
"그만 좀 해라. 나중에 하라니까"
"잠깐만 기다리라니까."
그가 몇 번 종용을 했지만
그녀는 하던 것을 마무리해야 한다며 들은 체 만 체하면서 계속 지웠다 입력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바짝 화가 났다.
"그만 좀 해, 그만 좀....,"
그는 리모컨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리모컨은 박살이 나버렸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아이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고함을 치면서 물건을 던지는 것을 처음 보았던 터였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빠와 닫힌 방문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다음 날, 그녀는 아침을 차려주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왜 말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냉랭한 침묵이 집안에 내려앉은 가운데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아빠는 왜 말 안 해?
아빠, 왜 리모컨 던졌어?" 그는 할 말이 없었다.
"몰라. 엄마한테 물어봐라."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네 살짜리 아들이 말을 배우려는지 계속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아빠, 왜 리모컨 던졌어? 리모컨이 잘못했어?" 그는 부끄럽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애들에게 어떻게 각인될까'
그런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했다.
부부 사이야,
시간이 지나고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하며 이해가 되겠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런 행동이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는 가족에게 잘못을 빌었다.
"아빠가 잘못한 거야. 앞으로는 던지지 않을게"
결혼 기간은 물론 연애할 때도 티격태격한 적이 없었는데,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한바탕 홍역을 치른 셈이었다.
하지만 악몽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똑같은 리모컨을 구입한 이후,
그 일을 잊은 줄 알았는데 네 살배기 아들이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아빠, 리모컨 왜 던졌어? 응?"
그럴 때마다 그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자식들 앞에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새삼 실감하게 됐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입니다. 엄마 아빠가 평소 하는 것을 아이들은 그대로 따라 합니다.
말버릇이며 습관을 배우고 익힙니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흡수합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여과 없이 받아들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는 먼저 아이의 눈치를 보세요.
그 맑은 눈망울을 잠시 들여다보면 후회할지도 모를 일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부부로 산다는 것>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07.01 20210127-16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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