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미 외 - 부부로 산다는 것」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기쁨
015
때로는 공처가가 되어 보는 것
축구 국가대표팀의 중국과의 한판 승부.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가 가족 다음으로 사랑하는 축구를, 그것도 멋진 승부를 볼 수 있는 날이었다.
거실의 텔레비전.
그는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그녀를 보았다.
비슷한 내용으로 재탕 삼탕 우려먹는 드라마, 사랑 타령, 눈물 타령이다.
그녀는 남편의 간절한 바람과는 관계없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질질 짠다.
그가 손발을 씻고 와서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러보지만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수작이다.
무슨 드라마이기에 그리 슬프다고 하는지…,
힐끗 쳐다보니 남녀 배우가 죽상을 하고 훌쩍거리고 있는 것이 아마도 사랑하기에 해어지고,
뭐 그렇고 그런, 정말 별것도 아닌, 일편단심 곁을 지키고 있는 남편이 있는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드라마다.
그가 처음부터 채널 선택권을 갖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신혼 초에는 잠시 채널을 돌릴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내 얼굴과 텔레비전 화면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라는 그녀의 최후통첩에 백기를 들고 말았던 것이다.
“내 얼굴만 보라”던 그녀가 이번에는 리모컨을 잡았다.
그러고는 도대체 넘겨주지 않는 것이었다.
섣불리 리모컨에 손을 댔다가는 후환이 두렵다.
동네 호프집이라도 가서 축구를 보려고 했지만 수중에 돈이 없다.
고작 가진 거라곤 천 원짜리 몇 개가 전부다.
그녀는 무서운 여자다.
오로지 재래시장만을 이용한다.
재래식 시장도 말이 애용자이지 그가 객관적으로 볼 때는 별로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일단 시장 나들이를 할 때면 그가 죽을 맛이다.
그녀의 에누리 작전에 어김없이 그가 '바람잡이 소품'으로 동원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엇을 사든 한 가계에서 30분 이상 뒤적거린다.
주인의 머리에서 적당히 열불이 날 즈음 가격을 묻는다.
일단 '기 싸움'에서 꺾인 주인은 정상가격(?)에 근접한 값을 부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어림없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뚝 잘라낸다.
가게 주인은 할 말을 잃고 눈만 껌뻑거리기 일쑤다.
옆에서 바라보노라면 흥정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생결단이다.
이쯤 되면 그가 바람잡이로 나서야 한다.
"여보 갑시다. 다른 집에서 사면 되지."
이게 그가 맡은 역할이다.
그 말 한 마디를 가게 주인이 잘 듣도록 툭 던지고는 무작정 그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러면 그녀가 몇 분 만에 협상을 매듭짓고 적당한 값으로 물건을 들고 온다.
용돈관리는,
깐깐한 경리부장이 울고 갈 정도로 확실하고 철저하다.
그녀의 감시는 철저하다.
그녀는 교통비와 점심 값을 정확하게 맞춰 그에게 내준다.
그러면서도 생일이니 결혼기념일에는 남편을 몰아세운다.
장미꽃 한 번 받아보는 게 소원이라는 등,
내 평생 싸구려 플라스틱 머리핀 하나 선물로 못 받아봤다는 등.
그러면 남편더러 노상강도를 하라는 말인가.
‘그래도 매서운 아내 덕분에 집도 장만하고 이만큼이나 살게 됐으니 그건 다행인가.’
그는 그녀와 결혼한 이후의 손익계산서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꽤 되는 것 같다.
어쨌거나 득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어느덧 드라마가 끝났다.
그녀가 꿈쩍 않는 것으로 보아 잠이 든 것 같다.
그는 이때다 싶어 아내의 손에서 살며시 리모컨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잽싸게 채널을 돌렸다.
에구, 축구도 끝났다.
2 대 0으로 이겼다.
그나마 기분이 좋다.
잠든 그녀가 무슨 꿈을 꾸는지 빙그레 웃는다.
그는 아내를 깨운다.
“들어가서 자자. 감기 걸릴라.”
결혼은 투쟁의 연속입니다.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입지를 보전하며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한 강도 높은 투쟁입니다.
양쪽 모두가 정당한 사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투쟁의 끝은 한쪽의 양보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바보 같아서 양보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양보하는 것입니다.
※ 이 글은 <부부로 산다는 것>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06.26. 20210605-174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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